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회 -->
로리는 몸을 덜덜 떨었다. 뒤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손을 천천히 내려 화장대 위의 작은 손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작은 손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이번에도 그의 모습이 있었다. 작은 손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 뒤에, 그가 있었다.
이젠 뒤를 돌아 그를 직접 마주해야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두려워서 손거울 대신 진주핀을 들고 그 작은 진주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역시나, 그 작은 진주알 속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고 있었다.
결국 로리는 고개를 돌리며 외치고 말았다.
“핀!”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거울 속에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설마 헛것을 본 것인가? 그녀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방안 구석구석, 모든 반질반질한 것에다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창틀, 가구의 매끄러운 부분 곳곳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그 뒤에 있을 핀의 모습을 찾았지만, 핀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감정의 소모에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그녀는 침대로 향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녀가 드레스를 가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매끄러운 나무문의 표면에, 또 그의 남자의 모습이 비치는 것이었다. 로리는 이제 이성을 잃고서 문으로 뛰어 가기 시작했다.
“아가씨, 드레스 입어보시지 않으실……?”
“비켜!”
로리는 핀의 모습을 쫓았다. 매끄러운 문 표면에 비춰진 핀의 모습은, 어느새 복도에 장식된 액자의 표면 위에 비쳤고, 저 멀리 있는 도자기의 표면에도 비쳤다. 분명 로리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매끄러운 표면 하나하나는 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금으로 만들어진 촛대, 매끈한 마룻바닥, 현관을 장식하는 보석 조각 작품, 로리는 핀의 모습을 담는 모든 물건들을 지나쳐서 어느새 현관문 까지 열게 되었다.
달빛 아래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더 이상 물체를 반사시킬 수 있는 사물은 없는 것 같았으나…… 로리는 문득 연못을 보았다.
“핀, 핀……!”
그곳이라면 그 남자를 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래서 맨발로 연못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로리의 행동에 하녀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뒤따라 나섰다. 연못 앞에 선 로리가 자신의 모습을 연못 수면위에 비추어 보았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마주했다. 달빛에 빛나는 핀의 얼굴을.
그는 웃으며 입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잘했어, 고마워요.
로리는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금세 그 뜻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녀가 로리의 등 뒤에 서서 가쁜 숨을 내쉬며 기쁜 목소리를 내질렀다.
“아가씨, 여기까지 오시면서, 다리 절지 않으셨어요!”
로리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느꼈다. 또한 들었다.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따뜻한 온기를.
[슬퍼하지 말아요.]
핀이 속삭이는, 위로의 목소리를.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제발…… 흐흑…….”
바람이 불었고, 연못에 일어버린 파문에, 핀의 얼굴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
조카를 혼내주고 온 히엘은 잠든 아들들의 얼굴을 확인한 뒤, 아내와 딸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갔다. 리엘은 아기 침대에서 사지를 쭉 펼쳐 자고 있었는데 젖을 먹는 꿈이라도 꾸는지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히엘은 그 모습이 몹시도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몇 번이나 입을 맞춰주다가 머리를 풀며 잘 준비를 했다.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하리가 말했다.
“세드릭이 왜 불렀던 거예요?”
“응, 제 아비랑 똑같은 짓을 하지 뭐야.”
“네? 그게 무슨 말?”
히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가 아내의 옆으로 가서 앉을 때였다. 난데없이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리가 창문을 닫으려 하자, 히엘이 말렸다.
“잠깐.”
“네?”
마활의 임무를 지고 있지 않아 마력이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히엘은, 심층가늠을 하지 않아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찾아온 누군가의 에테세르를.
“왜 그래요?”
히엘은 하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대에 누웠다.
“창문 닫지 마. 곧 더워질 거니깐.”
“그래도 리엘 감기 걸리면…….”
“글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자다가 더워서 울지도 몰라. 창문 닫지 마.”
“음. 그럴게요.”
하리는 침대에 누웠다. 부부는 아이를 넷이나 낳고 몇 번의 권태기를 겪었지만 여전히 손을 맞잡고 다정히 잠을 청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리의 눈이 스르륵 감기려는 찰나, 히엘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당신 좋은 꿈 꿀 거야.”
“무슨 말이에요?”
그 녀석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왔대.
살아있는 동안, 하리 덕분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히엘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질투가 나서 잠이 안 오는군. 나중에 만나면 때려줘야겠어.”
외전
핀라이트, 그는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꿈을 찾아갔고, 때론 바람이 되어 세리스의 어느 행복한 가족을 찾기도 했다. 어떤 이들에겐 여전히 이름조차도 입에 담기 싫은 ‘핏빛 강철 검’으로 기억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여전히 그립고 서글픈 존재-아버지, 동생, 사랑하던 사람-로 기억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영혼은 드래곤의 휴식지에 와있었다. 이곳은 기이하게도 여성, 남성용의 드레스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모두 황궁에서 보내오는 공물들이었고, 한 번 입고 버려진 것이었다. 핀은 드래곤의 괴상한 취미를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기에 그 드레스 더미를 마주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드래곤은 핀에게 그 드레스 중에 괜찮은 것을 골라보라고 강요를 하고 있었다.
[잘 보면 남자 옷도 있단 말이다. 어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아라.]
핀은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보다 드래곤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몇 번이나 묻는 질문이라 지루하실 수도 있겠으나, 또 한 번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옷을 하나 골라보면 대답해주겠노라.]
핀의 영혼은 드레스 하나를 허공에 띄웠다. 몹시도 무성의한 태도였다. 그가 허공에 띄운 드레스는 유행이 지난 촌스러운 연분홍색 드레스였다. 드래곤은 핀이 고른 드레스를 보고 실망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젠 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어야할 때였다.
