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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궁과 한참 떨어진 후방에 작은 언덕을 낀 조례지가 있었다. 그 외진 곳은 황족의 영혼체를 봉인시켜둔 묘소로 쓰였다. 대부분의 영혼들이 사라져있어서 전체 황족의 기일을 기리는 행사 외엔 궁인들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실상 황궁 내에서 가장 버려진 곳이라 할 만 하나, 오늘만은 황제의 지시로 철저한 보안 마력이 쳐져 있었다.
핀과 세드릭의 조례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족들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했다. 핀의 아들들과 리이라의 봉인관 그 주변에 그들은 하늘색 가이덴 성화를 가득 흩뿌려 놓았다. 핀은 노란색 코스터 하나를 큰 아들의 비석 위에 두고서, 황후의 봉인관을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만졌다. 세드릭은 착잡하고도 아련한 표정의 그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무슨 생각하세요?”
“편안했으면 하고.”
“어머니가요?”
“네 형들도.”
세드릭은 마력 성장하기 전을 떠올려보았다. 제위 시절의 아버지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다정하거나 부드러운 표정 한 번 짓지 않던 아버지, 가끔 보이는 웃음조차도 완전한 웃음이 아니었다. 텅 빈 마음에 타인에 대한 경계심만이 가득 남아있는 사람 같았다. 그런 아버지가 죽은 가족들의 평안을 바란다며 지금 이곳에서 오랫동안 가족들의 봉인관을 뚫어져라 보니 세드릭은 그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적, 있으세요?”
“아니.”
세드릭은 아버지의 솔직한 대답을 예상해서인지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핀이 이어서 말한 한 마디로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티에리아. 사람을 그리워 할 수 있는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아.”
그가 가진 죄책감을.
***
히엘은 최근 마활궁에서만 지냈다. 태후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실험에 미친 사람처럼 마활들의 업무에만 신경을 썼다. 굳이 큰 건들도 아니었고 탑 히든이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스스로 해치웠다. 없던 일도 만들어서 하는 황제의 뜬금없는 태도에, 레실은 황제 내외가 부부싸움이라도 했나 싶어 여쭈어보았다.
“폐하. 혹시 비 전하라도 들이시려다 황후 폐하께 들키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막 기어오르지, 응?”
대답하는 히엘의 표정이 너무나 심란해 보이는데 오히려 그것이 재미를 돋우고 있었다. 레실은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진짜입니까? 하긴, 폐하께서는 즐기시던 가락이 있으셔서.”
“레실. 우린 너무 가까운 것 같지 않냐? 이제 떨어져 지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섭하게. 전 폐하뿐입니다.”
“잠시 헤어져있자.”
히엘은 능글맞은 레실이 징그러워져서 마활궁을 빠져나와 중앙궁 침소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동진을 구성해 마계의 마법 실험실로 갔다. 마력 증폭기를 만든 이후 드나들지 않았던 곳이다. 그가 황후궁이 아닌 자꾸 다른 장소를 겉도는 데에는 남들에겐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휴. 진짜 아이 태어날 때 까지 하리 곁에서 머무를 예정인가.”
의도치 않게 에센 부인의 에테세르를 발견한 그 날부터 하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가시 방석이 된 것이다. 에센 부인은 ‘결코 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손주만 보는 즉시 다시 가이덴으로 간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뜻대로일수가 있겠는가. 에센 부인은 에테세르라는 사물 식별에 장해가 많은 존재방식인 채로도 자신의 바느질 작품 무엇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히엘은 언제 어디서나 그녀가 자신들을 지켜본다는 생각에 새삼 아내와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기가 영 껄끄러웠던 것이다.
물론 부부간에 가벼운 키스라던가 사랑한다는 말 정도야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기존에 하리에게 해주었던 워터링 목욕이라던가, ‘오붓한’ 애정 표현이 에센 부인으로 인해 하기 불편하게 되고 말았다. 히엘은 그런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러한 점으로도 불만족스러운데 에센 부인을 신경 쓴다고 전에 하지 않던 ‘바른 황제’ 생활에 임하기도 해야 했다. 하리와 함께 아침마다 태후궁에 인사를 하러 갔고, 많은 시종들이 보는 앞에서 널따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취미에 없는 연회에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기도 했고, 전에는 하지 않던 검 수련 시간도 지켰다.
히엘은 그런 시간을 매우 답답해했으나 하리가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라 했기에 참고 지냈다. 그러다 가끔 아내의 온기가 그리워 손이라도 잡으려 내밀면, 그때마다 하리는 주위에 제 모친이 있는 걸 의식한 나머지 히엘의 손을 은근슬쩍 밀어내는 것이었다.
