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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태연한 말투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녀의 가슴은 거세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황제…… 폐하, 일 때부터 말이야. 너를 좋아했었어. 넌 어떻지? 날 어떻게 생각하지?”
차분히 듣고 있던 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대표님께서 한 다섯 살만 나이가 더 많았다면 황후로 삼았을지도 모르겠군요.”
“풉!”
놀란 로리는 마시고 있던 술을 입 밖으로 뿜어버렸다. 세상에, 전 황제가 지금 자신을 보고 다섯 살만 나이가 많았어도 황후로 삼았을 뻔 했다는 말을 하다니!
핀은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가슴을 닦으며 붉은 얼굴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뭐? 황후로 삼을 뻔 했다고? 이래서야 유혹을 하려다 역으로 유혹당한 셈이 아닌가.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이대로 저 유리창 밖으로 뛰어나가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다. 그러한 생각과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다가 로리는 확인을 받듯 되물어보았다.
“내가…… 내가 그렇게 아름다워?”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정말? ‘네’가 봐도 그래?”
그 질문에는 깊은 의도가 있었다. 로리는 핀을 남자, 그것도 제국의 공주라 불리는 용모를 가진 히엘과 키스한 게이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핀은 낯빛하나 변치 않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까? 남자인 이상, 장님이 아니라면, 이 수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로 대표님을 뽑을 테죠.”
로리의 가슴은 이제 터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녀는 강철 검이 게이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바이일지도? 뭐든 좋아! 저 남자가 날 더러 아름답다고 하는 걸, 뭐!’
그녀는 가슴을 닦던 손수건을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핀의 정체를 몰랐던 그때처럼 도도하게 명령해보았다.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최후의 유혹의 한수라 할 수 있었다.
“술에도, 발이 조금 흘렀어.”
“……?”
“아, 아니. 발에도, 술이 조금 흘렀어.”
발을 닦아달라는 말이었다.
‘이런 망할 나 자신…… 너 정신 안 차릴래? 지금 마법영상구에 나오는 싸구려 희극 찍어? 응? 정신없어? 이래가지고 애써 유혹한 게 다 헛것이 될 지도, 으으, 미친 내 자신…….’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말이 잘못 나오고 만 것이다.
그녀는 가슴골이 팍 팬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발을 닦으려면 몸을 굽혀야 했다. 상대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 레이디에게 ‘저 구석에서 곱게 발 닦고 오시면 되잖습니까’ 라고 대꾸하지는 않을 거란 계산이었다.
핀은 손수건을 받아들고서, 로리를 지그시 보았다. 표정이 미묘하다.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은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입매는 웃고 있다. 비웃음인가? 아니, 아니다. 묘하게 위험한 짐승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인지도. 로리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드디어 핀이 손수건을 들고 로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그녀의 구두를 직접 벗겼다. 스타킹이 술에 조금 젖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과감히 벗겨버렸다.
로리는 짜릿해 죽을 것 같았다.
핀이 그녀의 다리를 빤히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응?”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그런 미모 말고, 대표님의 또 다른 매력 말입니다.”
로리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단지 아름다움만 가졌다면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지요.”
“……?”
핀의 손이 그녀의 발등을 천천히, 부드럽게 닦았다. 단지 그러한 접촉만으로도 로리는 온 몸이 뜨거워 미칠 것만 같았다.
“대표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장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슨 장점?”
“이토록 속이 빤하게 보이시다니…….”
핀은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 묻은 술도 꼼꼼히 닦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의뭉스러운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순진하시지요. 지금 절 유혹하는 모습도 꽤나 귀여우십니다. 그리고…….”
그는 손수건을 그녀의 발등으로부터 떼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대표님은 시키는 건 뭐든 다 잘하시잖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귀찮아서 떼 내려고 하는 줄도 모르고…… 다, 열심히 해주셨지요. 솔직히 처음에는 너무 무례하고 성가셔서 어떻게 해야 안 볼 수 있을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반쯤 불구로 만드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 위험한 곳에 사냥을 가자고 권하기도 했잖습니까. 하지만 그날 당신은 생각보다 너무…… 사냥을 즐기셨지요. 그래서 불구로 만드는 것은 심하다 싶더군요. 아, 저번에는 세드릭 간호를 부탁한다고 했더니 청소까지 하셨다면서요? 정말이지, 그렇게나 사람 말을 잘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속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예쁘기까지 하니, 당신 정도면 전 황제라는 자의 아내로 최고였겠지요.”
