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상무님. 발표 10분 전입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서 잠들었어. 네 가방 안에 기저귀 넣었어? 우유도?”
주말 아울렛은 사람들로 넘쳐 났다. 가족 단위의 쇼핑객들, 유모차가 한데 섞여 교통이 혼잡한 도로처럼 느껴졌다. 그 속의 신나고, 설레고, 행복한 표정들이 모여 거대한 돈 자루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돈을 쥐고 왕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겁한 변명 뒤에 숨어 끝내 떠나보냈다.
그의 심장을 가져간 여자.
그에겐 너무 어렸던 신부.
그녀를 이제야 다시 만났다.
1장. 이도
짙은 회색의 잘빠진 외제 차 한 대가 학교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차종을 알고 있던 몇몇 남학생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왔지만 이내 자신에겐 비현실이라는 듯 몸을 돌려 제 갈 길로 사라져 갔다.
봄 학기를 마친 교정에는 어느새 푸른 녹음으로 가득한 초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른 더위로 에어컨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오늘 자 뉴스를 태블릿 화면으로 읽어 댈 즈음, 박 비서가 이도에게 목적지 도착을 알렸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이도는 박 비서에게 짤막한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습관적으로 넥타이를 고쳐 맨 뒤, 안내 표지판이 가리키는 돌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지나 인문관 안으로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급하게 그를 맞았다. ‘심리학과’ 팻말이 붙은 사무실을 찾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이도는 지난 주말 아침 권 영감이 한 말을 떠올렸다.
‘결혼하거라.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
의견 따윈 묻지 않은 통보였다. 서른넷. 일만 보며 달려온 그의 나이가 ‘결혼’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는 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인생이었다. 누군가를 책임질 인생 같은 건 그날 이후 꿈조차 꾸지 않았다.
뒤처리는 결국 그의 몫이었다. 영감이 밀어붙이기 전에 그가 손을 쓰면 될 일이었다. 그의 결혼 상대는 스치듯 만난 기억이 있는 권 영감 친구의 손녀였다. 스물넷.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그저 젊음을 즐길 나이였다. 합의된 거절을 얻어 낼 가능성이 높았다. 이도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반쯤 열린 학과 사무실로 들어서자 조교로 보이는 한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장효은 씨를 찾아왔습니다. 여기 있다고 들었습니다.”
회의 스케줄이 조정되면서 약속 시간까지 틈이 생겼다. 맞선도 일처럼 평일 오후 스케줄에 집어넣어 버린 이도는 효은에게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걸어 시간을 당길 수 없겠냐고 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빠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고, 이도는 할 수 없이 지금 있는 곳의 위치를 물었다. 찾아갈 테니 차 한잔만 하자는 말엔 알겠다는 대답이 예상보다 쉽게 돌아왔다.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여자아이였다. 그가 딱 지금 그녀의 나이인 스물넷에 권 영감과 함께 시골 마을 어딘가로 여름휴가를 갔다가 한 번 만난 게 전부였다. 통통 튀어야 할 여중생이 나이답지 않게 시니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효은이 지금 과방에 있는데. 제가 전화…….”
“거기 위치만 알려 주십시오. 찾아가겠습니다.”
이도는 안내를 받고 학과 사무실을 벗어났다. 3층 복도로 들어서자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조용한 적막이 일었다. 조교가 가르쳐 준 과방 앞에 다다르자 열린 문틈 사이로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흰 티셔츠에 짙은 청바지를 입은 여자는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효은이라는 것을 그는 단번에 알아챘다.
“장효은.”
인기척에 놀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깔끔한 진회색 슈트를 차려입은 키가 큰 남자에게로 고정되었다.
“누구……세요?”
전화까지 했으니,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이도는 잠깐 헛웃음을 내놓으며 짧게 대답했다.
“권이도.”
“아.”
단발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또 말이 없었다. 억지스런 만남이라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이도는 오히려 그게 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짧게 끝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되새기는데 예상하지 못한 뒷말이 붙었다.
“많이 변하셨네요. 못 알아봤어요.”
진심인 듯 효은의 눈빛에서 미안함이 비쳤다. 서로를 못 알아볼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는 건 이도도 깨달은 바였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그때의 중학생 소녀가 아니었다. 성숙한 여자로 변해 있는 효은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왜요?”
어쩌다 보니 이도는 그녀를 훑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나와. 차 한잔하자.”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선 이도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계를 확인했다. 그에게 시간은 곧 돈이었고, 이렇게 버려지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학교 안에 커피숍 있어? 시간 아꼈으면 하는데.”
걸어가던 이도가 효은을 돌아보며 재촉하듯 말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 부탁합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이도는 또다시 시계를 내려다봤다. 앞의 그녀가 그 뜻을 알아챘으면 하는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어설픈 인사 따위를 나누며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 결혼을 할 생각이 없어.”
이도는 결론부터 꺼내 놓았다. 효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저는 못 할 이유가 없어요.”
진짜 강적은 여기에 있었나. 이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도 괜찮은 이유는?”