가벼운 스킨십도 쉽지 않은 고문의 나날에 히엘은 지쳐갔다. 그렇다고 에센부인의 에테세르를 마력을 이용해 강제로 가이덴으로 밀어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히엘은 그래서 마활궁에 칩거하듯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간 레실은 참 성가시단 말이지. 어디 보자……, 에테세르들이 눈치 챌 수 없는 공간을 한 번 창조해볼까, 그렇게 된다면야 하리와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할 수 있을 지도?’
그가 눈을 빛내며 텅 빈 스크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에테세르들이 눈치 챌 수 없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나, 한 번 만들어 두면 그곳에서 직접 태교 동화도 읽어주고, 임신부 체조도 시켜주고, 워터링 목욕도 해주며,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이고도 음흉한 의도인 것이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대가 그리운 날!”
그가 공간 촉매제로 스크롤에 이것저것 입력해보며 애처곡을 부르던 무렵이었다. 실험실의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육중한 철문을 열어 기이익- 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활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제국 황제의 마법 실험실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자였다.
히엘은 방문자가 누구인지 긴장했지만, 스크롤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여상스럽게 물었다.
“히든이니?”
그러자 히엘의 실험실 안으로 한 그림자가 비춰지면서 대답이 돌아왔다.
“히든? 이젠 하다하다 남자까지 안는 거야, 당신?”
허스키하고 섹시한 목소리의 방문객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히엘은 그 여자를 낯설다고 여겼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푸른 눈동자의 전형적 사르제스 미인이었다. 입고 있는 로브 안에 슬쩍 비치는 타이트한 드레스 길이가 매우 짧아 그 허벅지며 속살이 그대로 보였다. 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과거의 여인들 중 미모순대로 열 명 쯤 떠올려보았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여인은 분명 그 열 명안에 속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히엘은 끝내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알 게 뭐야.’
누구인 게 중요한가? 자신은 현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자,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 남편이다. 그러한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한 ‘자각 의무’였다. 그는 냉정해지기로 했다.
“허락도 없이 이곳엔 어떻게 온 거지? 아니, 누구의 도움으로 온 거야?”
그러자 여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디아세라의 도움으로 왔지.”
“디아세라? 그게 누구야?”
“나잖아. 내 이름 모르겠어?”
그제야 히엘은 이 금발의 미녀를 기억해냈다. 디아세라. 6대 황제가 이끌던 사르제스의 마활에서 은퇴했던 마법사이자, 히엘이 마법영상구에 그 모습을 담아두고 소장할 정도로 깊은 육체적 관계를 나누었던 여인이었다.
***
디아세라, 세라는 마법 실험실의 어느 구석에 있는 회전하는 침대에 누워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아, 하아…… 이 회전하는 침대, 여전히 이곳에 두네. 어찌나 그립던지.”
“난 네 몸이 더 그리웠다고.”
히엘은 그녀의 두 다리사이에 자리 잡았다. 애무도 없이 단번에 삽입하는 그의 핏줄 선 분신에 세라의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숨은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는 히엘의 입술에 삼켜졌다. 히엘은 세라의 깊숙한 곳을 지그시 파고들며 재회의 여운을 느꼈고, 세라는 그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황후의 회임소식이 들리던데, 꽤 참고 살았나봐?”
그러자 히엘이 갑자기 허리를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라의 입에서 달뜬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아, 역시 히엘이야! 아, 역시 이만한 물건이 없지.”
“하아, 말도 마. 그동안 얼마나 참고 살았다고. 좀 더 벌려봐.”
“응, 읏!”
오랜만에 욕정이 마음껏 날뛰었다. 금세 히엘의 가슴팍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것이 한 두 방울 세라의 가슴 위로 떨어질 때 쯤 그들은 자세를 바꾸어 짐승처럼 교접했다.
히엘은 세라의 등을 안고서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더욱 침대머리맡으로 몰아갔다. 세라는 쾌감에 겨워하다 고개를 돌려 히엘의 얼굴에 입 맞추었고, 그때 그녀의 엉덩이는 그녀의 교성만큼이나 농염하게 움직여댔다. 히엘은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와 엉덩이의 풍만한 살결을 아프도록 세게 잡았다.
“아, 아파!”
“아픈 거 좋아했잖아?”
“으윽, 아, 왜? 황후는 아읏……, 같이 안 놀아 주는 가봐?”
“하아, 말 마. 그 여자는 완전하게 괴롭히는 쪽이거든.”
“그럼, 읏…… 후궁으로 으응, 아…… 들어갈까? 내가?”
히엘은 대답 대신 더욱 격렬히 움직이기만 했다. 마주친 부분의 소리가 질척해져갔다. 히엘은 절정에 도달해가며 신음을 내질렀고, 세라의 눈빛도 쾌감으로 흐릿해져갔다. 가히 비명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교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아악, 아…… 히엘. 좋아!”
