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회 -->
“젠장, 헛걸음했군.”
라브는 핀의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려다가 그냥 걸음을 되돌렸다. 그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 짜증이 치솟았다. 어쩌면 그릴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자신의 기분이 마뜩 잖았다.
‘원수라고, 녀석은 내 나라를, 내 부모를 망쳐버린 원수라고!’
잊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아른거리는 얼굴, 라이트릭 에센 아니, 핀라이트의 얼굴.
‘하지만…… 원수만 아니었다면 정말 녀석을…… 아냐, 그런 생각은 관두는 게 좋아. 어차피 드래곤이 더 좋다며 쫄래쫄래 따라가 버린 사람이 누군데!’
상념에 젖어 아이얄 대로에 멈춰 섰다. 갑자기 엽궐련 생각이 간절해졌다. 다리 난간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연기를 뿜어냈다. 어두운 밤 새하얗게 피어나는 연기를 보니 그 남자에 대한 상념도 지워져가는 듯했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 둔치 쪽을 내려다보았다.
두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소동은 결코 실랑이가 아니었다. 한 남자만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밤눈이 좋지 않은 라브는 눈을 찌푸리며 그들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곧 시비를 거는 쪽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까 마주쳤던 리샤프였다. 핀라이트를 증오하고 그와 닮은 사람들에게까지 스스럼없이 시비를 걸어대는 리샤프가 분명했다.
라브는 난간에 엽궐련을 비벼 끄며 외쳤다.
“어이, 리샤프! 숙소로 안 돌아가고 뭐하는 거야?”
그러자 리샤프가 고개를 들어 라브를 보았다. 달빛 아래서 피곤과 스트레스에 찌든 리샤프의 얼굴은 왠지 모를 광기에 젖어 있었다. 리샤프가 라브를 향해 외쳤다.
“나리! 제가 그 놈을 잡았답니다! 제가 드디어 그 빌어먹을 제국의 핏빛 강철검인지 뭔지를 잡았다고요!”
라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취중에 아무나 잡고 시비를 거는군. 그쯤 해 둬.”
라브가 경고를 했지만 리샤프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젠장, 그만하라니깐.”
라브는 싸움을 말리는 취미는 없었지만, 애꿎은 사람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며 리샤프에게 붙들린 자에게 외쳤다.
“거기,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 자는 한 번 미치면 위험하니까 상대해주지마.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을…….”
라브는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리샤프가 주머니에서 꼼지락 거리던 손을 들어, 상대의 가슴에 댔다. 푸욱-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꿰뚫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나왔고, 라브의 눈이 커졌다. “무슨 짓이야!”
“허…… 하…….”
리샤프는 킥킥 거리며 어둠 저 편으로 뛰어 가버렸고, 라브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신음하고 있었다.
“이봐! 이봐! 당신, 에…….”
……센.
라브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센, 그 익숙한 이름을 뱉은 자신의 목소리마저도 믿을 수 없었다. 흐린 달빛아래 리샤프에게 칼을 맞게 된 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남자의 이름으로 살던, 전대 황제 핀라이트의 얼굴이.
라브는 곧바로 필기르의 깃털을 꺼냈다. 드래곤이 언제든지 연락 할 때 쓰라고 준 물건이었다.
“도와줘요! 그가 칼에 맞았어요! 그 남자, 핀라이트가요!”
하지만 드래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라브는 당황했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몰아쳤다. 드래곤은 이대로 핀라이트를 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곳에 도움의 손길을 건네올 때까지 라브는 지혈이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마력이 없는 라브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당황하며 핀의 어깨를 흔드는 것뿐이었다.
“에센! 이봐, 에센! 정신 차려!”
다급한 라브는 저도 모르게 질문을 해댔다.
“대답해! 네가, 당신이, 당신이 핀라이트 맞느냔 말이야!”
“헉, 하아…….”
핀은 다량의 출혈을 일으킨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를 스쳤던 것이 흉기였나? 그렇게 갑작스러운 손짓이라니……. 그저 숨이 넘어가는 것을 괴로워하며 몸을 바르르 떨뿐이었다.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빌어먹을 리샤프 자식!”
