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회 -->
“어어어, 히엘? 바, 방금 뭐죠?”
“하리도 느꼈어? 이 녀석, 나오려고 몸을 풀고 있나봐!”
황의들은 ‘아이들은 나오기 직전엔 잘 움직이지 않는다’했다. 히엘은 믿지도 않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 태양이시여! 드래곤이시여! 신이시여! 온갖 별들이시여! 드디어 때가 왔군요! 공주인지, 왕자인지, 뚜껑을 열 시간이 되었다!”
그는 경망스러울 지경으로 기뻐하며 해산 준비를 했다. 최소한의 인원수로 구성된 황의와 시녀들이 도착했다. 각 종교의 사제들이 축복 기도를 위해 온다고 했지만 히엘은 모두 물렸다. 그리고 나가계시라는 시녀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아내의 곁을 지켰다.
“자, 하리. 날 따라해 봐. 습습, 후후, 아, 얼른?”
“…….”
비록 황의 두 명과 시녀 다섯 명밖에 없는 공간이었지만, 하리는 난감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 해산 시 진통은 한 번 느끼기 시작해서 꾸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아팠다가 몇 분 괜찮고, 또 잠시 아팠다가 괜찮고, 그런 식으로 간격이 짧아지면서 자궁이 열리는 법이었다. 그러나 히엘은 마치 제 아내가 꾸준히 아플 거라 생각하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고통을 줄이는 호흡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습습, 후후! 습습, 후후! 얼른 따라하라니까? 이러면 덜 아파!”
“저…… 폐하.”
“왜? 추워? 공기라도 조금 따뜻하게 해줄…….”
하리는 히엘의 팔을 잡았다.
“제발.”
“응?”
하리는 히엘의 귓가에다 대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기서 좀 나가계시라고요.”
히엘은 태어나서 이렇게 섭섭한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이야? 내 공주가 태어나는 걸 내가 보겠다는데 왜 나가있으래?”
“공주는 무슨 공…… 아무튼, 당신이 너무 그렇게 수선을 피우시니 애가 나오려다가도 안 나올 것 같아요.”
“하리가 아이한테 물어보기라도 했어? 하리는 그저 힘만 씀풍 주면…….”
“으윽!”
또 한 번 찾아오는 진통에 하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히엘은 하던 말을 멈추고 또 습습, 후후,를 해보라고 보챘다. 시녀들과 황의들은 그들을 보고 진땀을 흘려야했다. 보다 못한 늙은 황의 하나가 눈치를 주었다.
“저, 폐하. 탯줄 자를 때는 불러 드릴 테니 지금은…….”
하지만 이내 황제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 어떤가. 제 자식 태어나는 것을 제가 보겠다는데. 결국 아무도 히엘을 말리지 못했고, 하리가 갑자기 극심해지는 고통에 무서워져 나가있으라 말하던 때와는 반대로 히엘의 손목을 세게 잡기 시작했다.
“가, 가지마!”
“응응, 여기 있을 거야.”
초산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했던가. 그러나 하리의 진통은 그 간격이 줄어드는 속도가 빨라지기만 했다. 아이가 성격이 급한 제 아버지를 닮기라도 했는지 세상 밖으로 나오려 안간힘을 썼고, 그럴수록 하리는 세상이 샛노랗게 보였다. 소리 지를 힘 같은 건 없었다. 그런 힘이 있다면 아이가 나오는 데에 더 쓰고 싶었다. 갖은 힘을 다 하지 않으면 고통이 길어질 뿐이라는 황의의 염려스러운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고통이 길어질수록 아이의 고통 또한 길어질 것이다. 하리는 매번 힘을 줄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생각했다.
“으으윽!”
그렇게 하리가 고통을 겪는 시간은 무려 다섯 시간이나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본래의 성격(S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히엘의 머리를 쥐어뜯기 직전이었다.
“헉, 시잇 으브…….”
‘응? 방금 하리가 주인님 플레이 중에 뱉던 욕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이런 와중에도 히엘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웃는 얼굴로 진땀을 흘려야 했다.
