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회 -->
하얀 커튼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 작은 소리에 라브는 잠에서 깨어났다. 또 그 꿈이었다. 사르제스 제국에게 무참히 당하던 그 날의 악몽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히 살아내고 있지만 후유증은 지독하다. 가해자들도 그러할까? 상념에 젖어들려는 찰나 그의 옆에 누워있던 남자, 드래곤이 일어나서 그를 보았다.
“아침마다 자주 그러던데, 병이라도 앓고 있나?”
드래곤은 라브를 위해 직접 인간의 언어까지 터득했다. 라브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단지 버릇일 뿐이에요. 몸이 좀 피곤했나봅니다. 그럴 때면 지금처럼 백화증에 걸리던 그 시절의 꿈을 자주 꾸곤 하죠.”
“백화증? 태어날 때부터 이런 피부색이 아니었단 말인가?”
“네. 사르제스 병사들에게 당해서 이런 꼴이 되었죠.”
드래곤은 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의 하얀 살결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라브는 핀과 닮은 모습을 한 그의 애무를 굳이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화대도 최고로 쳐주며, 가난한 귀족 신분인 자신으로서는 가볼 수 없는 신비한 곳(마계)도 여행시켜준 드래곤이 싫을 이유가 없었다.
라브는 문득 이 남자의 이름이 궁금해져 물었다.
“이름 말해줘요.”
드래곤은 간단히 대답했다.
“드래곤.”
그러자 라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드래곤의 대답을 장난으로 아는 것이다. 라이트릭 에센의 형제는 참 장난기도 많지. 어떻게 제 이름을 드래곤이라 할까?
“성은 알고 있단 말이에요.”
“내 성을?”
성 따윈 없는 드래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그대가 알고 있는 내 성이 무엇이지?”
라브는 웃으며 정말 모르겠냐는 듯 대답했다.
“당신, 에센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
핀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키스 한 번 해보기가 왜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로리는 요구 사항이 지나치게 많았다. 소파에 앉혀주었더니 커튼을 쳐달라고 했다.
커튼을 쳐주었더니 그래도 좀 밝아서 부끄럽다며 암흑 마법을 드리우겠다고 했다. 마법을 드리우자니 목이 탄다고 했다. 물을 주었더니 갑자기 거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넓은 장소에서는 키스를 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도대체 무얼 그리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자꾸만 미루고 있었다.
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갑자기 로리를 번쩍 들어올렸다. 무슨 키스 한 번 하는데 이렇게 따질 것이 많은지, 그는 대표라는 여자를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려고?”
“가보면 압니다.”
핀은 로리를 안고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방은 집안에서 빛이 가장 덜 들어오는 장소다. 작은 창문이 있긴 하나, 그 부분만 차단하면 완벽한 어둠이 드리워진다. 핀은 다락방의 문을 열어 자신의 침대 위에 로리를 조심스레 앉혔고, 로리는 이 침대가 핀의 침대라는 것을 알고는 기겁을 했다.
하지만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대체 뭐지, 이 바느질 소품 범벅은?’
그녀는 온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상한 바느질 작품들에게서 난데없는 소녀의 향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남자의 방이 이렇지?’
한편 핀은 그 나름대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완벽한 어둠. 이런 좁디좁은 방! 이러한 조건에서도 로리가 부끄럽다고 내빼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한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고 키스에 방해되는 뭔가가 없는 지 철저히 확인을 했다. 날씨가 춥다보니 방공기도 썰렁하다. 침대 아래에 비기화 처리된 온열석을 꺼냈고, 그것을 침대 주변에 둘러쳤다. 그러다 혹시 공기가 건조해질 까봐 주방으로 내려가서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주전자에서는 아직도 따끈하게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핀이 키스 한 번 제대로 하기 위해 갖은 공을 들이는 동안, 로리의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대체 이 소녀의 방이 강철 검의 방이 맞는지?’