“아저씨는…… 제가 싫으세요?”
아저씨. 그의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호칭이었다. 그 아저씨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어린애를 데리고 무슨 말씨름을 할까 싶었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대하기 힘든 타입이었다.
“너는 내가 좋은가?”
기습적인 이도의 질문에 효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이도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시간 낭비하지 말자, 서로.”
“할아버지가 원하세요.”
효은은 다른 소리를 했다. 이도는 말문이 막혔다. 네 인생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이냐고 물으려는데 효은에게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요. 할아버지 설득하는 거.”
장난이 치고 싶은 건가. 만나자마자 결혼을 거절하는 남자. 재수가 없어 이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도는 잠깐 입꼬리를 올렸지만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과 보고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일 처리하듯 마지막 말을 건넨 이도는 서둘러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효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에 오르다 뒤돌아본 건 오히려 이도였다.
* * *
아침 7시. 널찍한 10인용 식탁 위에는 건강한 제철 음식들이 알맞게 조리돼 올라와 있었다. 이 집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큼 손맛 좋은 강 여사의 지시에 따라 주방 도우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준비하는 음식은 단 2인분이었다. 널찍한 식탁의 크기에 비해 단출한 인원이었지만 그 두 사람의 입맛을 맞추는 것은 10인분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웠다. 일흔이 넘은 권 영감은 간이 맞지 않은 음식엔 두 번 손대지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것이 그의 손자 권이도였다. 짜거나 매운 것, 설익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은 음식이 식탁에 올라가면 그대로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모든 비위를 맞추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들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강 여사야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모두들 입 맞춰 말했다. 그 강 여사가 권 영감의 실질적인 후처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은 채 말이다.
“식사하세요.”
강 여사는 거실 소파에 앉아 각자 조간신문을 보고 있는 권 영감과 이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침 인사 이후,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던 할아버지와 손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생물 낙지가 좋아 올려 봤어요.”
강 여사는 권 영감 쪽으로 다가가 조심히 말하곤 찌개의 뚜껑을 열어 주었다. 아무런 대꾸 없이 찌개의 간을 본 권 영감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식사를 시작했다. 이도는 조용히 그를 따라 수저를 들었다.
“그래서, ……설득은 제대로 하고 온 게야?”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봤을 권 영감이 한발 앞서 물었다. 이도는 잠깐 고개를 들어 강 여사와 눈을 맞추었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었다. 강 여사가 조용히 주방 사람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도는 수저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의미 없는 일에 힘 빼고 싶지 않습니다.”
“왜 결혼이 의미가 없어?”
“…….”
이도는 대답 대신 권 영감을 바라봤다. 몰라서 묻느냐는 억울함이 두 눈 가득 차올랐다.
“넌 권씨 집안 장손이야. 남들처럼 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어?”
“원하시는 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참아 내듯 끊어 뱉는 그의 목소리가 한겨울처럼 시렸다.
“결혼도 이 할아비가 원하는 게다.”
노인은 쉬웠다. 그래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의 어두운 하늘처럼 늘 실체 없이 가라앉아 있는 손자의 눈을 볼 때마다 권 영감은 마음에 얹어진 돌덩이의 무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가 결정했고, 그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으니. 지금도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권이도는 누가 뭐래도 그의 손자였다.
“좋은 아이다.”
이도가 허무하게 웃었다.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눈은 시퍼��고, 또 선명했다. 그날처럼.
날벼락처럼 부모를 잃은 날. 그에게 남겨진 유품은 친자 확인 불일치라는 서류 파일뿐이었다. 권이도에게 권씨의 피가 없다는 증명이었다. 매년 이도 친부의 납골당을 찾아간 어머니는 결국 그 비밀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진실이 담긴 서류 파일을 끝내 어머니에게 내밀지 못한 채 차를 출발시켰고, 사고는 고속도로 보호 난간을 최고 시속으로 들이받으며 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뒷수습은 모두 할아버지 무상의 몫이었다. 서류는 당연히 그의 손에 제일 먼저 들어갔고, 노인은 이도의 눈앞에 그것을 가져와 잔인하게 내밀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 때의 일이었다. 권 영감은 장지에 서지도 못한 채 골방에 갇혀 울고 있는 손자에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제 뜻을 알렸다.
‘달라질 건 없다.’
‘너는 누가 뭐래도 권씨다. 그러니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임을 명심해.’
‘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알아듣겠어?’
노인의 말은 이명처럼 들릴 뿐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족쇄였다. 외로움을 가장한 포기였다. 이도는 그날 이후, 진짜 권이도가 아니라 선흥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을 후계자로만 살았다.
“그런 널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게야.”
그래서 포기했다. 평범한 삶을. 어차피 그 권이도는 가짜이니까.
“그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지도 않을 남자 옆에서 시들어 가는 꽃처럼 살 의무가 있습니까?”
덮어 놓고 끝을 말하는 남자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권 영감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못난 놈.”
“그렇게 키우셨나 보죠.”
