소설리스트

가짜 남편-3화 (3/74)

3장. 결혼의 이유

“투자자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목표는 하나니까요.”

목표는 하나다. 원하는 걸 얻기만 하면 된다. 그러자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난 결혼이란 걸 해야만 해요. 그게…… 누구든 상관없어요.’

회의가 길어지자 아무래도 정신 집중이 쉽지 않았다. 이도는 풀어진 넥타이를 아예 벗어 버리곤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았다. 권 회장이 예의 주시하는 외국 투자 건으로 급히 소집된 내부 회의가 오후까지 릴레이로 이어졌다. 밥조차 간단히 도시락을 시켜 때우며 투자 건에 사활을 걸었다.

그는 증명해 보여야 했다. 권이도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권 영감이 그를 거둬들인 이유가 그것일 테다. 그렇게 해 주고자 이 자리에 앉았다. 수시로 권 영감의 딸들이 그를 시험대에 올렸지만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었다. 그래야만 지켜 낼 수 있는 자리였다. 이도는 서류 파일에 찍힌 ‘선흥’이란 글자를 훑다 정신을 차렸다.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합시다.”

모두 지쳐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또 무슨 뒷말이 나오기 전에 임원들은 얼른 줄행랑을 쳤다. 권이도의 독한 마인드에는 이골이 난 임원들이었지만 오늘은 다른 때보다 그 강도가 심한 것 같아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권 회장이 처음부터 장자 승계를 못 박으며, 젊은 나이의 그를 상무 자리에 올린다고 고집부렸을 때 어느 누구 하나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언제쯤 그가 고모들의 계략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질지 기다리며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수록 이도는 독하게 싸워 냈다. 이기는 건 자신 있었다. 누구에게 기댔다면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게 싸워 올린 그만의 성. 그것만이 그를 위로해 주었다.

“저녁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퇴근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이도는 박 비서에게 다음 일정을 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리하셔서 좋을 것 없으니까요.”

재영은 비서가 아닌 선배의 눈으로 이도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부탁한 서류 하나를 조용히 건넸다.

“말씀하신 겁니다.”

박 비서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든 이도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효은이 그에게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병원 진단서였다.

“안타깝지만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도 위험한 고비가 있었다고 하고요.”

그날이었을까. 이도는 알겠다며 박 비서에게 그만 나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이도는 아픈 머리를 붙잡고 눈을 감았다. 결혼해 달라며 사정하던 젖은 눈이 다시 떠올랐다. 무슨 마음인지 전부 알 수는 없어도 이해는 되었다.

가족이라고는 아픈 할아버지 한 명뿐이니, 자신의 인생을 내던져도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원하는 소원이 그와의 결혼이라면. 그것을 들어주고도 남을 만큼 지금 그녀는 절박했다. 이도는 생각의 끝에 박 비서가 건넨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아버지는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권 영감을 찾는 이도가 낯설어 강 여사는 잠깐 멈칫했다. 이제야 서로를 마주 보고 가까워지려나 싶어 조금은 기대감도 들었다. 얼른 권 영감이 있는 서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금방 들어가셨어. 주무시진 않을 거야. 차라도 준비하련?”

강 여사가 돌아서 부엌으로 향하려는데 이도가 짧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쌩하니 찬바람이 부는 것은 여전했다. 강 여사는 잠깐 그 자리에 멈춰 서 쓸쓸히 웃을 뿐이었다.

이도가 서재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자 짧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강 여사인 줄 알았던 권 영감은 손자의 등장에 잠깐 눈을 키우긴 했지만 예상한 것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네가 퇴근 인사를 다 하고. 이제 정신을 차린 게야?”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권 영감은 접대 테이블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이도는 할아버지의 뼈 있는 핀잔에도 대꾸하지 않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차를 내오게 하기 위해서인지 권 영감이 전화기를 들자 이도가 입을 열었다.

“필요 없습니다. 금방 일어날 거예요.”

부담스러운 건 뭐든 싫다는 녀석이니 이해한다 생각하며 권 영감은 전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대답 대신 이도는 박 비서가 건넨 서류를 권 영감 앞에 내놓았다. 눈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훑어 낸 권 영감은 잠깐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황한 눈빛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도가 알게 될 것이란 것도 그의 머릿속에는 계산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 처음부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도가 묻자 권 영감은 손자를 한 번 바라보고는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놓았다.

“네놈한테 그게 중요한 거였어?”

핑계치고는 잔인했다. 동정심을 이용해 결혼시키려 한다고 권 영감을 더 경멸했을지도 모르나 지금도 수긍하기는 힘들었다.

“지금 다 말씀하세요.”

이도는 더 이상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를 동아줄처럼 붙잡으려 하는 한 여자를 그저 내치기도, 그렇다고 결혼까지 감행하기에도 이유가 불충분했다. 거절을 위해선 제대로 된 내막을 알아야 했다.

“뭘 말하라는 게야?”

“이것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거 압니다. 할아버지가 작은 인연 하나 때문에 이 일을 끌고 오실 분은 아니시잖아요?”

그에 대한 연민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손자였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영감이 그를 이용한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럼, 네 녀석부터 확답을 내놓아. 그 아이랑 어찌할 셈이야?”