라브는 핀의 몸을 부여잡고 악다구니를 썼다.
“안 된다고, 젠장, 으아아아!”
왜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걸까. 이 남자, 여지없이 핀라이트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정신 차리라고! 이게 뭐야? 왜 이러고 있어! 이대로 죽어선 안 돼! 넌, 넌 그렇게 많은 죄를 져놓고 이대로 죽어선 안 된다고…… 이봐!”
어떻게 리샤프 따위에게, 네가…….
죽을 땐 죽더라도, 이건 내가 용서 못해!
라브는 짜증을 내며 핀을 흔들다가 그의 가슴에서 쉴 새 없이 피가 쏟아져 나오자 지혈을 하듯 꽉 안았다. 그러자 핀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라브의 등을 꽉 쥐었다.
그리고 죽음을 거부했다.
“시, 싫…… 어.”
핀은 죽음 뿐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모든 기억들을 거부했다. 흐려지는 그의 의식 속에 평생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폭풍처럼 휘몰아쳐오기 시작했다. 주마등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마지막 정리를 하듯 닥쳐오는 과거들의 충돌. 그리고 서글픔.
한순간 원치 않는 눈물이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피 냄새로 얼룩져있던 인생, 결국에는 주변인들만 마지막 기억에 자리 잡았다. 행복해지면 만나려 했던 어머니, 그리고 지시받은 대로 대륙 통일을 이루어놓아 떳떳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아버지. 아니, 지금은 만날 때가 아니다. 떳떳하게 만나기에는 저질러 놓은 죄들이 너무 많고, 아직 참회를 다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핀은, 어느새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형, 티에리아를 잘 부탁해.
아까…… 로리에게 키스 할 걸 그랬나봐. 이게 고집을 부려 받는 벌인가 싶어.
미안해.
행복하길.
그런데 이런 생각, 지금 하고 싶지 않아.
떠나기 싫은데.
아직 사랑한단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은데.
차가워져가는 그의 몸에서 뜨거운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하나하나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이들의 얼굴 중,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마지막 얼굴은 그녀, 하리의 얼굴이었다.
그때 황궁 쪽에서 황자의 탄생을 알리는 거대 폭죽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와도 같던 초록색 불빛,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과 같은 붉은색 불빛을 보며, 핀은 웃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그녀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축…… 하해……하…….”
“안 돼! 안 돼애애!”
커다란 폭죽 소리에 묻혀 라브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잠이 든 핀마저도.
***
제국 최서단에 위치한 시골 마을 세리스. 뜨거운 아지랑이 때문에 알록달록 예쁜 색을 뽐내던 꽃들이 기운을 잃고 픽픽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아직 향기만은 죽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달콤하고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이사하기 참 좋은 날씨였다.
‘이곳에서 하리에게 청혼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히엘은 창밖 풍경을 보며 회상에 젖어 있었다. 그는 삼십 대가 되어도 이십 대 때와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여자처럼 고운 얼굴, 느긋한 표정, 헐렁한 옷, 긴 갈색 머리카락을 비녀 하나로 대충 휘감은 그의 모습에서, 전대 황제의 근엄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제위 시절에도 그에게 근엄함이란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성향이 지금 그를 이곳에 있기 했는지도 몰랐다.
첫 아들의 탄생 후, 제위에서 물러나 작은 영지의 영주로 살았다. 그렇게 육년이 지났고, 지루한 삶에 질려 마법 재료 상점을 열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와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은근 짐이 많단 말이지. 아얏!”
그는 등에 업힌 아기가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쥐어뜯자 얼러주었다. 아기의 이름은 리엘로, 이제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난 귀여운 딸이다. 세리스의 더운 공기가 익숙지 않은 리엘이 울기 시작했다.
“마, 음마, 흐에에엥.”
히엘은 평소 금쪽같은 딸의 울음소리를 단 1초도 가슴이 아파 듣지 했다. 그는 다급히 하리를 불렀다.
“우리 공주 배고프대! 얼른 내려와!”
2층에서 바느질 작품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던 하리가 대답을 했다.
“곧 가요!”