이도는 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저쪽 어르신께 난처하실 일 없도록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집불통. 이도는 너무나 권씨 집안의 피를 닮았다. 권 영감은 손자가 사라진 공간을 잠시 건너다보다 다시 수저를 들었다. 아침 식사가 평소보다 늦어졌다.
* * *
일주일의 시간은 아주 쉽게 흘렀다. 매일매일 전쟁처럼 치고 올라오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이도는 잊고 있었다. 한 여자를. 잠깐 서류를 물리고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일 처리가 빨랐으면 한다는 경고에도 효은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시간을 끌어서 서로에게 좋을 건 없을 텐데.
권 영감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쪽에서 거절하지 않으면 곧 상견례를 진행할 것이란 말까지 꺼내 놓았다. 기어이 자신의 뜻대로 하고도 남을 영감이겠지. 그의 손을 동아줄처럼 맞잡은 순간 이미 정해진 삶일지도 몰랐다.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 나갈 껍데기뿐인 삶.
‘너는 여전히 권씨 집안 장남이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자란 주문 같은 말이 요즘은 상흔 같았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잘할게요. 이 집안의 장남으로 목숨을 다해 열심히 살게요.’
그렇게 벌벌 기며 내쳐질까 봐 바닥에 납작 엎드려 말했던 권이도는 어디로 갔을까. 이도는 의미 없는 결혼만은 거부하고 싶어 하는 현재의 자신이 건방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저씨는…… 제가 싫어요?’
한 여자애가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걸렸다. 목련꽃 같은 여자. 첫인상이 그랬다. 희고, 몽글몽글한. 자세히 보다 보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여자애였다.
어린애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이도는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 버튼은 쉽게 눌러졌다.
― ……네.
“뭐 해?”
마치 사귀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이도는 자신의 행동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경직되어 있던 입가가 조금씩 풀리자 상대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 그게 진짜 궁금한 거예요?
퉁명스런 말투가 예전의 꼬맹이를 떠올리게 했다. 이도는 답답하게 옥죄던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고 천천히 뒷말을 건넸다.
“내가 궁금한 게 뭔지 네가 더 잘 알 텐데.”
굳이 이 여자애를 붙잡고 해결하지 않아도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도 나처럼 이용당하는 상황이겠지. 당사자의 뜻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강요. 그 부분에서 동지애를 느끼는 걸까. 이도는 효은과의 대화가 싫지 않았다.
― ……좀 기다리세요. 아직 할아버지한테 말 못 했어요.
“우리 이러다 식장 들어간다.”
― …….
그답지 않은 장난스런 말투 때문일까. 효은은 대답이 없었다. 이도는 다른 말을 생각했다.
“저녁 먹었어?”
― 네? 그건…… 왜요?
당황한 효은이 말끝을 흐렸다.
“난 아직이야. 같이 밥 먹자.”
― 아저씨.
급하니 또 아저씨였다. 이도는 덮어 둔 서류를 정리했다.
“만나서 같이 작전을 짜자고. 주소 문자로 보내. 바로 출발할 테니까.”
이도는 효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그가 효은을 데려간 곳은 한강 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특별한 VIP 고객이 아니면 예약 없이는 들어서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일부러 이곳을 골라 왔는데 효은의 관심은 창밖의 어두운 야경이었다.
“왜 안 먹어?”
“저녁 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요.”
효은이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스테이크를 썰어 몇 점 입 안으로 넣던 이도는 곧 입맛을 잃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효은이 시선을 옮겼다.
“벌써 다 먹었어요?”
“혼자 먹으니 맛이 없네.”
대놓고 하는 이도의 지적에 효은이 잠깐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죠, 하는 얼굴로 다시 창가를 바라봤다. 쓸쓸한 표정이 신경 쓰였다. 또다시 비에 젖은 목련꽃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효은이 여전히 창가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스무 살이 되면 내 말을 잘 듣는 아주 착한 남자와 결혼해서 날 닮은 예쁜 딸을 낳아야지. 친구들은 다들 아나운서가 되겠다든지 유학을 가고 싶다든지 하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난 가족을 만드는 꿈을 꾸고 있었어요. 우습죠?”
고개를 돌린 효은이 이도를 바라봤다. 지금 그녀의 눈엔 그가 어떤 남자로 비칠까. 이도는 어쩐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참고로 내가 본 넌, 현모양처 스타일은 아니야.”
그가 진지하게 농담을 했다. 효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주 고마운 충고네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잠깐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효은이 먼저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이도는 그런 효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사업이란 걸 업으로 삼게 된 이후, 그는 늘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며 일했다. 그 안에 모든 해답이 있었고, 눈빛으로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면 일이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게 이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그 속에서 한 번도 패배를 맛본 적 없었다. 집착 같은 이도의 시선이 효은을 괴롭혔다.
“그만 좀 봐요.”
참지 못하고 효은이 조용히 혼냈다.
“보는 건 알고 있었어?”
“바보 아니에요.”
일자로 굳게 다물린 효은의 입술이 이도를 웃게 했다.
“가. 데려다줄게.”
결혼하지 않을 방법을 같이 의논하자던 이도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효은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