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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112화 (1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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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핀은 휴일이라 늦잠을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이런 때엔 따끈한 차로 몸을 녹이는 게 최고다. 그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 두고, 샤워를 간단히 마쳤다. 오늘도 필기르의 깃털에는 하리의 통신이 들어와 있었다.

[핀, 대체 티에리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아. 그런 못된 영혼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번만은 모른 척 넘어가주면 안 될까?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주렴…….]

핀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이젠 백모까지 구워삶는 거냐? 난 너를 그리 키우지 않았다.’

핀은 굳은 표정으로 차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생각을 정정했다.

‘비록 키운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지난 보름 동안 세드릭은 ‘아버지를 저주 한다’는 말만 필기르의 깃털로 날려 보냈다. 이쯤 되니 아버지로서 오기가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을 했던 잘못을 했으면 시인을 하고 반성을 하면 될 터인데, 그게 그렇게도 어렵던가?

‘오늘은 궁에 가서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야겠군.’

궁에 들르는 김에 그동안 소홀했던 바느질거리도 챙겨가기로 했다. 비록 히엘로부터 궁 출입 금지 명령을 받았지만 그런 경고 따위는 이미 핀의 뇌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가 궁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마차 소리가 났다. 로리의 마차였다. 하녀와 기사들이 그녀의 바퀴 달린 의자를 집 앞까지 끌어와 주었다.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도록.”

그들이 돌아가자 핀은 그녀를 집 안으로 들였다. 오랜만에 ‘연인’이 마주 앉게 되었다. 로리는 일단 세드릭의 안부를 물은 뒤, 별일 없다는 대답을 듣는 즉시 핀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야심을 속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핀은 갑자기 찾아온 그녀를 난감하단 듯 보았다.

“대표님.”

“아무도 없는데, 그 호칭은.”

“그럼 뭐라고 불러야합니까?”

“아냐.”

로리는 핀에게 이름이 불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르라 말하기엔 무언가 쑥스럽고 어색했다. 핀이 미지근한 차를 가져오자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걱정스레 말했다.

“세드릭은 안 보이는군. 그 아이는 어디 갔지?”

이미 세드릭이 집에 없다는 걸 다 알고서 하는 질문이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핀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요즘 말썽을 부려서 잠시 궁에 근신시켜 두었습니다.”

“그렇구나. 무슨 말썽인데…….”

“다리는 좀 괜찮으십니까?”

“으응.”

연인이 안부를 묻자 로리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러자 핀이 갑자기 직언을 날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로가드리아.”

“푸웁!”

핀이 부르는 이름, 그 진지한 목소리는 벌새가 꽃잎을 건드리는 것처럼 간지럽고 달콤한 느낌이었다. 로리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너무 당황해서 마시던 차를 입 밖으로 살짝 뿜고 말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로가드리아. 보고 싶었습니다, 로가드리아. 보고 싶…… 그랬다면 찾아와야 하거늘! 보고 싶었다면서 왜 나한테 안 온 거야! 로리는 기분이 좋아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선 추태지 않은가. 그녀는 온 힘을 다해 표정을 관리했다.

“그, 그럼 오늘 내가 잘 찾아 온 것 같군.”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었는데 말입니다.”

로리에게 가는 것을 까맣게 잊고 궁에 가서 바느질이나 하려고 했던 핀은 지금 거짓말을 아주 능숙하게 해대고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때로는 연인을 기분 좋게 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했다. 거기다 그 말에 배시시 웃는 로리가 귀엽기도 해서, 그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히에라지엘의 동생, 그 피는 속일 수 없었다.

“찾아가서 허벅지가 괜찮으신지 좀 보려 했습니다만.”

그 순간, 로리의 얼굴에 번진 열꽃은 허벅지까지 번지고 있었다.

“허, 허벅지를 보다니…… 최근에 붕대를 풀어서, 괜찮…….”

“좀 봐도 되겠습니까?”