지난 6년간 하리는 장남, 그리고 두 번째 쌍둥이 아들에 이어, 딸을 얻느라고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는 모습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부지런히 그녀의 짐 정리를 도와주던 장남 시드가 하리에게서 바느질 작품을 빼앗아 들고 말했다.
“이리주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어머, 시드.”
“리엘 더 울기 전에 얼른 내려가세요.”
시드는 어린 아이치고는 너무나 의젓한 모습이었다. 시드는 싸움을 하는 쌍둥이 동생들을 혼냈다.
“나이가 어리다고 막 행동해도 되는 거야? 다들 짐정리에 열심인데, 너희들은 언제까지 계속 그렇게 싸우고 놀 거야? 자꾸 그래봐. 오늘 저녁은 없을 테니까. 모두 굶겨버릴 거라고.”
“우아아앙! 굶기 시져!”
“시드 형아, 무서워…… 우에엥.”
한참 어리광을 부려야 할 나이여야 했다. 시드의 성격은 하리를 닮은 것도, 히엘을 닮은 것도 아니었다.
‘대체 저 애는 누굴 닮아 저런 무서운 말을 하는 거지? 제 동생들을 굶겨야겠단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하리는 장남의 싸늘한 표정에 질겁하며 아래층을 향했다. 그때 갑자기 시드가 뭔가를 물었다.
“어머니, 이 못생긴 작품은 대체 뭐죠?”
하리는 고개를 돌려 시드가 가리킨 어느 바느질 작품을 보았다. 색상 배열이 제멋대로인 작품이었다.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은…….
“어머니 작품은 아닌 거 같은데요?”
“응.”
“외할머니 작품도 아닌 것 같은데요.”
“돌아가신 네 숙부님 작품이야.”
핀을 말하는 것이었다.
“색깔은 별론데, 바느질을 잘하…… 잠깐, 뭐라고요? 숙모님이 아닌 숙부님이요?”
시드는 이러한 바느질 작품을 여인이 아닌 남자가 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다. 어린 소년은 단 한 번도 제 숙부를 본 적이 없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물론, 소년은 제 아버지가 황제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
하리는 히엘의 등에 업혀 있던 리엘을 안아들었다.
“흐앵, 으애애앵…….”
“응, 뚝. 엄마 왔어. 울지 마, 우리 귀여운 공주.”
그녀는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 지난 때, 리엘은 젖을 잘 물지도 않았다. 애당초 아이가 우는 것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더운 날씨 때문이었다.
“이 땀 좀 봐, 어딘가 바람을 쐬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히엘.”
“아하, 그랬군.”
히엘은 리엘을 안아들고 산책을 시작했다.
“산들 바람을 좀 쐬어볼까요? 우쭈쭈…….”
사내아이를 셋이나 키워놓고는 아이가 왜 우는지 아직도 잘 모르다니, 하리는 그런 남편을 못 말린다는 듯 보았다.
히엘은 넓은 들판을 보며 리엘을 걸음마 시켜보았다. 리엘은 아직 도움이 있어야만 걸을 수가 있었다. 리엘은 몇 걸음 걷다가 멈추고 말았다. 더위를 먹고 쓰러진 꽃을 밟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곧 있으면 이 꽃밭이 초록 들판으로 변하겠군. 그때는 좀 잘 뛰어 다녀야 할 텐데, 우리 공주님.”
“후엥, 후에엥.”
리엘은 걷는 것을 포기하고 안아달라고 칭얼거렸다. 충분히 걸을 시기가 되었는데도 안겨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모두 히엘 탓이었다. 그는 세 아들을 본 후에 ‘드디어’ 딸을 낳을 수 있었고, 그 딸을 금이야 옥이야 귀여워하며 품에서 놓아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래, 그래. 천천히 걸어. 꽃 이름이나 알아보자고, 우리 공주님. 이 꽃은…….”
그가 리엘에게 세리스의 여러 신비로운 꽃들을 구경시켜주고 있을 때였다. 위급할 때를 대비하여 이용하던 필기르의 깃털이 웅웅- 거리기 시작했다. 몇 개월 만에 울리는 통신이었다. 히엘은 황궁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마법어를 날렸다.
[티에리아, 무슨 일이니?]
[백부님. 제가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