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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은 디아세라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한 뒤, 그녀를 죽이기 직전까지 괴롭혔다. 배신감에 치를 떨던 그는 정말 그녀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끝내 그러진 못했다.
‘미련한 사랑도 사랑이라고 내 엄벌을 막는구나!’
그는 무마력자가 된 세라를 다시 황궁에 패대기치듯 보내버렸다. 그 후 세라는 궁의 무단 침입자로 잡혀 조사를 받기 위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래도 한때는 높은 신분이었고, 황제와 친분도 있었기에, 그녀는 연신 그 점을 내세우며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하소연했지만, 황제는 그녀를 모른 척했다. 그렇게 세라의 황제 빼앗기 계획은 무너져버렸다.
같은 종인 암컷 드래곤도 아니고 ‘하등한’ 인간 여자에게 버림받은 못난이가 되어버린 드래곤, 그는 실연의 아픔이 너무 커서 며칠 동안 자신의 둥지에서 허우적거렸다. 대관절 자신이 제국 황제라는 뺀질거리는 인간 수컷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 자신은 그 황제보다 강하고도 위대한 존재였다. 본 모습으로 변신해서 한 번 으르렁거리면 황제 따위는 끽 소리도 못하고 밝혀죽을 정도로 강한 존재였다. 그런 대륙 최강의 생물체라는 타이틀에다 더하여 마력 화산에 온갖 공물이며 금은보화는 다 쟁여두고 사는 대륙 최강의 재력가가 아니었던가?
‘다시는 인간 여인을 사랑하지 않으리!’
애당초, 일개 인간암컷에게 빠져 버린 것부터가 실수였다. 모든 게 세라의 미모때문이었다. 인간과는 종이 다른 자신의 눈으로도 그 인간 암컷, 디아세라는 너무나 섹시했다. 그 섹시함의 크기가 어느 정도냐면 드래곤 자신이 직접 마법영상구에 소장시켜 영원히 감상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라는 드래곤의 취향-여자 드레스 입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선 같은 인간 여자의 형상에는 흥미가 없다며 드래곤의 구애를 거절했었다. 드래곤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아이얄 최고 화제의 패션 화보를 뒤적여 그 남자 모델(라이트릭 에센)로 변신까지 했다. 평소 그렇게나 자신이 물고 빨고 핥지 못해 안달이 났던 아름다운 드레스도 한 번 입지 않고 참으며 세라에 의한, 세라를 위한, 세라를 향한 연애만 했다. 그런데 그녀는 잠시 몇 개월 신나게 어울려주는 척만 하더니, 이내 뺀질이 인간 황제에게 가서는…….
드래곤은 불쾌하고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그런 못돼먹은 인간 암컷과 상종하지 않으리!’
드래곤은 라이트릭 에센의 모습인 채로 둥지를 떠났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인간들이 드나드는 환락가에서 질펀하고 난잡하게 즐기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아무 가게나 무작정 들어갔다. 가게 지배인은 라이트릭 에센의 모습을 한 드래곤을 드래곤이 아닌 엄청난 미청년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드래곤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우리 가게에서 일하고 싶은가?”
드래곤은 지배인을 한참 노려보다가 그를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실컷 폭력을 휘두르다 지친 드래곤은 어마어마한 씰(제국 통화)을 지배인에게 내밀며, ‘괜찮은 인간들을 데려오라’고 무언의 지시를 했다.
“예이, 예이!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지배인은 곧 아리따운 여인들을 데려다가 ‘골라보시라’고 아부를 떨었다. 인간 암컷이라면 신물이 나버린 드래곤은 그들을 모두 물렸다. 그제야 지배인은 드래곤에게 뭔가 다른 취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이잖아?’
곧 지배인은 가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 창기를 데려왔다.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라벤더, 즉 라브였다.
“어떠십니까? 우리 가게에서 가장 아름다운 녀석입죠.”
드래곤은 만족스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고, 라브의 눈은 커졌다. 라브 역시 드래곤을 드래곤으로 보지 않고 그 변신한 모습으로 인해 ‘라이트릭 에센’으로 보았던 것이다.
‘어째서 에센이 이런 가게에 와있는 거지?…… 어쨌든 오늘 화대는 안 받아도 좋을 것 같군.’
***
“으아아아아! 얄미운 녀석들! 감히 하리를 데려가!”
히엘은 마법실험실에서 온갖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며 분노를 한껏 날뛰게 내버려두었다. 한 십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날뛰다 보니 점점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헉헉…… 크후후, 재미있었어.”
그는 엉망이 된 마법실험실 자체를 소멸 시켜버리고 궁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멜로디가 떠오르며 청승맞은 노래가 가슴으로 불러졌다.
‘나 혼자 잠을 자고, 나 혼자 눈을 뜨고, 나 혼자 일을 하고, 나 혼자 또 울고 웃고…….’