핀이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은 갓 피어난 수선화처럼 생기 있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로리는 섬뜩하기까지 한 짜릿함을 느꼈다.

‘제국의 핏빛 강철검! 이런 자였냐! 좋구나!’

그러나 로리는 일단 한 번 새침하게 굴어보기로 했다.

“봐도 되겠냐니? 감히, 숙녀의 허벅지를 보려하다니! 너는 참 음흉하구나!”

일부러 쌀쌀맞게 구는 모습이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새침한 모습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핀은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서 흐뭇했다. 나른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요즘 계속 학업과 일과 사춘기 아들에 시달렸다. 그러다 찾아온 휴일에 푹 늦잠을 자서 피로를 쫙 풀었다, 샤워를 해서 개운하기도 했다, 게다가 눈앞에 아이얄 최고의 미녀라 할 수 있는 여자 친구까지 있고, 아들도 벌 받느라 집에 없겠다……. 피 끓는 사내에다, 홀아비에, 은근한 욕구불만자인 핀은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굽혀 로리에게 다가갔다.

“어, 어딜…….”

로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핀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서 로리의 손에 있는 찻잔을 빼앗아 테이블로 치워두었다. 그리고 로리의 귓가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감옥에서 했던 것, 또 해봐도 되겠습니까.”

이 얼마나 달콤한 목소린가. 맷돌에 꿀을 간다 해도 이보다 달콤한 소리가 나오진 못할 것이다.

“감옥에서 했던 거라면……!”

로리는 된다고 말하기도, 하지 말라고 앙탈을 부리기도 민망했다. 핀은 상체를 서서히 로리에게 밀착시켰다. 한 팔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감싸 안고 또 다른 쪽 손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대답해주십쇼.”

나름 순수한 소녀의 뇌와 감성을 가진 로리는 지금 느껴지는 이 남자의 기운이 홀아비의 쌓인 욕정인지 순정인지 잘 구분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가슴이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했던 키스를 또 해봐도 되느냐, 라…….

“너는, 나를…….”

“……?”

“너는, 나를, 나를, 좋아하에애해?”

이 무슨 새삼스러운 질문이란 말인가. 연인과 오붓한 시간을 지내려 제 발로 들어온 여자가 하는 질문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빤한 질문이었다. 핀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좋으니까, 좋아서,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러는 것 아닌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리가 오묘한 웃음을 웃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데 왜…… 온다고 해놓고서 안 왔어? 환자라고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해놓고서 왜…… 나한테 안 왔지?”

“아, 그건 바빠서 그랬습니다.”

핀은 뻔뻔할 정도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집에서 요양을 하던 하루하루, 24시간 내내 이 남자 생각에만 빠져있던 로리가 듣기에는 너무나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핀은 다시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을 그 여린 목에 둘러 안듯 감았다. 로리가 정색을 하며 외쳤다.

“뽀뽀 하지 마!”

“예?”

“건방진 것!”

핀은 도무지 여자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다가도 정색을 하고 따끔하게 내지르는 로리는 대체 무슨 생각중인 걸까.

“대체 왜,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대표님?”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넌 끝내 내게 안 왔겠지.”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보름째야. 보름동안 한 마디 연락도 없었잖아.”

“아닙니다.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다음 시즌 업무가 굉장히 바빴고, 일이 끝나는 대로 찾아가려 했습니다만.”

로리는 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마 나만 계속 널 기다리고 있었을 테지. 그러게 너는 왜 네가 먼저 찾아가겠다는 말 따윌 해서 사람을 이렇게 바보처럼 기다리게 하지?”

로리의 시무룩한 낯빛에 적응되지 않는 핀이 조금 목청을 높였다.

“그러니까 오늘 가려고 했단 말입니다!”

“……?”

