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회 -->
출근하는 핀의 발걸음이 무겁다. 그는 직원들이 그저 사소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부하직원을 상대로 구토기를 사용한 것이 불쾌했고, 대표 로리와 있었던 일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맡은 일이 있기에 이렇게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느지막이 회사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출근해있던 직원들은 모여서 수다에 한창이었다. 핀은 자리에 앉다가 들려오는 대화가 심상치 앉아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누가 그 도도한 대표를 감히 뻥 찬 거지? 설마 저번에 그 구토기를 깨부수며 욕을 했을 때도 실연의 상처 때문에 그랬던 건가?”
“그러게, 그 독한 것이 상처를 다 받고 살줄이야.”
“누군지 몰라도 그 남자는 이제 죄책감 제대로 시달리겠다.”
전후사정을 몰라도 수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핀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대표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러자 여직원들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어머, 에센. 아이얄 핫 이슈 못 보고 온 거야?”
그들이 즐겨보는 아이얄 핫 이슈는 성급하게 나온 거짓 기사, 자극적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황후 하리를 보고 살찐 돼지 마녀라고 표현하여 경고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핀은 그런 것에 눈길을 잘 주지 않았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한 직원이 그의 앞에 아이얄 핫 이슈를 내밀었다.
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신문으로 향했다.
[젤레테스 대공의 차녀 로가드리아가 마력 화산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호위 기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어느 평민 애인의 변심으로 인해 상심한 나머지, 방어막을 두르지도 않고 청괴석 검 하나를 들고 사냥에 나갔다고 하며, 그 결과 산짐승들에게……(중략).]
한 직원이 중얼거렸다.
“방어막을 안 둘렀다는 건, 아무래도 자살시도인 거 같지? 대표 지지배, 그렇게 못 된 성질머리로 살더니 잘 됐다. 다리 불구라니.”
핀은 차분함을 지켰다. 차분함을 지켜야했다.
동요할 것 없었다. 한 때 숱하게 사람들을 죽였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태연히 살아가고 있다. 제게서 매몰한 소리를 들은 그 여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평소답지 않게 구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저딴 신문 기사가 대체 뭐라고…….’
***
서둘러 업무를 끝낸 핀은 남들보다 일찍 퇴근해 궁으로 갔다. 황후와 바느질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만드는 커다란 작품은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하리는 아기 턱받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짙은 파란색이다. 핀은 예전 그녀가 만들었던 아기 신발이 아이보리였었던 걸 기억하고 물어보았다.
“왜 파란색이야? 황의가 벌써부터 성별을 알려주진 못할 텐데.”
“글쎄 폐하께서 자꾸 여자 아이 이름들만 지어놓으시잖아. 난 여러 색깔별로 만들 거야.”
“여자아이라……, 나도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어.”
“왜? 아.”
하리는 핀에게 아들만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핀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물론,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다 예쁘겠지만.”
어쩐지 핀의 표정이 씁쓸해 보인다. 아이를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이유를 하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스레 어색함을 느낀 하리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당시엔 감금을 당한 상태였기에 사연을 몰랐었다. 핀의 아들들이 단 한명만 남고서 모두 죽어버렸고, 황후 리이라의 뱃속에 있던 아이 역시…….
핀은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우고 밝게 말했다.
“근데 하리를 닮아야 해. 그래야 예뻐.”
“응? 무슨 말이야. 일부러 그런 말은…….”
하리는 어쩐지 자신감이 없었다. 마법영상구 게시판에서 ‘남편보다 못생긴 황후’라는 글을 수도 없이 읽은 탓일까. 핀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아냐. 정말…… 예쁠 거야. 널 닮아야 해.”
“폐하께서 더 미모가…… 폐하를 닮으셔야지.”
“글쎄, 솔직히 난 히엘이 예쁜 걸 잘 모르겠어. 어릴 때부터 나를 놀리는 얄미운 형이라는 인상만 받아서 그런가.”
하리의 눈이 커졌다.
“폐하께서 널 놀리셨다고?”
“응. 고작 다섯, 여섯 살 된 어린 동생한테 ‘넌 참 미래가 밝아, 단순무식 칼잡이만큼 편한 게 어디 있겠냐’…… 그런 이야기를 해맑게 웃으며 하는 형이었지.”
“어머! 비꼬기 대마왕이다.”
