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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103화 (10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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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가 예쁜 눈을 가늘게 뜨며 제 동생과 아내를 노려보았다. 예전과 같이 이번에도 그가 앉을 흔들의자는 없었다. 그는 자그마한 스툴을 마력을 이용해 이동시켜 앉은 뒤, 신경질 그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핀에게 거는 시비였다.

“넌 대체 사회생활을 우습게 아는 거냐, 뭐냐?”

“왜.”

“너희 대표가 과다 출혈로 곧 죽는데, 여기서 바느질이나 하고 있어?”

일순 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러자 하리가 수다쟁이가 되어 끼어들었다.

“어머! 과다 출혈이라니요? 전에 온 그 까만 머리 아가씨 말씀입니까? 저런…… 어린데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방어막 하나 없이 짐승들한테 덤볐으니, 그렇게 허벅지를 안 물릴 수 있겠어? 과다출혈로 안 죽는 게 더 이상하지.”

“하지만 수혈 받는다 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마력이 그걸 밀어낸대. 자기도 살고 싶지 않은 가봐.”

“어머머! 기사에 보니까 애인이 변심하고 차서 그리 되었다던데……, 누가 그 아가씨를 뻥 차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엄청 못 된 놈인가 보다. 어떻게 그 독한 눈빛의 여자애를 자살하게 만드는 지, 아마 더 독한 놈일 듯, 아휴, 죽일 놈……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여자를 그 지경으로 몰다니…… 모진 놈…… 썩을 놈…….”

히엘은 황후의 다소 거친 단어사용을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큭큭 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동생의 표정을 살폈다. 로리에게 상처를 주어 독한 놈, 매정한 놈, 썩을 놈이 되어버린 핀은 짐짓 자기는 그런 놈이 아니라는 듯 바느질만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늘간격이 띄엄띄엄 넓어졌고, 그 선도 불규칙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수전증이 있는 사람이 바늘을 든 꼴이었다. 동요하는 그 모습이 웃긴 히엘은 핀을 더욱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아, 뭐해? 지금이 바늘 잡을 때냐? 대표가 죽어 가는데 직원이 되어서 그러고 있을 거야? 무슨 이런 건방진 부하직원이 다 있어?”

아이얄 핫 이슈에 나온 로리 관련 기사를 믿지 않았던 핀이었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그 기사를 진실이라 말하고 있었기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 하리, 다음에 봐.”

“으응. 부디 그 썩을 놈 좀 잡아서 핀이 혼내줘!”

핀이 바느질 도구들을 챙겨서 현관문밖으로 나가자, 히엘도 따라 일어섰다. 하리가 히엘을 잡았다.

“어디에 가시려고요?”

“응. 저 녀석 바로 그 여자에게로 이동시켜주려면 좌표 확인도 좀 해야 하고.”

“응. 다녀와요.”

히엘의 진짜 목적은 ‘두 번 다시는 가공간에서 바느질을 하지 말라’고 핀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니이새 둥지로 걸어가는 핀의 뒤를 빠르게 따라 걸어가며, 날 선 소리를 시작했다.

“어지간히 해라? 잘못하다 하리가 바늘을 삼키기라도 하면 어쩔래?”

“지극하신 아내 사랑이군.”

“부러우면 너도 짝을 찾던가. 젤레테스 대공가의 그 여자를 붙여줬더니, 뭐해? 아, 곧 죽을 테니 그것도 무리인가?”

죄책감으로 인해 핀의 걸음은 더욱 빨라져간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섰다.

‘뭐야, 왜 멈추는 거야. 저 녀석.’

히엘은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히엘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로리가 과다 출혈로 다 죽어간다? 방어막 하나 두르지 않고 사냥을 나갔다 죽을 지경이 됐다?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로리는 대공저의 마법사에게 어느 정도 보호막을 두르고 사냥을 나갔었고, 짐승들에게 허벅지를 물리긴 했으나 불구가 될 정도도 아니었으며, 목숨이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엘이 로리의 목숨이 다해간다고 거짓을 말했던 이유는 바로, 홀아비인 핀에게 절박함을 심어주고 싶어서였다.

히엘은 로리와 핀의 관계를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로리를 마력 화산에서 황실 의료원으로 직접 옮겨준 적이 있었고, 그때 그녀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중얼거리던 말로 그들의 관계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야, 핀, 이 나쁜 자식, 네가 그렇게 잘 났냐, 너 없이도 나는 사냥 잘 가, 이젠 끝이다’ 등등의 소리를 듣고서 어찌 핀과 그녀가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 할 수 있으랴. 이미 아이얄에서는 젤레테스 대공의 차녀가 변심한 애인으로 인해 자살 시도를 하여 불구가 되었다고 너도나도 떠들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문병을 하기는커녕 가공간에 와서 바느질만 하는 핀을 보고서 히엘은 절대로 ‘너희 대표 무사하다’ 라고는 말해줄 수 없었다. 그런 심술쟁이이자 개구쟁이가 바로 그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제 형을 바라보는 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져간다. 히엘은 침을 또 한 번 꿀꺽 삼켜야 했다.