핀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뻔뻔한 기질에 엄청 놀라고 있었다. 오늘 가려고 했다는 거짓말을 외치며 진심을 연기하는 제 자신에게 칭찬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거짓말을 듣고 로리가 뺨을 더욱 발그레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핀은 자신의 (거짓)말이 제대로 먹혀드는 것 같아 뿌듯했고, 한 번 더 제 말이 진심으로 전해지게끔 쐐기를 박았다.

“바쁜 게 짜증이 다 날만큼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폐, 폐하!”

로리는 너무 황홀한 말을 들은 나머지 고분고분한 태도로 변해버렸다. 그 반응은 핀의 몸을 활활 불태우고 말았다. 그는 이대로 진도를 계속 나가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어 과감하게 로리의 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펄펄 끓는 그의 혈기만큼이나, 로리의 뺨도 뜨거웠다.

촉, 촉, 촉, 뺨에서 입술로 옮겨지는 뜨겁고 촉촉한 감촉에 로리는 잔뜩 긴장했다. 그러다 번뜩 어떤 생각이 들어서, 잠시 얼굴을 떼고 핀의 어깨를 한 손으로 막았다. 핀은 살짝 애가 타는 표정이었다.

“또 왜 그러십니까?”

“호, 혹시 저번처럼 길게 할 거면, 나…….”

핀의 얼굴은 홍당무 빛으로 물들었다.

이제와 새삼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감옥에서 오랫동안 나눈 키스는 아직도 그에게 민망한 기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여자와 처음 하는 키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그렇게 길게 키스할 거면서 그동안 왜 로리를 돌을 보듯 하거나, 쳐내기에만 바빴었던가. 그때는 왜 이 여자에게 솔직해지지 못했었던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그렇게 흘러간 시간들이 야속할 뿐이었다.

“힘들다면 저번처럼 길게 하지는 않겠…….”

핀의 말을 끊고 로리가 말했다.

“그때, 나, 첫키스였고…….”

첫키스라는 말에 핀은 돌로 이마를 세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에, 첫키스? 비록 성질은 똥강아지 같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의 여자다. 들러붙는 귀족 난봉꾼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첫키스? 그게 가능한지? 사르제스 귀족들의 난잡하고 방탕한 분위기를 알고 있는 핀에겐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대표님?”

“그러니까, 원래 그렇게 길게 하는 게 네 키, 키스방식이라면 말이야…….”

핀은 왠지 죄책감 비슷한 기분이 들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자신과 로리는 급이 다른 존재다. 자신이 아들을 줄줄이 보았던 홀아비라면, 로리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숙녀다. 게다가 자신은 이제 평민들과 섞여 살게 된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그녀는 대공의 딸이다. 귀한 몸에 길게 키스한 것이 죄스럽게 느껴져 사과가 시작됐다.

“죄송합니다. 그때처럼 길게 입맞춤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적어도 삼십분 분쯤은 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말끝을 흐린 로리는 발그레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또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그런 몸짓 하나하나가 핀을 안달나게 하는 몸짓이라는 걸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민했던 말들이 조심스레 나왔다.

“이 의자는 불편하니까…… 소파로, 옮겨달라는 말 이었어. 그게 펴, 편해서…….”

그렇게 로리가 세상의 중심에서 편한 키스를 요구하자, 핀은 하늘에서 별이 수 천 톤 떨어지는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몸을 들어올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무게감에 한숨이 나왔다.

“왜 이렇게 가벼운 겁니까.”

“…….”

로리는 다친 뒤로 살찔 여유가 없었다. 원래부터 날씬한 몸이라 살이 빠진 지금은 가련할 정도로 마른 상태였다. 그런 몸이 행여나 소파에 닿을 때 부러지기라도 할 까봐 핀은 담요  몇 개를 가져와 소파에 폭신하게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녀를 고이 내려두었다. 그 배려 깊은 행동에 로리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로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푹신한 자리를 만들어 그 위에 로리를 내려놓았다는 것은 곧, 그만큼 오랫동안 키스할 작정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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