[제 영혼은 왜 가이덴으로 날아가 안식을 취할 수 없는 겁니까? 저는…… 안식을 취할 자격도 없는 겁니까?]
전쟁을 하며 학살을 해온 적이 있었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리라. 드래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 문제 때문이 아닐세.]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무엇이 문제라 제 영혼이 가이덴으로 갈 수 없는지요?]
[내 문제 때문에 자네는 가이덴으로 가지 못하는 거지.]
[당신 문제라면……?]
드래곤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빚을 진 것 같아서 말이지.]
***
경사가 있는 날이었다. 황제 티에리아 델 사르제스와 신부 아이린 시빌슨의 결혼식은 역대 사르제스 황제들의 결혼식 중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늠름하고 잘 생긴 티에리아와 날씬하고 아름다운 아이린을 부러워하는 젊은 남녀들이 수두룩한 와중에, 몇몇 여자들이 아이린을 험담하는 말들을 흘렸다.
“원래 엄청난 뚱보였다네. 고기 튀김에서 튀김 껍질만 먹는 그런 끔찍한 식성을 가진 여자였다나 봐.”
“정말?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인형처럼 날씬할 수 있는 거지? 혹시 마활들한테 부탁해서 살 뺀 거 아니야? 그 왜 있잖아, 지방 흡입 같은 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래.”
“그게 아니면?”
진실을 알고 있는 황궁 시녀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수다 떠는 이들에게 귓속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신부 아이린이 어떤 식으로 살을 뺐기에 하나 같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아까부터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로리는 궁금했다. 그녀는 시녀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뭐지?”
젤레테스 대공의 딸인 로리에게 시녀들은 예를 갖춰 인사를 하다가 시침을 뗐다.
“레이디, 무슨 질문이신지?”
“모른 척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봐.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단시간에 살을 뺄 수 있었느냐고 묻는 거야.”
로리는 다리가 다 나은 후 식욕이 돌아서 최근 조금 살이 쪄있는 상태였다. 로리가 묻자,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럴수록 더 궁금해진 로리는 눈매를 매섭게 만든 뒤 살짝 언성을 높였다.
“빨리 말 안 하면 일 초에 한 대야!”
그러자 시녀 하나가 로리의 귓가에 고개를 가져갔다.
“가르쳐드리긴 황망하오나…….”
귓속말을 들은 로리의 얼굴 역시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황제 폐하께서 그런 식으로 황후 폐하의 살을, 망측하기도 하지!”
로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부채질을 하며 뒤돌아섰다. 황제는 이제 완전히 어른이 다 되어버렸다. 로리가 알고 있던 귀여운 남학생 세드릭이 아니었다.
‘세드릭 아니, 티에리아…… 그 녀석은 왜 이리 성격이 급한 거야! 결혼식을 하기도 전에, 어머, 어머 못 말려!’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 한 무리의 가족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 세 명, 여자 아이 두 명, 웃음이 온화한 여인 한 명. 그들은 바로 하리와 그녀의 아이들이었다. 여자 아이 중 한 명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폐…… 아니, 세리스 백작 부인.”
로리는 하리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고, 그러자마자 하리의 쌍둥이들에게 치마가 들춰지고 말았다. 장난꾸러기 쌍둥이들은 로리의 당황하는 반응이 재미나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자마자 장남 시드로부터 도망을 다녀야했다. 시드가 무서운 기세로 동생들을 혼냈기 때문이다. 하리는 쌍둥이들을 조용한 곳에 혼내러 가야겠다고 말하며 두 여자아이를 양쪽에 안았다. 로리가 다급히 물었다.
“그분(히엘)께선 오늘 같은 날 왜 안 오신 건지요?”
“아, 마법상점 들어오는 물건 시험을 해보다가 그만 머리카락을 홀라당 태워버렸지 뭐예요? 가발을 쓰라고 해도 멋쟁이 체면이 구겨진다고 오기 싫어하더군요…….”
로리는 히에라지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조카의 결혼식에 오지 않는다니. 그러나 그게 히에라지엘 다운 행동이기도 하리라.
“그럼 즐겁게 보내시길.”
하리는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사라졌다. 로리는 그들을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았다.
씁쓸하게 웃으며 젤레테스 연회장의 한쪽 구석으로 사라지는 로리를 보고 티에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린이 물었다.
“무슨 생각하십니까, 폐하?”
“아니, 아무 것도.”
티에리아는 신부를 앞에서 ‘한때 짝사랑했던 여인이 저 여인’이라는 실언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신부가 로가드리아보다 백배는 예뻤다.
오늘 신부 아이린은 만개한 장미보다 아름다웠다. 드래곤이 소녀로 변신했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꽃물이 번진 듯 붉은 입술, 달콤한 향이 배어나올 것 같은 뺨, 사랑스러운 검은 눈동자, 그리고 날씬한 배. 비록 날씬하긴 하나 저 뱃속엔 사르제스의 다음 제위를 물려받을 황손이 자라고 있었다. 티에리아는 그 황손을 만들기까지의 일을 떠올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처음부터 황손을 만들려고 ‘애를 쓴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살을 빼주려 하다 보니 ‘자연스레’ 황손이 생기게 되었다.
“아이린.”
“예?”
“대충 자리에서 빠져나와 살 빼러 갈까? 이 녀석을 만들던 그때처럼 말이지…….”
아이린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간 어떤 방식으로 살을 뺐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온 몸이 야릇하게 달아올라서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정말이지 너무 짓궂으십니다!”
“하하하!”
티에리아는 장난꾸러기처럼 짓궂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