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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억지였다. 히엘은 억지를 부릴 만큼 딸을 원했다. 그의 조카들은 모두 사내아이들이었고, 형제라고는 돌 같은 홀아비 동생 하나뿐이다. 게다가 황족 전체에 딸아이가 귀한 편이었다. 그러하니 그가 억지를 부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리는 코웃음을 쳤다.
“흥, 사르제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그 누구도 태몽을 꾸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대성할 남자 아이가 확실하다.’ 태후께서도, 폐하 당신께서도, 나도, 핀도, 티에리아도, 황족 그 누구도, 심지어 황궁 가이덴 신관조차도 태몽을 꾸지 않았는데…… 우리 아이는 제국의 빛이 될 남자아이가 확실해요.”
히엘은 누운 채로 귀를 파며 하리의 말을 부정했다.
“그건 하리의 생각일 뿐이야. 어마마마 말씀 들어보니 핀 그 녀석도 태몽이 없었다더라. 그래서 결국 황제에서 잘리고 말았지. 으하하. 대성할 아이는 무슨.”
하리는 히엘을 째려보았다.
“아무튼! 어떻게 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거죠?”
“그야 딸이 아니면…….”
“딸이 아니면?”
“딸이…… 아니면…… 아, 이런…….”
내 자식이 딸이 아닐 수도 있다니! 히엘은 심각한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석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한참 후 그는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듯 울상을 한 채 하리를 올려다보며 울먹였다.
“아들놈을 더 좋아할 거야, 나를 더 좋아할 거야?”
“조회나 나가버려요!”
히엘은 황후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
황제가 참관한 조회는 따분하게도 형식적인 보고만 나왔다. 조회뿐만이 아니었다. 오전 정무도 마찬가지였다. 고관들은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그 만큼 제국은 이렇다 할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때 대륙 정복에 큰 공을 쌓았던 블랙 유니콘 부대가 할 일이 없어 황궁의 잡초를 뽑는데 동원되고 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물론 그만큼 제국민들이 전쟁 위기 없이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도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핀라이트 통치 시절, 억울하게 성력 제거형을 당했던 가이덴 신자들이 황실에다 단체로 항의를 퍼붓곤 했다. 그러나 성력의 근원인 성검이 제거되었기에, 그들의 성력을 다시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황실측은 성력 제거자들에게 가이덴 교회를 지어주는 등의 최소한의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일을 일단락 지었다.
통일된 대륙, 한가하다면 한가하다고 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은 뒤 황제가 된 히엘은 새삼 핀에게 미안함을 다 느낄 지경이었다. 꼭 자신이 황제가 될 필요가 있었던가? 자신이 여전히 마활에만 머물러 있었다 해도, 이 평화는 가능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핀의 독단적인 성향과 무거운 세금 정책, 포로들을 잔인하게 처리한 처사들을 생각하면 히엘의 생각은 안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히엘은 한 때 대륙을 이끌었던 제 동생이 사가에서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종종 마음에 걸리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히엘은 지금 이 순간,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군. 얼른 가서 우리 딸이나 보고 싶은데.’
정식 업무가 끝나는 시간이 아니면 황후궁에 발도 들이지 말라는 황후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활궁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 생겨난 이래 유례없는 잉여의 시간을 맞이한 황제는 장난기가 솟아오르고 말았다. 그는 열심히 실험에 빠져 있는 마활 탑의 이름을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히든.”
히든은 고개를 돌렸다가 무언가에 볼이 찔리고 말았다. 그것은 히엘이 허공에 띄운 필기르의 깃털이었다. 마력 성장으로 다 큰 총각이 된 히든이지만, 그 심통 난 표정만큼은 예전 어린 아이일 때와 같았다. 히엘은 그런 히든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리 마활의 최고 귀염둥이 같으니. 유치해죽겠지? 유치한 황제 폐하 이러고 있지, 지금?”
히든은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정중하게 필기르의 깃털을 치운 뒤, 다시 조용히 실험에 임할 뿐이었다.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
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레실을 찾아갔다. 레실은 히엘이 마활의 탑이었을 때부터 히엘의 조수, 제자를 해온 친근한 자였다. 그는 최근 어떤 스크롤을 개발 중이라, 날이 잔뜩 서있었다. 그렇게 뭔가에 집중해있는 사람을 놀리는 것이 히엘의 취미였다. 히엘은 레실의 정신을 조금 느슨하게 해주기 위해 바지라도 벗겨볼까, 하고 직장 내 성희롱을 계획했다.
레실의 실험실로 걸어가는 히엘의 걸음걸이가 마치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표정 또한 장난기에 가득 차 있었다. 히엘이 출입문을 열려고 손을 뻗는 중에, 갑자기 문이 퍽- 열렸다. 레실이 나오고 있었다. 바닥에 넘어져 이마를 문지르는 황제의 꼴이 우스워 웃음이 나올 만도 하나, 레실은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폐하.”
“이봐, 레실. 그렇게 갑자기 문을 열면 나더러…… 응? 마침 잘 왔다니? 무슨 일이야?”