과연 아이를 낳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리는 점점 얼굴이 새빨개지고 여기저기서 실핏줄이 터졌다. 그녀는 자신의 골반이 가고일의 공격으로 쩍 갈라지는 거대암반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니 히엘도 더 이상 ‘습습, 후후’를 따라해 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하리의 손을 잡고 다짐을 하듯 굳게 말했다.
“많이 아파? 진짜 못 보겠군! 다시는, 아이 낳지 말…….”
“으악!”
비명이 터지다가 갑자기 어떤 소리가 났다. 태어난 아이가 뱉어내는 숨소리였다. 숨소리는 이내 우렁찬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황의가 아이를 빼내어 곧바로 따뜻한 물에 담갔다.
“맙소사, 맙소사, 이런 맙소사……!”
히엘은 그 경이로운 순간이 매우 천천히 지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양수에 젖은 아이의 갈색 머리카락, 제 어미를 힘들게 했던 살 오른 몸. 단지 평범한 신생아의 모습임에도, 히엘의 가슴은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곧 그의 갈색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지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폐하, 감축 드립니다! 건강한 황자님이십니다!”
황……자? 공주가 아니라 황자? 정녕?
히엘은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하리에게 키스를 날리며 말했다.
“수고했어, 사랑해! 하나 더 가자.”
“다, 닥쳐…… 닥치라고…….”
하리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
핀은 마지막 남은 서너 모금의 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남은 술을 마셔도 취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입에 모두 털어 넣었다.
“이래야…… 청소가 쉽지.”
중얼거리며 비틀거리며 잔을 치웠다.
원망이 몰아쳤다. 세드릭에게 황위를 제안한 히엘이 미웠고, 그것을 받아들인 세드릭 역시 미웠다. 허망한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힘드니까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하고자 했던 것, 연애, 자식문제, 그 어느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자신이 무얼 노력하지 않았던가? 핀은 지치고 말았다.
[치지직……지직…….]
마법영상구의 채널을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돌려보는 그의 눈빛이 허무에 가득 찼다.
어느 순간 그는 배우들의 표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극은 빤한 내용의 비극이었다. 궁에서 살았을 때에도 이러한 극들을 보긴 했다. 단지 자신이 몰입하지 못하면서 구경에만 그칠 뿐이었다면, 지금은 ‘감상’이 가능한 상태였다.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면서 온갖 감정에 노출되었던 것 때문일까?
그게 정답인 듯했다.
한 남자가 어느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 무덤에 적힌 이름은 여자의 이름이었고, 남자의 대사로 추측건대 남자는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듯하다. 곧 화면은 바뀌어 수년이 지난 시간, 새로운 사랑을 찾은 그는 결혼을 한다. 자식을 낳고 행복해지려하는 순간, 전쟁터로 끌려 나간다. 전쟁터에서 갖은 고생을 한다. 그 후에 고향에 돌아오지만, 아내와 자식은 사망하고 없었다. 그는 다친 몸으로 팍팍하게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삶을 비관하여 자살을 택한다. 그와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제물로 삼기라도 하듯, 긴 전쟁을 끝내고 한동안 평화롭다. 화면은 바뀌어 어느 술집, 한 남자가 중얼거린다.
‘짧으면 몇 년, 길면 수십 년, 또 한 번 핀라이트 같은 사람은 나타날 거야.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 않던가. 우리는 이 평화를 그냥 즐겨서는 안 되네. 소중히 여기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인해두어야 할 걸세.’
핀은 심장을 뭔가로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상을 제작한 사람은 라벤더, 즉 라브였다.
“하하, 하하하…….”
핀은 열없이 웃었다. 극중의 주인공이, 사실은 자신이 망쳐놓은 수많은 전쟁 희생자들의 표상이라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삶이 있다. 그 삶을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다른 복잡한 이유 때문에 좌절하고 만다. 극의 주인공도 그러했다. 핀은 극중 주인공과는 달리 강제징집이 될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가족을 잃을 염려도 이제 없었다. 원하던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자기 결정에 따라 잘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하는 한탄이라? 핀은 새삼 자신이 내뱉는 한숨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고집을 피운 것일까? 로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로리는 가달라고 말하면서도 원망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잡아달라고 하는 신호였을까? 핀은 그녀가 야속했다. 평생 곁에서 있어준다는 말로는 자기 마음이 다 전해지지 않았던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후우.”