조회에 참가하고, 마활들의 보고를 받고, 정무에 참가하고, 휴식 시간이 오자, 겨우 잠재웠던 분노가 다시금 스믈스믈 속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핀 이 녀석, 아주 기회를 잡았다 이거지? 아들이랑 짜고 하리를 데려가 버려? 하리도 너무 하잖아! 그렇게 걔들이 가잔다고 가버리면 대체 난 뭐가 되냐고!’
처음에는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하리를 말릴 새조차 없었다. 그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자, 히엘은 점점 소식 없는 황후와 황후를 데려 가버린 핀 부자 등 모두에게 분노와 섭섭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핀에게 가서 따지기로 했다.
***
그 집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드릭은 교복을 챙겨 입으며 학교로 갈 준비를 했고, 핀 역시 출근을 위해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참이었다.
“히엘, 왔어?”
히엘은 대답 대신 일단 세드릭의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세드릭의 방은 임시적으로 하리의 침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남편이 온 줄도 모르고 세상모르고 쿨쿨 자는 그녀의 모습에 히엘은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일단은 그녀를 잠자게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갑자기 방싯거리며 세드릭을 향해 말했다.
“조카, 학교 갈 준비 다 했어?”
“네.”
세드릭은 백부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얼마 전에 백모를 궁에서 데려와 버린 일이 뒤늦게야 후회가 된 것이었다.
‘원래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랬어. 아버지와 내가 너무 끼어들었나. 얼른 도망가야지.’
히엘이 웃으며 세드릭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가벼운 웃음이 아니었다.
“얼른 다녀와. 공부 열심히 하고. 성적 좋아야지. 전 황태자 체면이 있는데.”
전 황태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는데 체면은 무슨 체면? 얼른 조카를 내쫓아내려는 히엘의 의도를 간파한 세드릭은 양말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가방을 매고서 후다닥 줄행랑을 쳤다. 아들이 그러던가 말던가 핀은 무덤덤하게 양치질을 했다.
휘익-탁!
둔탁한 소리에, 핀은 제 앞 벽면에 꽂힌 뭔가를 보았다. 그것은 성력이 사라진 성검이었다. 검을 던진 사람은 히엘이었다. 히엘 역시 성검과 같은 재질의 평범한 검을 들고 있었다.
“양치질 얼른 끝내. 그리고 검 들어.”
오랜만에 검 겨루기라도 하잔 말인가? 핀은 입을 헹궈내면서 피식 웃었다. 그에게 검은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고, 히엘에게 검이란 쥐기 두렵고 끔찍한 무기에 불과했다. 적어도 핀이 알기로는 그러했다.
“아침부터 검? 뜬금없네.”
핀의 말에 히엘은 그저 목을 주무르며 웃기만 했다. 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거 상대해주지. 요새 몸이 근질거렸는데 말이야.”
핀이 검을 들기가 무섭게 그들을 휘어 싼 가공간이 생겼다. 텅 빈 회색의 공간, 바닥과 벽면만 존재하는 넓은 장소. 그것은 히엘이 마력으로 급히 생성한 공간이었다. 자고 있는 하리가 깨어나지 않게 배려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아내를 배려하면 그냥 데려가면 되지, 꼭 동생에게 검 겨루기를 하자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핀은 유치해진 형에게 짓궂은 미소를 날렸다.
“몸 풀게 해준 형한테 고맙다고나 말해라.”
히엘은 말을 뱉음과 동시에 선공을 했다. 히엘이 검을 드는 것 자체가 낯설었던 핀은 그 갑작스러운 선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에 자칫 당할 뻔했다. 날랜 검을 몇 차례 가볍게 피한 핀이 놀랐다는 듯 웃었다.
“하…… 진짜 해보자는 거지? 왜 이러는 건데?”
농담 같은 대답이 나왔다.
“그간 우리 귀염둥이 옷 디자인하느라 손이 무뎌졌나 싶어서.”
누가 봐도 히엘의 행동은 질투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핀은 그의 공격을 부지런히 피하며 여유롭게 대답해주었다.
“디자인 따위.”
그저 건성건성 검을 피하며 히엘이 지쳐 쓰러질 때 까지 기다릴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히엘의 검이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압박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무려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 불릴 정도로 검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핀의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어졌다.
‘이건?’
새로운 히엘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어쩌면 도핑이라도 한 것인가? 각종 마계 식물을 첨가해 만든 활성마약의 도움을 받았을 경우를 생각해본다. 그것들은 인간의 근력이라던가, 반사 신경을 순간적으로 높여주곤 하니까. 물론 히엘이 그런 약에 의지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검은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무기였다. 핀은 예전에 허튼 검질만 해대던 히엘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검을 사용하는 히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드디어 상대할만 하다는 짜릿한 미소가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히엘에게 밀리기도 했다.
더 이상 짜릿한 웃음마저 지을 수 없게 되었다.