핀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즐거워하며 다락방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쓸데없이 잠가보았다.
‘문을 왜 잠그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잠그고 싶어지는군…….’
그때 로리가 질문했다.
“이, 바느질은…… 웬 것들이야?”
“아.”
핀은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들여 키스할 사이인데 숨겨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솔직히 말했다.
“취미가 바느질입니다.”
로리는 살짝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에 식당에서 핀이 묻던, ‘바느질 잘하십니까’ 라는 질문이 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뭐?”
“제 취미가 그러합니다만.”
로리는 지금 자신이 제국의 핏빛 강철 검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침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혼란을 느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핀은 허탈한 웃음을 웃으며 로리에게 다가갔다.
“왜 못 믿으시는 겁니까. 역시…… 남자가 바느질 하면, 별로…… 인겁니까?”
“그야 넌 바늘보다 검을 잡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그랬지요. 예전엔. 하지만 이런 것들 만드는 게, 제 원래 취미였습니다.”
“…….”
“뭔가 문제라도……?”
“해 봐.”
“……?”
“해보라고. 바느질. 바늘 잡고, 바느질 해 봐.”
로리의 말에 핀은 한참 가만히 있다가, 책상에 있는 반짇고리를 꺼냈다. 마치 허리춤에서 성검이라도 빼내는 기세였다. 어두워서 바느질하기가 좋지 않았다. 그는 로리에게 부탁했다.
“라이트, 걸어주십시오.”
로리가 반신반의로 라이트마법을 드리웠다. 그러자 핀이 로리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로리는 아까처럼 설렘에 물든 표정이 아니었다. 의문, 충격, 기이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계획에는 없던 눈싸움을 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핀은 왠지 울컥한 감정을 느꼈다.
키스한 번 해보려고 여기까지 와서 별 준비를 다 했는데 바느질을 시켜?
“진짜 합니다?”
“응! 해봐!”
로리는 정말 바느질 할 줄 아는 지 한번 두고 보자는 눈빛이었다. 핀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바늘 하나를 들었다. 자수용 바늘이었다. 그는 바늘에 기다란 붉은 자수 실을 끼운 후, 갑자기 등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 반짇고리에 있는 소형 수틀 하나를 꺼냈다. 그것에다 린넨 천 한 겹을 끼우고 빠른 속도로 바늘을 놀리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실을 바꿔 끼우기도 했고, 수틀을 뒤집어서 어떤 고급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처럼 바늘을 휙휙 돌렸다.
‘뭐지, 이 남자?’
로리는 핀의 등을 멍하니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핀의 비정상적으로 빠른 손놀림에 정말 바느질이 맞는지 의심까지 했다.
‘막 해대는 거 아니야? 이게 무슨 웃긴 상황인지 모르겠네. 이 남자가 바느질이라니…….’
곧 핀이 수틀에서 린넨 천을 빠른 속도로 슥 빼더니 그것을 접어서 로리에게 내밀었다. 로리가 그것을 받아들자, 핀이 조금 화난 듯 말했다.
“약속하세요.”
“뭐, 뭘?”
“이거 보고 나면, 그땐 진짜…….”
그땐 진짜 키스만 해주세요, 라고 핀은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쩐지 구차해보였다.
“이거보고서도 또 다른 핑계 대고 뜸들이시면, 저, 안 참습니다.”
“아, 안 참다니 뭘…….”
로리는 사람을 꿰뚫어버릴 것 같은 핀의 눈빛이 두려웠다. 또 뜸을 들이면 죽창, 쇠창으로 찔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을 회피하며 린넨 조각을 펼쳤다. 핀이 로리의 질문에 뒤늦게 대답했다.
“제가 하고 싶은 거 할 거란 말입니다.”
