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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는 스스로를 드래곤이라 주장하는 손님을 만난 이후로 모든 귀찮고 성가신 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약값을 달라, 병원비를 달라 귀찮게 굴던 양부를 요양 치료원으로 보낼 수 있었고, 원하는 영상을 찍기 위한 준비도 할 수 있었다. 한때는 학교에 다니며 많은 귀족, 유복한 상인 집안의 인물들과 면을 트고 몸을 이용해서 인맥을 넓히려 했었지만, 그런 추잡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화대를 드래곤으로부터 받고 있는 덕분에 거침없이 자퇴도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하나, 단 하나 포기해야 하는 점이 있었다.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남자를 좋아하는 일이었다.
드래곤은 라브에게 말했었다. 인간암컷(디아세라)에게 상처받은 뒤로 인간을 좋아하지 않기로 했지만, 너 같이 가여운 녀석이면 언제까지고 돌봐주고 싶다고.
그렇게까지 말한 드래곤을, 라브는 절대 배신할 수 없었다.
라브는 현실과 타협했다. 진짜 라이트릭 에센과 교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라이트릭 에센의 모습을 한 드래곤과 사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대륙 최강 생물체의 창기라면 꽤 괜찮은 일 아닌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핀을 잊기로 했다.
***
꽃피는 계절이 왔다. 세드릭은 요리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마지막으로 키스를 나누었던 소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만큼 궁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오해는 ‘아들을 믿는다’는 아버지의 한 마디로 풀린 듯 안 풀린 듯 풀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드릭은 퇴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궁에서 지내면서 여행을 마음껏 했다. 소년이 ‘대륙 어느 곳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면, 히엘이 무조건 병사와 시종을 붙여주어 그 여행을 도왔다. ‘어떤 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을 데려와 교육시켜주었다.
어느 날은 핀이 히엘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어째서 저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거지?”
“그냥 내가 어렸을 때 해보지 못한 걸 하게 해주는 거, 뭐 그런 거지. 별 다를 게 있겠어?”
생글거리는 히엘의 대답이 못 미덥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핀은 뭘까 찝찝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티에리아, 어째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거니? 요리학교를 그토록 가고 싶어 했으면서 입학시기도 놓쳐버리고 대체 넌 어쩌려고…….”
혹시나 아들이 아직도 삐쳐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버지, 세상에는 요리 말고도 재미있는 것과 즐길 것이 많아요.”
세드릭의 얼굴에는 아버지에 대한 유감 같은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핀은 그래서 더욱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섭섭한 얼굴 하지 마세요.”
세드릭이 손을 잡아주자 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로리는 최근 시름이 깊어졌다. 그날 연인이 그토록 흥분을 해놓고도 자신의 몸을 더 탐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환자인 상태, 다리가 낫지 않을 것 같은 이 상태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열띤 호흡을 뱉으면서도 도중에 그만두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의사가 시킨 대로 재활 치료와 운동에 최선을 다해왔다. 그러나 기대치에 충족하는 결과를 본 적은 없었다. 절망이 온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겉치장에 소홀해졌다. 긴 머리카락은 품위고 꾸밈이고 모두 잊고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채로 내버려두었다. 화장이나 옷차림도 환자처럼 추레해졌다.
하녀는 그녀를 걱정하여 핀에게 편지를 보냈다. 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연인을 이대로 두어선 안 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하리로부터 전언이 왔다. 연인과 궁에 나들이를 오라는 것이었다.
장소는 밀궁이 선택되었다. 그곳에서 지내고 있던 세드릭이 대륙 여행을 떠났기에 때마침 황후와 연인들이 만날만한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핀은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연인을 보았다. 로리는 황후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검은 리본 하나로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어떤 치장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마저도 묶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을 핀이 억지로 묶어준 것이었다. 늘 아름다운 옷만 입던 그녀가 편한 옷만 찾고, 원래부터 짧은 입에 더욱 식사를 하지 않아 몸은 앙상해져갔다. 하루 종일 공저에 틀어박혀 약에 의지해 잠을 자거나 마법영상구의 유치한 희극만 골라서 본 그녀의 표정에 생기라고는 없었다. 핀이 일과 학업에 바빠서 찾아오지 않으면, 그녀는 핀이 변심했다고 느끼며 변심의 이유를 자신의 낫지 않는 다리 탓으로 돌리곤 했다.
자존심이 바닥으로 치닫는 연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핀에게 형벌 같은 일이었다. 그녀가 마력 화산에 사냥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그 예전 자신이 모질게 대하지만 않았어도, 모든 것의 원인을 생각하면 늘 자신이 있었다. 핀은 이 순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예전처럼 애완견이라는 말을 하며 괴롭혀주었으면, 그때의 건방진 발랄함을 그리워할 정도로 요즘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그녀의 허벅지를 조금씩 주물러주는 것뿐이었다. 로리는 그의 손길을 어두운 눈으로 보았다. 자신의 치부를 만져대는 연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손을 내쳤다. 하지만 핀은 꿋꿋했다.
“신경 돌아와야 하잖습니까? 좀 가만히 계십시오.”
“이런다고 낫진 않아.”
“나아질 겁니다. 반드시.”
의사는 꾸준한 마사지를 해주어야만 신경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핀은 그 말을 떠올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로리는 그런 연인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절름발이가 된 걸 인정할 수 없는 건 아니고?”
한순간 핀은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수개월 전에 완치되었어야 할 허벅지다. 하지만 후유증이 큰지 잘 걷지도 못한다. 걷는다 해도 심하게 다리를 절었다. 그 탓인지 회사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공저에 처박혀 살기만 했다. 오늘 이렇게 궁으로 온 것도 자신이 애원을 하다시피 하니 마지못해 나와 준 것이었다.