“크큭, 헉, 하아……, 좋아. 그래. 잘하네. 어렸을 때 이렇게 좀 해보지! 그럼 아버지께서 달리 보셨을 거야!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바로 황제가 되었겠지!”
히엘은 자신도 잘 몰랐던 힘이 나오자 그것을 신기해하며 대꾸했다.
“나도, 나도 후회해. 그랬다면……!”
히엘의 공격은 점점 날렵해지고 분노가 스며들어갔다.
“하리가 네 녀석 때문에 갇힐 일도 없었을 거고!”
순간 핀은 히엘의 검을 제대로 피하지 못할 뻔했다.
“하아! 네 녀석이 죄책감으로 어제처럼 하리는 데려가는, 짓도, 하지, 않았겠지!”
죄책감이라는 말. 순간, 핀은 몸이 아닌 마음이 찔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하, 하아! 네 녀석은…… 생각보다 뻔뻔하지 못하잖아?”
“무슨 말이야!”
“환청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이나 앓고 있고!”
“……!”
“하리에게도 미안해서 어제 같은 짓을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아무 대답도 못하는 것 보니 맞나보군?”
히엘은 아주 오랜만에 동생의 속내를 찔러대고 있었다. 핀은 부지런히 그를 피하며 냉소와 함께 자조했다. 자조를 해야만 했다.
“그래, 하…… 형 말이 맞아. 나는 그딴 걸 무겁게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 그런 못난 인간이야! 그런 못난 인간한테…… 더 못나 보이는 사람이 형이란 걸 좀 알아둬!”
히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핀은 충분히 공격을 할 수 있으면서도 거의 방어태세만 취하고 있었다. 그 점이 히엘을 알게 모르게 더욱 자극시키고 있었다.
“넌, 넌 진짜……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대충 판단하고 하리에게 미련 남는 짓 할 거면 관두는 게 좋아!”
이제부터는 핀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미련 안 남게 잘 해, 그럼!”
“네 녀석한테 듣고 싶진 않아! 만사 후회만 하는 너한테 그딴 말 듣기 싫다고! 네가 하리를 데려가겠다, 어쩐다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서 했을 거라고!”
“알아서 하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갈 테면 가라는 듯 보냈어? 뭐? 태후께는 잘 일러두겠다고? 웃기지 마! 그런 걸로 하리가 더 상처받을 거란 생각을 왜 못해!”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으니까! 날 믿고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오만이야!”
오만? 히엘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한 때 수많은 자들의 말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군림해오던 오만했던 자가 바로 핀 아니었던가? 히엘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핀에게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몹시 불쾌했다.
“오만처럼 보고 싶은 거겠지, 네가! 넌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모든 걸 네 시선으로만 보려는 그 버릇, 아직도 여전해서 귀여워 죽겠구나!”
“닥쳐!”
방어만 하다가 공격 태세로 돌아선 핀은 너무나도 살벌했다. 이대로 가다간 히엘이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것이었다. 히엘은 조금 빠듯해져 반칙으로 마력 보호막을 둘렀다. 그제야 핀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왜 그 특기가 안 나오나 했어! 그래, 그래야 형이지!”
“큭! 억울하면 너도 마력 써봐라!”
발끈할 줄 알았던 히엘이 의외로 약을 올리고 있자 핀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주기 시작했다.
“정석 따윈 아무래도 좋고! 잘 나가다 안 되면 편한 방법이나 써버리고! 결과적으로 좋으면 다 좋다고 대충 넘어가버리고!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하리가 오해하고 울었던 거겠지, 안 봐도 훤해!”
그러자 히엘은 아예 검을 내팽개쳐버리고 마력을 이용해 핀을 바닥에 쓰러 눕혔다. 핀은 힘없이 바닥에 놔 뒹굴었다. 동생의 멱살을 잡은 히엘이 외쳤다.
“그래, 그게 나다! 그래서, 뭐? 어쨌거나 너는 신경 꺼야 할 일이야! 내 죄책감으로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고!”
“죄책감을 떠나서 내 친구야! 내 친구가 상처받으니까 하는 말이라고! 평생 그만큼 마음 열어본 사람 없어!”
친구?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말을 일절 믿지 않는 히엘은 바닥을 뒹굴며 웃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는 갑자기 이를 악 물었다. 눈앞의 이 바보 같은 동생은 모르고 있었다. 친구라는 관계라면서…….
“너, 내 눈엔 어떻게 보이는 지 알아? 네가 하리를 보고 있는 눈빛이 네 스스로 어떤 지나 알고 있냐고! 네가 무슨 마음으로 그 우스운 바느질거리를 가지고 궁에 가는지 좀 스스로 돌아보란 말이야! 정말 딴 생각 하나 없이 그동안……!”
무척이나 격앙된 목소리였다. 핀은 히엘의 손을 밀어 치우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래! 좋아했어! 좋아했었다고! 하리가 좋아서 바느질 하려 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