그때였다. 그들의 앞에 드래곤이 나타난 것은.
‘이, 일편단심 맹약이 있었지, 참!’
히엘은 새파랗게 질려 벌써부터 심장을 부여잡았다. 드래곤은 기이하게도 평소에 즐겨 입던 여인의 드레스 차림이 아닌 남성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히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이며 일편단심의 맹약이 깨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 바람기가 왜 안 나타나나 했네. 잘 가시게.]
***
꿈이었다.
하리는 낮잠을 자다가 남편이 외도하는 꿈을 꾸어 경기를 일으키며 깨어났다.
“하아! 죽여 버리세요! 드래곤 님!”
최근 어머니인 에센 부인의 에테세르가 늘 곁에 머물러있어서일까. 그녀는 자신의 발산되지 못한 욕구가 그러한 꿈을 꾸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진정하기로 했다. 꿈은 꿈일 뿐이다. 그녀는 발그레해진 얼굴을 식히려 찬물을 마셨다.
“후우, 진정하자. 맹약도 있는데 폐하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아무렴.”
그녀가 물을 조금씩 삼키며 침소의 두꺼운 벽에다 손을 가져다 댔다. 마력이 없는 황후를 배려하여 마활들이 그녀의 손길만으로도 마법 발동이 가능하게끔 장치해둔 적이 있었다. 곧 벽 너머의 풍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름다운 밤하늘의 풍경이었다.
“예뻐.”
하리는 푸른 달을 보며 악몽에 찌든 기분을 서서히 진정시켰다. 때 마침 침수 시중을 드는 시종이 없었다. 그녀는 상념에 들다 에센 부인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어머니, 어머니의 작품들은 다시 회수했고요. 음, 그리고 다시는 폐하를 때리지 않을 게요. 그리고 전 행복해요. 진짜…… 아주 행복해요. 우리 아이도 두말 할 것 없이 완벽하게 귀엽고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태어날 거예요. 맹세 합니다……, 정말요.”
두서없이 나온 말들은 어떻게 해서든 에센 부인을 안심시켜 가이덴으로 보내버리고자 하는 말이었다. 하리는 갑자기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배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아가야, 할머니 계시니? 응? 느껴지니? 이 엄마는 심층가늠은커녕 마력도 없어서 도무지 모르겠다. 네가 대신 씩씩하고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 라고 말씀드려주렴.”
그 후 그녀는 시중을 들러 온 시종에게 ‘오늘 저녁은 황후궁 침소에서 들겠다’고 이른 뒤, 직접 마활궁으로 향했다.
마활궁엔 히든과 레실 등 실험에 미쳐있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수도 퇴궁 시켜 버리고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고, 황후가 왔다는 시종의 전언에 예를 갖추어 공손히 인사한 뒤, 다시 실험실로 갔다.
하리는 히엘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 문이 열리는 순간, 하리의 눈에 금발 여인이 들어왔다. 히엘이 말했다.
“아, 오셨소. 황후?”
디아세라가 황후에게 말없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하리의 눈빛이 매섭게 히엘에게로 향했다.
‘내가 정말 꿈을 꾼 거니? 네가 정말 바람이 난 거니? 드래곤께서는 뭐하신다니? 채찍 어딨니?’
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황후궁으로 들려 했소만. 갑시다. 아, 그리고…….”
히엘은 고개를 돌려 세라를 보았다.
“세라,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세라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하리의 뇌리에 마법영상구의 음란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어쩐지 이 금발 여인이 처음부터 낯이 익다했다. 역시나 그녀는 히엘이 소장하고 있던 영상 속 그녀였다. 디아세라!
낮잠의 꿈 내용이 무섭게 다가오는 하리였다.
‘무서운 예지몽이잖아!’
어째서 저 여자가 이 마활궁, 황제의 집무실에 황제와 단 둘이 있는 것인가? 불쾌해진 하리는 일단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진정을 하려했다.
“폐하, 자, 잠시 제 궁으로 좀 드시겠습니까?”
“미안하오. 지금 가려고 했소.”
히엘이 출입문으로 향하자, 세라가 황제 가까이에 붙어 애원하듯 말했다.
“정말 너…… 폐하뿐이라니까요!”
하리는 분명 들었다. 감히 제국의 황제에게 ‘너’라고 호칭하려 했던 세라의 목소리를. 폐하뿐이라는 패역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그것도 황후가 빤히 보고 있는 곳에서.
하리는 배를 움켜잡고 휘청거렸다.
‘이, 무슨 미친…… 아가야. 너희 아버지가 지금 뭐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