“나도 그땐 히엘이 얄미웠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아니더라.”
“응, 나중?”
“히엘은 은퇴한 마활들에게 스크롤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재료 수집에 관한 걸 익히려고, 여러 곳을 전전했었거든. 궁에 몇 달, 사가에 몇 달, 그런 식으로 자주 옮겨 다녀야 했었어.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지. 큰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버렸고 황족이니 어떻게든 그 힘을 최대한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히엘의 입장에선 검만 쥐고 살던 내가 부러웠던 거야. 그래서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거겠지.”
히엘은 그러한 사연을 단 한 번도 하리에게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리는 그가 얌전히 궁에서 마법 한 우물만 파온 사람이라 생각했었고, 그저 평민들의 말투를 사용하는 것에 재미 들린 곱게 자란 황자라고만 여겼었다.
“히엘도 나름 힘든 점이 많았을 거야. 그렇게 여러 곳을 다니는 건 피곤한 일이잖아. 게다가 늘 애정에 굶주려있기도 했고. 나한테 아홉 번 까칠하다가 한 번에 몰아서 징그러울 정도로 애정을 막 표현해대는 게 그 사람 성격이니까.”
말수가 적던 핀이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리는 처연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히엘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핀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히엘을 두고 가엾다는 듯 말하는 핀이 사실은 더 가여운 사람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했던가. 언젠가 히엘이 제 동생의 과오를 감싸준다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핀을 용서해주라고. 백 번 미워해도 모자랄 녀석이겠지만 불쌍한 녀석이니 용서해주라고. 마력 성장을 받아 정상적으로 커온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데도 숱하게 사람을 죽여야 했으며,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했던 삶을 살았다. 게다가 언제나 아버지로부터 제왕의 자세에 대한 훈계를 들어와 어딘가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취미 하나를 즐기는 것도 비정상적으로 해야 했고, 그러던 중에 하리에게 그렇게 심한 일을 저질러버렸다. 결코 핀이 나쁜 사람이라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고 히엘은 설명했었다.
결과적으로 잘 되면 다 좋은 거라 했던가. 책에서 그런 말을 들었던 하리는 당시 이미 핀에 대한 원망을 다 털어내고 없었다. 행복한 현재를 두고서 애써 과거 일들을 기억해내 아파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핀에 대한 연민만 느끼고 있었다.
통일에 대한 부담감, 제왕으로 군림해야한다는 압박.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가공간을 만들면서 까지 하던 은밀한 취미들. 만일 그가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차라리 그 편이 핀에겐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리는 생각했다.
그녀는 핀이 이어가는 천 조각들을 살펴보았다. 색채의 나열로 이루어진 추상적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따뜻한 계열의 색에서 자연스럽게 차가운 색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또 어느 부분에는 보색끼리 과감하게 연결하는, 그야말로 내키는 대로 조각을 이어버리는 자유로운 작품이었다. 하리는 웃고 말았다. 맨 처음 바느질을 시작하던 핀을 떠올리면 지금 이 작품은 많은 변화를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예전 핀은 일정한 간격으로만 누빔하고, 정해진 대로만 하려던 습성이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핀은 지금과 같은 제 멋대로의 바느질로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가 그랬었다. 어째서 바느질을 선택했었느냐고 물으니,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바느질이든 무엇이든 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황제는 강제 된 의무였고, 그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 무엇이든 좋았던 것이다. 이제 하리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는 별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바느질을 선택한 이유가, 자신을 깨고 싶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하고.
하리는 아쉬움에 젖은 미소를 짓다 무언가 할 말이 생각났다.
“핀.”
“응.”
“나 변태다.”
차를 마시고 있던 핀은 자칫 찻물을 입 밖으로 뿜을 뻔했다. 갑작스러운 말을 들은 이 상황에 웃어야 할까. 놀란 표정을 해야 할까. 표정이 갈 길을 잃었다. 두 뺨이 붉어지고 있었다. 하리가, 그것도 아이를 가진 여자가 갑작스럽게 ‘변태’라는 단어를 내뱉으니 당황한 것이었다.
“흠, 음. 갑자기 무슨 말이야. 하리?”
“응. 나 변태라고. 폐하를 여기저기 때리고 욕하고 괴롭히면서 좋아하는 그런 변태.”
핀은 정말이지 하리의 의도를 몰랐다.
“네가? 형을…… 욕하고, 때린다고?”