주기 전에 받을 것부터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업을 일궈 이 자리까지 온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자식의 일에, 가족의 일에도 그 행동과 논리를 가져다 붙일 때면 이도는 가슴속에 서늘한 찬 바람이 스쳐 갔다.

“처음부터 이때를 기다리시고 계셨단 소리로 들리네요. 옛날 인연 운운하셨던 건 핑계였고, 제가 그 아이 할아버님 상태를 알아낼 거라는 것도 계산하시고 숨기신 것이고요. 이 자리에 앉아서 제가 할아버지랑 사업하듯 거래를 할 것도 생각하신 각본입니까?”

쯧쯧. 권 영감이 혀를 찼다. 철없이 꼬이고 꼬인 마음을 언제야 풀 작정인지 묻는 눈빛이었다.

“네놈이 싫다면 강요는 안 한다. 또 다른 혼처를 찾으면 그만이야.”

“할아버지.”

지치지도 않는 평행선이었다. 차라리 이깟 결혼 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도는 감정을 다스리고 냉정을 되찾아야 했다. 눈앞에서 울음을 삼켜 내려 주먹을 움켜쥐던 여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판단은 올발라야 했다.

“저도 모두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저한테도 그럴 권리는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야 말이 통한다며 권 영감은 낡은 서류 하나를 금고 안에서 꺼내 가져왔다.

“손 박사가 선흥 초창기 때 자문을 해 주고 받은 주식이 있어.”

예상한 그대로였다. 어떤 양반인데. 이도는 이제야 모든 상황이 납득됐다.

“평생 손에 움켜쥔 채 내놓지 않을 것 같던 양반이 어느 날인가 찾아와서 손녀딸에게 그걸 다 넘긴다고 말하더구나.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도 남았지. 그러면서 너에 대해서도 얘기했어. 자기 손녀와 닮은 인생을 살고 있는 너라면, 좋은 짝이 될 거라고.”

“…….”

이도는 웃음이 나왔다. 닮은 삶. 어쩌면 맞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부터 하게 될 슬픈 운명이 너무나도 닮았으니까.

“그 아이와 결혼하면 필요한 선흥 주식이 너한테 들어온다. 네 고모들보다 네가 더 선흥 회장 자리에 가까워지는 거라고.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 부모도 없고, 하나 남은 할아버지도 얼마 안 있으면…….”

“됐습니다. 그만하세요. 알아들었습니다.”

정말 권 영감의 말대로 이도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자리였다. 아니, 어쩌면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결혼일지도 몰랐다. 권 영감이 베푼 은혜를 빠르게 갚기에 이만큼 더 완벽한 것이 없었다.

“외로운 아이야. 더 외롭게 만들 필요가 있겠니?”

방금 전까지 주식을 입에 올린 양반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

외로움. 외로움이라니. 잇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 외롭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죠.”

이도의 대답이 허공에서 흐려졌다.

* * *

초여름이었지만 아직 병원 밖은 쌀쌀했다. 얇은 옷이라도 걸치고 나올 걸 그랬나, 잠깐 생각하고 있는 사이 카디건 하나가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인마, 아직 여름 아니야. 그러다 너까지 병원 신세 진다. 얼른 입어.”

굳이 사 온 햄버거를 밖에서 먹고 싶다고 한 건 승재였다. 효은이 사귄 친구 중 가장 오래되고 그녀의 마음을 행동만 봐도 알아차리는 승재는 답답한 효은의 마음을 눈치채고 일부러 끌고 나오는 길이었다.

“병문안 오면서 햄버거 사 오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연못이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은 효은이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경치는 나쁘지 않았고, 병원 안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조금 덜 죄어 왔다.

“이건 할아버지 선물이 아니라 네 선물이잖아. 이 오빠의 갸륵한 마음을 네가 알겠니?”

“갸륵은 무슨. 얼른 먹기나 해.”

모처럼 효은이 먹을 것을 재촉하자 신이 난 승재는 사 온 햄버거 중 젤 큰 것을 친구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자. 최신버거야.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승재야.”

“응.”

“나랑 결혼할래?”

“캑.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기분 좋게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물다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으로 승재가 효은을 바라봤다. 그가 건넨 최신버거를 효은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베어 물었다.

“농담이야.”

“아니, 그런 등골 서늘한 농담을…….”

“……뭐라고?”

효은이 승재를 슬며시 노려봤다.

“많이 아쉽지만 그건 불가능하단 얘기지, 내말은.”

승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자로서 별로야?”

안 하던 자학까지 하는 걸 보니 오늘 효은은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이 최신버거만 먹었는데.”

“야, 먹지 마.”

승재가 얼른 효은의 햄버거를 빼앗았다. 그러자 효은은 또 그것을 순순히 주고 포기한 듯 앞의 경치만 바라보았다. 진짜 정상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일로 많이 힘든 걸까. 승재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야, 장효은! 왜 그래? 무섭게. 오늘 좀 많이 낯설다, 친구.”

“내가 아직 장효은으로 보이니?”

효은이 그의 마음을 받아 귀신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그만하지?”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재미없다. 들어가자.”

“야.”

햄버거는 다 먹고 들어가자고 하려는데, 돌아선 효은이 정말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승재가 그런 효은의 눈을 따라가 보니 같은 남자가 봐도 아주 멀쩡해서 짜증 나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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