생각지도 못한 비참함, 모멸감이 로리를 급습했다. 그녀는 표정하나 꿈쩍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시야에 흐릿하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핀은 독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퍽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요. 지금처럼 그런 천박한 차림으로 노골적인 수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궁에 살기에는 좀 곤란한 타입이겠지요.”
로리는 끝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는 술잔을 들어 핀의 얼굴에 술을 부어버렸다. 핀은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죠. 이게 원래 당신 성격이겠죠. 이런 성격으로 그동안 어떻게 제가 시키는 걸 그렇게 잘 해 오셨는지.”
“닥쳐!”
로리는 이제 정말 끝이라 생각했다. 이런 사악한 남자를 ‘구토기’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이 남자의 정체가 모두에게 밝혀지든지 말든지 내버려두어야 했다고, 깊은 후회를 했다.
“너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마!”
“노력해보겠습니다. 저도 그런 성가신 회사 그만 나가고 싶습니다만…… 황명이라서 말입니다.”
로리는 화가 끝까지 난 나머지 그에게 다가가 가방을 던졌다. 이제 그녀에게 제국의 핏빛 강철 검에 대한 어려움 따위는 사라져버렸다.
“황명? 황명 좋아하시네! 너같이 건방진 녀석한테 그딴 게 무슨 의미야? 그렇게 날 얼간이 만들고 싶으면 진작 죽이지 그랬어? 딴에는 제 자존심 안 꺾어주려고 시키는 대로 다 한 건지도 모르고. 정말이지 오해 하지…….”
“제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그동안 저희 집에 그렇게나 자주 찾아오신 겁니까?”
“……!”
“다음부터는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리고…….”
자리에 않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핀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뭔가 반박할 말을 생각하던 로리는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쓰는 그 향수, 정말 역하기 짝이 없군요.”
로리는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뭔가 이상하다. 자신이 몸에 둘렀던 로가드리아 향수가 마법으로 지워져있었다. 실내에 감도는 향이라고는 쓴 술의 향뿐이었다. 핀이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놀라셨습니까? 그런 지겨운 향기 쯤 지우는 거야 저도 할 줄 압니다.”
더욱 내려갈 곳 없는 비참함에 그녀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핀은 아직도 모자란 지 최후의 비수를 꽂고 말았다.
“정말이지 그런 걸 왜 몸에 뿌리고 다니는지. 그딴 알량한 수법으로 나한테 안기기라도 바라고 있었나?”
“흑……!”
로리는 결국 울음소리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 가슴이 설렜던 남자에게 듣는 잔인한 말들을 감당해낼 힘이 더 이상은 없다. 그녀는 곧바로 그곳을 나갔고, 혼자 남은 핀은 소파에 등을 누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곧 가을이 온다. 차가워진 바람이 열린 유리문으로 솔솔 들어왔다.
사라락, 사락, 사라라락…….
이상하다. 분명 사방에 커튼이 없는데도 핀의 귀에 연신 부드러운 천이 쓸리고 맞닿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꼭 이렇게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이젠 이러한 소리에 익숙해지는 것만 같아, 핀은 황당한 웃음까지 나왔다.
언제부터였던가. 분명 하리에게 토마토 스프를 주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 때부터 들리기 시작한 소리였다. 어째서 환청을 겪는지 자신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 사라락 거리는 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일부러 괴롭히기 위해 이러한 짓을 한다면, 그들은 아마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소멸형 당하지 않았던 자들의 영혼이리라.
죄의 나날 속에 수많은 시체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러다가 딱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부른 이름은….
“리이라, 그만 둬.”
꿈속에서도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단 한 사람. 황후의 이름.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유령 혹은 사념 위력체 에테세르로 존재해 곁에 이 주위에 머물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라락, 사라락, 사라락…….
환청에서 벗어나고픈 핀은 서둘러 그곳을 나갔다. 집 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쯤 걸릴 것이다. 그는 밤길을 걷기로 했다.