“제가 스크롤 하나 만들었는데, 같이 실험해보러 가시겠습니까?”
“어딜?”
***
한참 후 그들은 레실이 만든 마력방어 강화 스크롤 서너 장을 가지고 마력 화산으로 이동했다.
두 남자는 모두 알몸을 하고 있었다. 히엘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레실을 탓했다.
“이런 변태 제자 같으니! 왜 꼭 알몸이어야 해? 나 비위 약해서, 네 똥배 보기 힘들다고.”
히엘은 비만인 레실의 몸매에 악평을 거침없이 가했다. 불러가는 아내의 배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이 시기에, 어째서 제자이자 종복이자 직장 부하 ‘사내’의 털이 수북한 똥배를 보고 있어야 하는지!
레실은 황제로부터 수치심을 자극당해도 동요하지 않고 진지했다.
“마력 방어 스크롤 실험이잖습니까. 옷 따위는 무의미합니다. 알몸 그대로, 자연 그대로 맞서야 해요.”
“남들이 보면 몬스터가 득실대는 산에 삼림욕 하러 나온 변태들인 줄 알겠다.”
황제의 칭얼거림 따위는 더 이상 레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레실은 황제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구형의 방어벽을 서서히 허공에 띄웠다. 두 남자는 알몸으로 허공에 붕 띄워졌고, 작은 몬스터들은 그들을 수상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그 짐승들도 변태를 보며 당황해하는 눈빛이었다.
‘내 살다 살다 몬스터들에게 저런 눈빛을 받을 줄이야…….’
히엘은 레실의 실험실에 갔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돌아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멍청한 짓 같아.”
“안 됩니다! 이제부터 충격 실험을 할 예정이란 말입니다!”
“야, 내가 실험용 쥐냐? 실험용 저지능 몬스터들 두고 감히 황제에게 충격 실험을 하라, 마라?”
“아닙니다! 실험은 제가 하고, 폐하께서는 만일에 일어날 사고에 대비해 저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지켜주는 건 네 애인한테나 해달라고 해!”
“애인이나 만들어주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시오!”
“그런 건 스스로 해야지! 나도 일과 연애를 동시에 하느라 얼마나 쏼라쏼라…… 허덕허덕…….”
레실이 듣는 척도 안 하자 히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얌전히 레실의 실험에 응해주기로 했다. 이런 ‘일’이라도 해야 황후궁으로 돌아가서 ‘오늘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힘들었다’고 칭얼거릴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자꾸만 이죽거림이 나왔다.
“이봐, 레실. 거대 독사는 뭐 하냐? 너 같은 변태 안 잡아가고.”
“그러게 말입니다.”
레실 역시 거대 독사가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현재 대륙 곳곳에 세워진 마법 방어벽 덕분에 중형급 이상의 몬스터가 잘 나타나지 않아, 이렇게 준비해 온 마력 방어 강화 스크롤을 실험해보려 해도 적당한 대상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마계로 가지, 이게 무슨…… 아, 암만 생각해봐도 이 알몸은 진짜 오바다, 레실.”
히엘은 레실이 애인도 없고 마법에만 빠져있어 이런 괴상한 실험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비통함을 다 느꼈으나, 레실은 신경질만 부릴 뿐이었다.
“조용 하십쇼!”
레실은 최대한 집중하여 주변의 마력을 가늠해보았다. 그야말로 평화의 시기, 평화의 마력 화산이라, 그 어떤 몬스터들의 마력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약 30분 동안 허공에 붕 뜬 채 거대 독사를 찾아다니기만 했고, 결국에는 미약한 마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곧 놈이 나타나거나, 보일 겁니다.”
“응. 뭐, 그러던가, 말던가. 끽 해봐야 화이트 뱃 한 마리겠지.”
히엘은 그야말로 지루해서 기절하기 일보직전, 다시는 레실과 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레실이 크게 외쳤다.
“앗, 희미하게 감지됩니다! 거대 독사는 아니고, 붉은 여우 정도는 될 듯합니다! 폐하! 저 그럼, 충격파 실험 해보겠습니다! 이대로 쾅 부딪쳐보고 오겠습니다! 만에 하나 대비해 저를…….”
“아, 알았어. 지켜줄게. 걱정 마.”
레실은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자신을 감싼 방어벽과 함께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히엘은 그런 레실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쟤는 분명 어렸을 적에 따돌림을 당한 게 분명해. 너무 바보 같아.”
한참 후, 레실은 충격파 실험대신 사색이 되어 나타났다. 히엘은 심드렁하게 귀를 파며 중얼거렸다.
“왜? 독사가 네 똥배에 구토라도 하더냐?”
“폐하…… 글쎄, 그게 말입니다.”
“무슨 일인데?”
“한 여자가 쓰러져있습니다!”
쓰러진 여자를 외면하는 것은 남자로서 아니, 아니, 황제로서 그냥 둘 수 없는 일 아닌가. 히엘은 재빨리 레실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붉은 여우들의 털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의식을 잃은 채 다리에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있었다.
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