‘이 녀석…… 설마 내 거짓말, 눈치 챈 건가?’

그때 핀이 입을 열었다.

“이 소리, 들려?”

“어? 무슨 소리?”

내 거짓말을 눈치 챈 네 놈의 주먹이 우는 소리?

“이 소리 들리느냐고.”

“아, 무슨 소리!”

“쉿.”

정적. 멈춰 선 형제. 더욱 심각해져가는 핀의 표정.

“답답해죽겠네. 대체 뭐가 들린다는 거야?”

히엘은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는 대신, 마력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마력의 존재가 핀에게 장난을 거는 것일 수도 있었기에.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층 가늠을 해보아야 하나? 그 전에 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 우선이리라.

“네 대표가 너 욕하는 소리라도 들리는 거야? 큭큭.”

“형.”

오랜만에 듣는 ‘형’이라는 호칭에 히엘은 동생을 아끼는 형의 분위기로 다정하게 대답했다. “응응?”

“나, 요즘 환청이 들려.”

“그게 무슨 말이야?”

“심층 가늠, 할 수 있지? 좀 둘러봐줘. 전부터 물으려던 건데, 내 주변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있긴 누가 있어?”

“리이라.”

히엘은 장난스럽던 표정을 굳혔다.

“…… 너.”

“꿈에도 자꾸 나오고, 여하튼 그래. 내 생각엔.”

히엘은 동생이 리이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온 무심한 자가, 아내의 유령이 근처에 있는 것 같다며 이렇게 표정을 어둡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리이라와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말이다.

“기다려봐. 아니, 꼭 여기서만 들리는 건 아니지?”

“응. 혼자 있을 때만 들려.”

“둥지로 가자.”

히엘은 최대한 하리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장소에서 심층 가늠을 하고 싶었다.

얼마 후 그들은 니이새 둥지에 자리했다. 핀은 평소답지 않은 불안한 기색으로 초조한 한숨을 쉬고 있었고, 히엘은 짧은 시간동안 마력 정제를 거쳐 심층 가늠을 시작했다.

심층 가늠이란 무엇인가.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 그것보다 상위의 에너지인 영혼, 영혼보다 더욱 상위에 있는 에너지인 인간의 사념인 에테세르를 느끼는 작업이다. 그 심층 가늠이라는 마법이 쓰일 때는 주로 영혼 소멸형이라는 형벌이 행해진 후에, 영혼이 완전히 소멸되었는지 확인할 때였다.

하지만 지금 핀의 주변에 맴도는 정체 모를 소리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히엘은 심층 가늠을 해야 했다.

그를 위해서는 극도의 고요함이 요구된다. 핀은 히엘이 편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아예 둥지 위에 누워서 눈을 감고 숨소리도 죽여주었다. 히엘은 핀의 주변에 감도는 에테세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니이새 둥지, 사람의 인체, 숲, 가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을 뛰어넘어서, 점점 드러나는 그것의 정체.

리이라일까.

아니면…….

얼마 후, 히엘의 입에서 고위 마법사들의 언어인 에테세르어가 나왔다. 그때부터 핀이 눈을 떠 히엘을 살폈다.

표정이 미묘했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때로는 그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손함도 보인다. 또한 반가움, 죄책감, 겸손한 웃음, 등 온갖 기색이 동시에 깃들어있었다.

대체 히엘이 누구의 에테세르와 대화를 하는 건지 핀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정말 리이라의 에테세르인가? 그렇다면 히엘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 없을 것이다.

핀은 의아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사라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히엘은 심층가늠을 끝내고서 핀을 향해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핀이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누구……와 나눈 거야?”

히엘이 대답했다.

“장모님.”

하리의 어머니, 에센 부인인 것이다.

사라락, 사라락, 사라락.

이 순간도 핀은 소리 때문에 괴로웠다. 히엘이 핀에게 물었다.

“가이덴 장례식 알지?”

핀은 더욱 굳은 얼굴이 되었다. 리이라가 가이덴 대주교의 딸이었기에 자연스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히엘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영혼의 광구는 저 하늘, 가이덴(천국)으로 사라진다고들 하잖아.”

“응.”

“거기서 최근에 다시 오셨대. 에테세르로 존재하게 되신 거지. 왜 오셨다고 생각해?”

핀은 일순 죄책감에 휩싸였다. 에센 부인의 딸, 하리를 한때 괴롭혔던 자신이었기에 그 죄책감은 매우 깊고도 쓰라렸다. 히엘은 씁쓸히 웃었다.

