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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은 테이블 한쪽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황후나 귀여운 동생이야 원래 바늘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이 공녀님께서 바늘 잡으실 줄은 알아? 듣자하니 디자인 실력도 ‘엄청’나다던데?”
히엘은 레실로부터 레이디 로리의 운영 사항을 모두 전해 듣고 있었고,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부러 로리를 놀려보는 행동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로리의 눈이 도끼처럼 가늘게 떠졌다. 핀은 그런 그녀의 심기가 더 안 좋아질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커플, 꽤 귀여운데?’
히엘은 킥킥거리며 테이블 위의 쿠키 하나를 물고서 말했다.
“아, 이렇게 바느질 데이트 따위 할 게 아니라 얼른 결혼해야지?”
“네.”
“무슨.”
연인은 둘 다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온 나머지, 그들 사이에서 한참의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네’는 로리의 대답이었고, ‘무슨’은 핀의 대답이었다. 하리가 당황하자, 히엘이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이봐, 핀. 홀아비 주제에 지금 무슨 행동이야? 이 아가씨 정도면 괜찮지, 안 그래?”
로리는 그 말 역시 비꼬는 것인 줄 알고 히엘을 찌릿 노려보았고, 히엘은 그 시선이 무섭다는 듯 몸을 흠칫 떠는 우스꽝스러운 시늉을 하며 갑자기 허공에 뭔가를 띄워냈다.
마법영상구였다.
히엘은 협박을 했다.
“핀. 숙녀를 무안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핀은 또 히엘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싶어 어금니를 꽉 물었다.
***
로리와 하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마법영상구를 보았다. 히엘이 허공에다 그것을 이리저리 옮기며 장난의 수위를 높였다.
그가 마법영상구에 준비해온 동영상은, ‘핀의 볼일참기’ 영상이었다.
핀은 히엘이 그렇게 유치한 장난을 칠거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발끈해버리면 여자친구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니까,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차를 마셨다. 그리고 히엘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폐하의 품위를 지키세요. 유치한 행동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동생에게 듣는 폐하라는 호칭이 재미있었던지 히엘은 마법영상구를 키며 히죽 웃었다.
“폐하는 무슨. 잘 봐, 이게 아마 너 재위 시기에 찍힌 걸 거야.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
“아, 그때 있잖아. 네가 레이디 로리에서 일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내가 이걸로 협박했던 거.”
핀은 지난 일을 떠올려보았다. 레이디 로리에서 일하라는 황명을 들었을 때, 싫다고 한 적이 분명 있었다. 그때 히엘은 ‘말을 듣지 않으면 너 오줌 싸는 동영상 온 제국에 퍼트릴 거야’하고 협박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 마법영상구에 들어있는 영상은……?
핀은 눈에 핏발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절대 로리에게 들켜선 안 된다. 로리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봐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이미 두 여자는 호기심이 더욱 가득해진 눈으로 마법영상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광대정신이 투철한 히엘은 드디어 그 영상의 초반 부분을 틀었고, 핀은 얼굴이 벌게져서 테이블을 쳤다.
쾅!
[풀라고.]
[정말 마려우십니까.]
“제발 그만!”
핀의 외침이 너무나 간절해서 히엘은 영상을 꺼주었다. 피식 웃는 로리를 보니 이 정도면 끝까지 안 보여주어도 동생에게 벌을 준 효과는 충분히 본 듯했다.
“아하하, 핀. 나 너무 즐거워 죽겠잖아!”
히엘은 지금 핀이 짓는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죽을 것 같았다. 애당초 핀을 로리 아래에 두어 일을 하게 명령했던 이유도 핀의 성격 개조 때문이었다. 무뚝뚝한 동생이 아닌, 작은 장난에도 얼굴을 붉힐 줄 아닌 그런 동생을 원했던 것이다.
허공에서 소멸된 마법영상구를 본 핀은 히엘을 노려보았다.
“대체 형이란 사람은……!”
“너무 예뻐 죽겠다고?”
“미친 거야!”
형제는 서로를 존중하는 예법 따위는 일절 무시한 채 싸움을 시작했다. 말이 싸움이지, 붉은 얼굴로 뾰로통해있는 핀을 히엘이 능글거리며 일방적으로 달래는 것이 전부였다.
로리는 황제 형제의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놀라워했으나, 하리는 자주 있는 일처럼 여기며 바느질을 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유치하게 굴 건데!”
“네가 더는 안 귀여울 때 까지?”
“나는 한 번도 귀여운 적이 없어!”
“오, 바로 지금 이런 모습 말이야!
“히엘!”
그때 로리가 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중단시켰다.
“황제 폐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아까 그 영상을 끝까지 보면 대체 무슨 장면이 나오는 것인지요?”
핀은 영상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아 그녀의 말을 깔끔히 잘랐다.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히엘은 대답할 차례를 빼앗긴 듯 아쉬운 표정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리가 입을 열었다.
“영상 속 핀라이트의 모습, 참 귀엽죠?”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하리를 보았다. 히엘이 물었다.
“무슨 말이야?”
“무서운 별명으로 불렸던 사람이지만 그때도 분명 그런 귀여운 구석은 있었는데 말이에요. 왜 몰랐었는지.”
핀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히엘은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귀엽다, 라? 그게 하리가 핀에게 할 말로 가당키나 한지? 하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 황제 폐하와 얼굴을 붉히며 티격태격 하는 모습도 자연스러워서 보기 좋아요. 이런 성격 변화가 다 연애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고마워요.”
하리가 로리를 보며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히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핀이 마시던 물을 빼앗아 마셨다.
연애덕분이라.
로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후폐하.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요즘 핀이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던 사람이, 다리를 회복해야 한다며 정성을 쏟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로리는 지금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이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리가 밝게 웃었다.