…… 부족할 것이다. 그녀는 처음 하는 사랑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핀은 그것을 다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더…… 노력해야 하는 거겠지?’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안 취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모양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
그 시간, 라브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드래곤에게 대륙을 다스려보라는 말을 했다가 볼을 꼬집히는 가벼운 무시를 당한 것에 실소를 흘려대는 중이었다. 드래곤의 하나뿐인 연인이라 그런 말이 먹힐 줄 알았지만, 큰 오산이었다.
‘영상 작업이나 부지런히 해야겠군.’
그런데 우연찮게도, 전에는 알지 못한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그것이 라브가 지금 어딘가로 향하는 이유였다.
‘내 연인이 됐다고 대륙 섭정을 하려 들다니, 간이 커도 너무 크지 않나.’
‘농담이었어요.’
‘하여간 너는 귀엽구나. 하긴, 이 대륙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완전한 지배를 하진 못했지. 사르제스의 황제들도 지금의 히에라지엘을 제외하곤 모두 1대 황제의 뜻에 움직인 꼭두각시들이니까 말이야.’
‘대륙 통일 말씀인가요?’
‘그래. 딱 핀라이트까지가 마지막이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 때 부터였나? 그대가 내게 거짓 웃음을 흘리는 게.’
뼈 있는 말을 남긴 드래곤은 씩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었다.
라브는 그 짧은 순간, 드래곤의 말을 이해하느라 한참을 제 자리에 멈춰있었다. 평범한 학생, 레이디 로리의 화보 속 남자, 레이디 로리의 일개 디자이너인 줄 알았던 라이트릭 에센. 그리고 그런 라이트릭 에센의 모습으로 변신하길 좋아했던 드래곤이 하는 말…… 이라.
‘그래. 딱 핀라이트까지가 마지막이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 때 부터였나? 그대가 내게 거짓 웃음을 흘리는 게.’
라브는 드래곤이 일개 인간연인의 웃음 따위를 신경 쓰고 있을 거란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었다.
‘아아, 들켜버렸나, 이 속 마음을.’
그러나 라브는 드래곤의 눈치 말고 다른 것에 섬뜩함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설마 닮았다 했던 라이트릭 에센이 ‘핀라이트’였다는 사실. 라브는 전율했다. 자기 자신이 원수에게 반했다고 깨닫자, 한참동안 미친 듯 웃음이 나왔었다.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제로 만들었었던 마법영상구 속 정보들이 싹 날아가 버린 사건, 그리고 상영회도 무산되었던 것, 그 모든 조각이 끼워 맞춰졌다. 라이트릭 에센이 핀라이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불시에 찾아가보고 싶었다. 안부를 묻는 척 하면서 전과 같이 껄떡이며 그 남자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라브는 지금 그 남자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얄 대로를 한참 지나쳐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낯이 익다 했더니, 한 때 영상 작업에 도움을 줬던 어느 포로 출신 노동자였다. 그 노동자는 사르제스 제국에 대한 적대감, 핀라이트는 물론 핀라이트와 닮은 사람에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는 공격적인 성향의 술주정뱅이였다. 라브는 그를 향해 아는 체 했다.
“어이, 당신…… 그래, 이름이 리샤프라 했던가. 요즘은 별 사고 없이 잘 살고 있나?”
리샤프는 라브를 한참 보다 기억이 나는지 웃었다. 리샤프는 술에 취해있어서 발음이 아주 엉망이었다.
“사고안치고 잘 살고 있고말고요.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이런 야심한 시간에.”
“아는 사람 만나러.”
***
핀은 젤레테스 공저로 가는 동안 술에서 깨어났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로리의 방으로 갔다. 행여나 그녀가 잠을 깰 까봐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녀의 자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울다가 잤는지 로리의 눈은 벌겠다. 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그녀가 깰까 싶어 그 이마 위에서 손을 멈추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사랑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 해도 될까?
키스를 하고 사랑한다 말하며 다시는 이기적인 죄악감에 사로잡혀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노라고 사과하고 싶었다. 다시는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나 곤히 자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만족했다. 그는 잠들어있는 로리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녀에게 알린 뒤 그곳을 나갔다.
아직 사랑할 날은 많으니, 조급해 할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