“녀석, 찔리나보지? 그저 손주가 보고 싶으신 거야.”

에센 부인은 에테세르로 존재하기 전에는 가이덴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딸이 감금당했던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에센 부인이 히엘에게 건넨 말은 현실적이지 않은 에테세르라는 존재가 하는 말 치고는 꽤나 현실적이었다. 자신의 집에 있던 바느질 작품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만일 팔았다면 하리에게 일러 다시 거둬서 가보로 물려주면 좋겠다, 가이덴 식 태교를 했으면 좋겠다, 딸이 황후로서 품위가 너무 없어 보이는데 황제께서 남편으로서 너무 느슨하게 행동하시는 것 아니냐, 가끔은 그 아이가 폐하를 구타하기도 하던데 그것은 좀 어미로서 불경스럽기 이를 데 없다, 사죄드린다,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손주만 보고 다시 가이덴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딸이든 아들이든 무엇 무엇이 좋겠다, 등의 내용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핀을 원망하는 내용은 없었다.

“아…… 하리의 아이를.”

“응. 그래서인지 오직 하리의 주변에만 맴도셔.”

“…….”

“네가 들리는 이상한 소리의 정체는 아닐 거야. 그 건에 대해서는 마활을 보내서 네 집을 조사하던지 해볼게. 그런데 말이야…… 아직도 소리가 들려? 난 솔직히, 계속 안 들렸는데.”

“들려. 이렇게 형이랑 같이 있어도 들려.”

“티에리아는 들린대?”

“아니.”

“흠. 이봐, 핀.”

“응.”

히엘은 당장 동생을 황의에게 데려가 정신의 문제가 아닌지 묻고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과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라던가, 로리에 대한 죄책감에 스트레스로 그러한 환청을 들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누구나 살면서 그런 환청에 한번쯤 시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동생의 등을 쳤다.

“얼른 네 대표에게나 가.”

그 뒤 히엘은 핀을 로리가 있는 곳으로 재빨리 강제이동 시켰다.

그는 편치 못한 동생의 상태에 가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넌 연애를 해야 한다고. 생각보다 뻔뻔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

***

로리는 맹세코, 눈썹 한 올 만큼도 죽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한 바탕 사냥을 즐기며, 핀라이트라는 나쁜 남자를 깨끗이 지우려했던 것뿐이었다. 단지 그녀는 젤레테스 대공이 고용한 마법사의 방어마법 수준을 너무나 높게 보았고, 단지 마력 화산이라는 장소를 너무나 만만하게 본 것일 뿐이었다. 그러한 신중하지 못한 판단들이 지금과 같은 사태를 낳은 것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벅지가 보기 흉한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병실에선 마담 젤레테스와 젤레테스 대공이, 딸의 앞날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아이얄 최고의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잘 쌓고 있다가 이게 무슨 불상사랍니까? 한 순간에 남자의 변심으로 자살 시도나 하는 의지박약아가 되다니, 이런 현실 난 인정할 수 없어요! 얼마나 저 아이를 더 때려야 이 분이 풀릴까요?”

“허허, 왜 이러시오. 부인! 지금은 체벌이 우선이 아니요. 냉정을 유지하시오!”

“아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이에요? 이제 그딴 소문이 돌아버려 저 애는 어느 집안으로도 시집갈 수 없을 게 뻔한데!”

“아니오. 내게 다 생각이 있소.”

“무슨 생각?”

“항간에 떠도는 기사들이야 다 손을 보면 그만이지. 내 말은 말이오…….”

부모의 대화에는 관심없이 로리는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붕대에 칭칭 감긴 자신의 허벅지를 보았다.

‘세, 섹시해, 난 어쩜 이리 아픈 몸에도 섹시할 수 있을까…….’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핀라이트에 대한 상처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뜻일까. 때 마침 누군가가 병실에 노크를 했다.

“누군가.”

“아가씨의 직원인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사람이 병문안을 왔습니다만.”

하인의 말에 대공은 출입을 허했다.

하지만 로리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그가 꼴도 보기 싫었던 것이다. 핀이 병실에 들어오자 대공 부부는 이 미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핀은 형식적으로나마 로리에게 예를 갖추었다. 대공은 일개 직원에게 알 수 없는 고고한 기운을 느끼고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라이트릭 에센, 맞는가? 신문에서 말하던 그 젊은이가?”

핀과 구면인 마담 젤레테스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여보. 저 젊은이가 레이디 로리의 모델이자, 우리 아이의 직원이자, 우리 아이를 뻥 차버린 그 건방진 남자라고요!”

핀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제 이름이 라이트릭 에센이 맞긴 합니다만.”

대공은 난데없이 호감 가득한 웃음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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