“앞으로도 두 사람, 예쁘게 만나길 바랍니다.”
로리와 핀이 대답 없이 머뭇거리기만 하자, 히엘이 귀를 파며 중얼거렸다.
“황후가 예쁘게 만나라 ‘명령’하시는데, 대답이 없어?”
그제야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
한 침대에 소녀가 누워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꽃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소녀는 드래곤의 변신체였다.
드래곤보다 먼저 잠에서 깨어난 라브는 샤워를 하고 나왔다. 물에 젖은 몸을 닦는 그의 시선은 오랫동안 드래곤에게 머물러있었다. 실망감에 젖은 한숨이 나왔다.
‘제 아무리 정형화된 존재가 아니라 해도 말이지. 이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고.’
그는 드래곤의 여성화가 당황스러웠다. 핀라이트의 모습을 줄곧 유지하던 드래곤이었기에 라브는 그것을 드래곤의 장점으로 여기며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여성체의 변신은 다 뭐란 말인가. 제 취향을 슬슬 드러내는 건가?
“이러면 사기라고요. 드래곤.”
농담조의 말을 들은 드래곤은 눈을 떴다. 그리고 입술을 쭉 내밀고 삐친 척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라브는 구토가 올라올 뻔했다. 분명 드래곤의 여성화 변신체 외모가 괜찮긴 하지만 그 속에 천 년 가까이 산 거대 생물체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역겨움이 들었다.
“감히 한낱 인간 주제에 드래곤의 취향 따위를 간섭하려고해? 안 되지.”
드래곤 역시 농담조로 되받아치자, 라브는 그의 취향을 포기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아, 그냥 저 생물이 나한테 금화를 잔뜩 주는 걸로 만족하자고.’
드래곤에게 실망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라이트릭 에센, 그 남자였다.
***
로리와 핀은 궁에서 나와 핀의 집으로 갔다. 핀은 로리에게 저녁 식사를 만들어주었다. 요리들은 훌륭하지 못한 솜씨라 할 수 있었지만 종류만은 풍성했다. 로리는 식사를 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히엘의 말이 뇌까려졌다.
‘아, 이렇게 바느질 데이트 따위 할 게 아니라 얼른 결혼해야지?’
결혼. 결혼까지 거창한 것은 아직 쑥스럽다. 하지만 황후의 부른 배는 부러웠다. 핀과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런, 결국 그게 결혼이네.’
하지만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와야만 가능한 일인 듯하다. 앞으로 핀과 자신은 어떤 사이로 변해갈까?
문득 돌아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었던 핀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의 온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핀은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남자가 설마 자신을 거절할까? 아닐 것이다. 생각을 마친 로리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기 핀, 우리…….”
“입맛이 없습니까?”
핀은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지 않고 딴생각을 하는 연인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뭐 다른 거라도 다시 만들어 줘요?”
“우리, 아니 나, 나 말이야.”
“네?”
“핀, 네 아이를 가지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탓일까. 핀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로리는 핀의 표정을 살피며 그의 대답을 추측했다. 그는 거절을 할 것 같다. 알 수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굳게 다물며 다른 곳을 향해 눈동자를 돌리는 핀의 표정을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로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어버렸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미쳤나봐. 먹자.”
로리는 포크를 들었고, 핀은 그녀를 애처로운 듯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모멸감이 느껴진 로리는 일부러 화를 내듯 말했다.
“그래, 내 주제에 꿈이 컸어! 미안하군요! 아직 어려서,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라 생각하세요. 그냥, 단지 당신과…….”
손이 떨리고 있는 탓에 물 잔이 쓰러져 그녀의 구두를 적셨다.
“로가드리아.”
로리의 말을 막은 핀은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구두를 벗기고 발부터 닦아주었다. 로리는 발이 화끈거렸다. 이렇게 그에게 발을 닦이는 것이 대체 얼마만일까.
그런데 갑자기 핀의 손짓이 멈췄다.
“꿈이 크다니요, 결코 그런 건 아닙니다.”
“뭐?”
“나와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당신의 꿈은 타당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러지 못할 뿐입니다. 저는 그런 꿈을 꿀 인간이 못 될 뿐이죠.”
“무슨 말이야?”
핀은 로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그늘져 있었다.
***
로리의 방은 추레해진 주인과 달리 여전히 화려함을 지키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태피스트리, 도자기 인형, 화병, 그림 등으로 가득 채워진 방은 너무 화려해서 도리어 쓸쓸해보였다. 하녀는 침향을 준비하고 초에 불을 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잘 준비를 마친 로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밝을 때는 몰랐는데 어두워지고 나니 방 한 구석에 있는 꽃에 눈이 갔다. 핀이 선물했던 그 꽃은 시들어있었다. 아무래도 하녀가 물주기를 깜빡한 모양이다. 시든 꽃을 보자 로리의 마음은 더욱 더 어두워졌다.
핀의 집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자꾸만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평생 이렇게 발을 닦아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죄송합니다.’
그것은 분명 청혼에 대한 거절이리라.
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으니까 충분히 그의 선택을 존중해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빈말이나마 그러겠다고 해줄 수 있었잖아.’
교제하지 않을 때에도 늘 거절을 당해왔다. 연인이 되어서도 거절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 지친다. 그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쳐가는 것이었다. 낫지 않는 다리, 그런데도 정성스러운 간호를 멈추지 않는 그 남자, 희망을 기대하는 가족들, 모든 것이 마음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그 여자처럼 살 수 없는 거지?’
황후 부부의 밝고 행복한 모습이 떠올랐다. 점점 궁에 가서 그들을 만난 것이 역효과가 되어버렸다는 생각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