거리에선 작은 축제가 있는지 떠들썩했다. 다행히 그는 행인들 틈에 섞여 자신을 괴롭히는 환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걷는 내내, 리이라에 대한 불편함을 떨칠 수 없었다. 이미 로리와 함께 있을 때부터, 리이라의 향기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로리에게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들을 한 것도 그 향기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복잡한 거리를 걸으면서 리이라를 원망하고, 지워가며, 괴로워했다.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이다. 아이를 가진 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그녀가 나쁜 사람이다. 그녀라면, 그 소리가 그녀라면……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에게까지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집 앞에 선 그가 한참이나 자신의 눈을 닦아냈다.
문을 열어주는 세드릭의 안색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창백했다. 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아들을 걱정하는 말을 했다.
“몸이 안 좋아?”
세드릭은 몸이 안 좋다기보다 단지 마법영상구로 야릇한 영상을 너무 많이 감상한 것뿐이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생각보다 일찍 귀가해서 안심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정말 업무 관련 문제로 외출을 하신 거구나! 로리 누나와는 아무 일도 없는 거였어!’
“제 몸은 괜찮아요. 주무세요.”
“잠깐, 티에리아.”
“네?”
“이번에 회사 쉬는 날, 거기가자.”
“거기라뇨?”
“네 형들 보러.”
세드릭은 놀랐다. 아버지가 다른 자식들을 챙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소년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언제나 소년에게만 다정할 뿐, 죽은 다른 아들들의 기일은 챙기지 않는 무정한 사람이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을 때도 있었지만, 어쩌면 아버지 역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이 아파 꺼내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줄곧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내왔다.
어찌 됐든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황족 묘소에 가자고 하는 것은 처음이라, 소년은 기분이 좋아 밝게 웃었다.
“알겠어요. 가요.”
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테이블에 두었던 뭔가가 보이지 않아 세드릭에게 물어보았다.
“…… 근데 여기 마법 영상구 어디 갔어?”
세드릭은 말없이 방에 가서 그것을 가져가 테이블에 올려두고,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
역대 사르제스 황제 중 황후궁 침소에서 가장 빈번히 밤을 지내는 황제는 8대 히에라지엘 황제로 남을 것이다. 전 황제 핀라이트처럼 전쟁에 나간다고 궁을 비울 일도 없을뿐더러 드래곤에게 황후에 대한 일편단심의 맹약을 하여 후궁 하나 두지 ‘못’ 하는 사연으로 그는 언제나 하리의 궁에서 밤을 보냈다. 딱히 그런 이유들이 아니더라도 애처가 황제에게 황후궁은 궁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장소라 할 수 있으리라.
정작 황제의 그러한 아내 사랑에 가장 심려가 깊은 사람은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여자, 황후였다.
‘이 발정 난 수컷 때문에 사르제스가 망하는 거 아니야?’
하리는 잠들어 있는 남편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마법사 남편은 워터링 마법을 매일 같이 임신한 아내의 몸에 둘러 정성스레 목욕을 해주었다. 전생에 목욕관리사이기라도 했는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그 성실함에, 하리는 이제 좀 무섭기 시작했다. 거기다 전에는 뭐라고 했던가. 아이가 좋으냐, 자기가 좋으냐는 질문까지 했다. 유치하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정말이지 심각하게 철딱서니 없는 질문이었다. 태어날 아기를 두고 질투를 하다니, 제 정신인가? 그녀는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남편의 제 본분을 일깨워주기 위해 어깨를 툭툭 쳤다.
“조회 나가셔야지요. 요즘 자주 지각하십니다, 응?”
“응응…… 수리는 어때?”
“응?”
“샤일로는 어때?”
“응?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하퍼도 괜찮겠지…….”
히엘은 잠꼬대로 여자 아이의 이름을 줄줄 말해댔다. 하리는 그 이름들이 히엘과 전에 어울리던 여자들의 이름인 줄 알고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글쎄요, ‘세라’가 가장 좋을 것 같은데요? 드래고니아도 괜찮고.”
“그것도 괜찮겠지…….”
“일어나지 못해!”
갑자기 하리가 소리를 빽 지르자, 히엘은 벌떡 일어났다.
“응, 왜? 무슨 일이야?”
“수리, 샤일로, 하퍼가 대체 누구야!”
“아…….”
히엘은 웃으며 다시 베개에 머리를 뉘이고 짧게 대답했다.
“우리 아기 이름.”
“전부 다 여자 이름이잖아! 우리 아기가 딸인지 아들인지 히엘이 어떻게 알아요!”
히엘은 씩 웃으며 확신했다.
“절대로 딸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