자수를 마주한 로리는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인 로가드리아 꽃이 수 놓여 있었다. 비록 크기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에 불과한 크기이지만, 그 꽃 한 송이에는 온갖 자수 기법이 다 들어있었다. 잎사귀, 줄기, 꽃잎, 꽃술, 어느 것 하나 중복되는 기법이 없었다. 특히나 꽃잎을 수놓을 때는 명암에 따라 색조의 단계를 부드럽게 표현하여, 이것이 절대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로리는 바느질이 취미라는 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 이런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니! 무언가 이상해! 하지만, 나, 나쁘지 않아! 뭔가 우습지만 멋있어…… 이래도 되는 거야?’
로리는 찬사를 했다.
“너무 예쁘구나. 참 잘하는 구나! 너는 제국의 황금빛 바늘이야!”
핀은 키스 대신 이런 바느질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매우 성가셨다. 로리의 칭찬을 칭찬으로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그는 그녀의 손에서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애가 타는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지금 칭찬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습니까!”
“……?”
“더 잘하는 거, 보여드리겠습니다.”
과연 그가 바늘 잡는 거 보다 더 잘하는 것은 뭐란 말인가?
핀이 그녀를 침대에 눕힌 순간, 비밀은 은밀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
상쾌한 향기와 함께 핀의 입술이 다가왔다. 로리는 얼굴에 불꽃이 튀기는 느낌이었다. 성급히 라이트 마법을 지워버렸다. 짙게 깔린 어둠속에서 핀의 호흡이 흥분에 점점 가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뭐라고 하셔도, 안 들을 겁니다.”
키스 한 번 해보려고 별의별 준비를 다한 자의 마지막 경고였다.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는 로리의 입술에 핀의 입술이 닿았다.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었다. 부드러운 혀끝이 연인의 혀를 찾아 점점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로리는 오싹함을 느끼고 말았다.
‘핀라이트. 지금 나한테 입 맞추는 인간이 그 남자 맞는 거야? 뭔가 이상해. 감옥에서 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낯설다고. 이렇게 부드럽게. 아…… 아아……. 이게 정말 그 황제의 키스였나……!’
핀은 두 손으로 로리의 턱과 가녀린 뒷목을 받치고 부드럽게 어르듯 만지면서 혀를 깊게 넣었다. 구름을 노니는 새처럼 그녀의 입술 안을 느긋하게 거닐었다. 그러다 그 작은 몸 위에 조심스레 올라타기 시작했다.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몸이 느껴져서 그는 작게 웃고 말았다.
“숨, 제대로 쉬세요.”
“흐읍.”
조금씩 농염해지는 그의 입맞춤에 로리는 파도에 휩쓸려가는 기분이었다. 손이 저절로 그의 셔츠를 붙들고 있었다.
‘누가 애완견인지 모르겠군.’
핀은 그 손짓에 더욱 자극을 받아 더 이상 입맞춤만 하고 있을 수 없어졌다. 입술을 떼 냈다. 로리가 이제 끝인가 하는 표정을 짓기가 무섭게 그녀의 얇은 귓바퀴를 삼키듯 물고 혀로 간질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로리가 온 몸을 비틀었다. 거칠어진 핀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마법의 언어처럼 들려왔다.
“로리.”
“으, 으응.”
어둠속에서 로리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핀은 다시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허벅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흠칫거리며 몸을 떨 때 허벅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핀은 안타까움에 다시 입 맞추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환자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녀의 두 다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고작 두 번째 키스일 뿐이다……, 욕망을 꾹 누르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여린 쇄골에 입술을 파묻고 있었다.
로리가 자신의 몸을 손으로 가렸다.
“에센.”
핀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치워버렸다.
“핀이라 불러주세요.”
“지금 뭐하…….”
“그냥, 잠시만, 막지마세요.”
이성과 욕망이 싸우느라 내뱉는 목소리는 매우 갈라져있었다. 결국 승리는 욕망이었다. 어느 샌가 그의 손이 그녀의 드레스 앞섶을 풀어헤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