“응.”
“형은 뭐래?”
매 맞는 히엘이라? 핀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리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폐하께서 뭐라 하시는 건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들어봐. 나도 전엔 몰랐었는데, 그게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욕구였어.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커왔거든. 통금 시간 지켜라, 집에는 일찍 와라, 집안일을 도울 수 있는 일을 배워라, 그 말에 따르며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소심한 아이였지. 그런데…….”
핀의 눈에 비친 하리도 그러했다. 겁을 먹고 두려워하며 목소리도 작은 그런 소심한 아가씨.
하지만…… 계속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궁으로 처음 데려왔을 때 어떤 일이 있었던가.
‘숙제가 안 보이네. 제자로서 자세가 틀렸어.’
‘에센. 어떻게 하면 네가 만든 것처럼 그런 걸 만들 수 있느냐, 물었다. 황제로서의 명…….’
‘시끄러! 눈이 있으면 잘 봐. 나처럼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이런 배색 감각으로? 이런 무늬 배치 능력으로? 틀렸어. 이따위 감각으로는 절대 그런 대형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대체 이 끔찍한 색 배치는 뭐야? 가뜩이나 채도 낮은 웜 그레이에 강렬한 형광파랑을? 미친 거 아니야? 연주황바탕에 아이보리색 꽃무늬가 있는데 그걸 배색한다고 쓴 원단이 하필 촘촘한 빨강초록타탄체크? 거기다 재질도 하나는 평직인데 하나는 올이 아주 잘 풀리는 것을? 장난해? 장난 하냐고! 무조건 촘촘히 누비고 많이 해오면 다인 줄 아냐고! 어쩌면 이런 끔찍한 작품을 해올 수 있는 거야!’
‘그렇게 형편없단 말이지, 에센?’
‘그래! 한마디로 너무너무 개판이야!’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던 핀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랬다. 하리의 사나운 기질은 처음부터 그다지 숨겨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우연히 채찍을 본 적이 있었지. 그때 내 안의 폭력적인 기질을 마주했지. 그 기질을 신나게 즐기고 나니까 너무나 속 시원하더라. 솔직히, 폐하께 들켜서는 곤란한 취향이겠지만. 어차피 그 채찍을 가져온 건 폐하이시고. 어라라, 이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닌데. 아무튼…… 억눌려있었던 것이 단번에 풀린다고나 할까. 이 취향을 너한테 말하고 나니까 말이야. 그런데 넌 어때? 내가?”
핀은 채찍이라는 말을 듣고 얼마 전 목격했던 일을 기억해냈다. 하리와 히엘이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서 채찍을 들고 있던 그 날의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붉은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그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난감해하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네가 어떠냐, 라…… 음…… 재미…… 있어.”
그런데 임신한 여자에게 이런 대답해도 돼? 왠지 긴장이 되는 것이다.
“재밌지?”
“응.”
“좀 괴팍하지만 매력 있지?”
자기 자신을 보고 매력 있느냐고 묻는 이 여자. 핀은 이제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큭…… 응.”
그러자 하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핀도 그랬을 거야.”
핀은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나도 너에게 맞으면 네가 가진 매력에 흠뻑 취하게 되는 거냐’는 농담까지 나오려했다.
하리가 말을 이어갔다.
“너도 네 숨겨진 욕구, 네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거에 솔직했다면, 사람들에게 매력 있는 사람으로 남았을 거야. 생각해봐, 우리 제국 황제 폐하께선 바느질이 취미셨대! 얼마나 귀엽겠어?”
“아…….”
핀은 하리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이해를 했다.
“정말 아깝다. 이 귀여운 남자를 나만 볼 수 있다니. 흑흑……. 아니, 애초에 바느질하는 남자 자체가 드문데, 바느질하는 전대 황제폐하라니, 이만큼 재미있는 볼거리가 어디 있겠어? 안 그래?”
악의 없는 하리의 말에 핀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가.”
“응. 그러니까 핀.”
“응.”
“이왕 바늘 잡은 남자 된 김에, 제국 최고의 수공예가가 되어버려!”
그 말은 핀에게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말라, 내키는 대로, 즐기고 싶은 대로 즐겨버리라’는 말처럼 들리고 있었다. 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현관문밖에서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세상에 이런 말썽쟁이 황후가 어디 있는 거야! 그렇게나 가공간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