그런 폐쇄적인 행동 속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이 드러났다. 세상에, 절름발이가 된 걸 인정할 수 없는 건 아니냐고? 핀은 머리끝까지 짜증이 솟았지만 차분하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황후 폐하께서는 바느질이 취미죠. 같이 한번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하나하나 뭔가 만들고 있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나처럼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할 환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취미가 되겠지.”
“로리.”
“나처럼 불편한 몸 데리고 나오기에도 이런 숨겨진 장소가 딱 적격일 테고…….”
“로리!”
핀이 조금 화난 음성으로 외치자 로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제발…… 제발 원래의 당신답게 돌아와.”
“…….”
“차라리 그때 같은 모습이라도 보고 싶으니까.”
로리는 침묵했다. 그러나 정적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황후가 왔기 때문이다.
만삭의 그녀는 시종 없이 혼자 들어섰다. 그것부터 황후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편한 복장, 화장기 없는 얼굴,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은 머리의 그녀를 보고 로리는 당황스러웠다. 황후는 언제 보아도 물결 없는 연못에 고요히 뜬 연잎과 같은 모습이었다. 저런 여자가 어떻게 궁에서 황후로 살아낼 수 있는 거지?
“오랜만이군요.”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황후를 보고 로리는 멍하니 시선을 내려 황후의 배를 보았다. 여자의 몸은 참 신기하다. 저렇게 무거운 것을 담고 어떻게 걸어 다닐 수가 있지? 힘들지는 않아? 그런 궁금증에, 그만 황후에게 먼저 예를 갖춰야한다는 사실도 잊고 말았다.
그래서 핀이 먼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황후 폐하.”
그제야 로리는 앉은 자리에서 예를 갖추었다.
“황후 폐하…….”
“앗, 얘가 또 발로 차네.”
하리는 로리의 인사를 받다가 태동을 느끼고 배를 쓰다듬었다. 로리는 고개를 들고 황후의 배를 빤히 보았다. 황후는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태동이 눈에 띌 정도였다. 황후가 자리에 앉기 직전, 그녀의 배에 볼록한 뭔가가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로리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으악! 아, 아프시지 않으십니까?”
하리는 바느질 바구니를 펼치며 웃었다.
“전혀요. 큰 몸으로 이 좁은 뱃속에서 헤엄치느라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만.”
바구니에서 나온 것은 앙증맞은 크기의 아기 베개였다. 워낙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져있어서 남자아이의 것인지, 여자아이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핀이 그 베개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로리가 황후에게 부탁을 했다.
“저 실례지만, 정말 외람된 청이나…….”
핀과 하리는 로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한참을 갸웃거렸다.
“……한 번, 만져 봐도 되나요?”
그 말에 둘 다 웃고 말았다. 아마 이 광경을 태후가 본다면, 감히 황후의 몸에 손을 대려한다고 무엄하기 짝이 없다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리는 로리의 불편한 다리를 배려해 의자를 살짝 옆으로 옮겨 로리가 배를 편히 만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리는 황후의 배에서 일어나는 작은 움직임을 느끼고 눈이 커졌다.
“신기해요. 어떻게 여기서 아기가 수영을 할 수 있는지!”
감히 황손이 자라나는 배에다 아기라고 표현을 하는데도, 하리와 핀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그저 로리가 사용한 ‘수영’이라는 단어가 우스워 웃을 뿐이었다. 하리는 로리가 참 귀여운 아가씨 같았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우리 모두 다 이런 과정이 있었던 걸요.”
“아……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폐하.”
“전보다 많이 야위어 보이는데…….”
두 여자의 대화가 시작될 때 핀은 조용히 하리의 배를 보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것이라. 우리 모두 다 이런 과정이 있었다는 하리의 말은 그를 깊은 생각으로 이끌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기 위해 저렇게 어미의 뱃속에서 따뜻한 관심과 기대 속에 자라다, 태어나고, 키워지고, 살아간다. 당연한 사실이 어째서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왜 자신의 아이들이 뱃속에 있을 때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그때는 그런 당연한 것들을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쳐있어서였을 것이다. 목적달성에 바빠 다른 뭔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더 이상 황제로서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에 와서야, 그는 인간의 마음, 감정을 하나하나 제대로 배우는 것 같았다.
“여자 아이 이름만 생각하시는 폐하 때문에 고민이에요. 남자 아이로 태어난다고 해도 폐하께서는 하나같이 여자 아이 같은 이름만 붙여주려 하시지 뭐예요?”
“어머, 어떤 이름인가요?”
“수리, 샤일로, 하퍼…….”
핀은 대화를 나누는 로리의 목소리에서 그늘진 기운이 잠시나마 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갑자기 뭔가 말을 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얼른 몸이 나으십쇼. 로리를 닮은, 예쁜 딸을 낳…….
그는 로리를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것 또한 자신의 욕심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차를 마셨다.
그때 히엘이 왔다.
“폐하! 이 시간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나야 뭐 한가하니까.”
“황제 폐하 뵙습니다.”
히엘은 다리가 불편해서 앉은 채로 예를 갖춰야하는 로리를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에 황제를 보고 무례한 말을 일삼던 패악녀는 어디가고 초췌한 환자만 있었다. 그런 그녀와 핀이 연애를 하고 있다? 히엘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잠시 구경하러 와본 것이었다.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것들 해.”
로리는 히엘이 전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황제가 되고 난 이후 형식적인 근엄함을 내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나마도 하지 않는 뺀질거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굴은 반반해서 황후와 예쁜 아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리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애완견이 황제 노릇을 더 오래 해야 하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