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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핀은 휴가가 끝났기에 레이디 로리로 부지런히 출근했다. 전과 달리 로리는 사냥을 가자는 말도, 핀을 의식하는 행동들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귀찮게 하지 않자 회사 생활도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하리의 임신으로 핀은 이레에 한번만 가공간에 들렀다.
어느 날 오후 가공간 속 언덕 집. 테이블 위에서 핀이 만드는 커다란 작품 하나와 하리가 만드는 아기 신발 하나가 열심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노랗고 상큼한 맛의 차가운 음료 두 잔이 올려져있고, 말린 과일들도 여러 개 있었다. 그들이 바느질을 하면서 먹는 간식들이었는데, 손을 대는 사람은 거의 핀뿐이었다. 오랜 시간 바느질에 집중하던 핀이 마법영상구에서 흘러나오는 희극이 끝나자 그것을 꺼버리고 기지개를 폈다. 하리가 그 모습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자꾸 보니까, 히엘을 많이 닮았어.”
새로이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 탓일까. 핀은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조금 짙은 색이라서, 걱정했었어.”
“누가 핀을 알아볼까봐?”
“응.”
“그냥 닮은 사람이라고만 생각들 할 거야. 그때랑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나 말이지. 누군가 날 알아보면 둘러댈 농담까지 많이 생각해뒀다.”
“정말? 뭔데?”
“안 그래도 닮아서 풍자 배우나 될 생각이에요, 라던가 그런 것들.”
“흐하하. 농담 많이 늘었네.”
웃고 있는 하리의 얼굴이 어딘가 어설프다. 핀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현재 황도 아이얄은 황후의 임신 소식으로 떠들썩하다. 황태자가 나올지 황녀가 나올지 예상하며 도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얼마나 많은 마력치를 가지고 태어날지 그 기준을 정해 복권을 만든 자들도 있었다. 황손의 무사탄생을 비느라 모든 신단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하리는 행복하지 못했다. 말린 과일을 우물거리는 하리의 표정이 너무나 어둡다. 바느질을 시작하기 전부터 묘하게 우울해보이긴 했었다. 핀은 바느질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몸이 안 좋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가서 쉬어.”
“아냐. 몸은 괜찮아.”
“무슨 고민 있어?”
“고민은 아니고…….”
“말해봐.”
하리는 한참 망설이다 말했다.
“요즘 히엘이 이상해.”
“응? 히엘이 왜?”
“그날 이후로 황후궁에 들르지 않아.”
“그날 이라니?”
“처음…… 핀이 임신한 거 아니냐고 물었던 날 말이야.”
“흠.”
“뭐 바쁜 거야 알아. 나도 여기저기 참석해서 뭔가 한다고 황후궁을 자주 비우긴 했지만. 그러니까, 보통 임신을 하면 음…… 여자들은 기대하는 게 있잖아. 어, 그러니까 적어도 다정한 한 마디 뭐 그런 거, 핀은 아이를 가져봤으니 알 거 아냐.”
아이를 많이 가져보긴 했으나, 그러한 꼼꼼한 것들은 핀에겐 낯선 일들이었다. 아내의 회임 소식을 축하할 겨를도 없이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의 핀은 다르다. 임신한 여자의 기분 같은 것을 잘 알지는 못해도,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어렴풋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리가 히엘에게서 외면 받는 것이 싫었다.
잘 살아 보이겠다고 한 사람이 히엘 아니었던가.
“네가 먼저 히엘을 찾긴 해봤어?”
“아니.”
핀은 농담조로 말했다.
“예전에 내가 말했잖아. 히엘 잘 잡으라고. 잠시도 혼자 둬선 안 돼. 바람둥이라고.”
“진짜? 어, 어떻게 하지? 드래곤이랑 바람피는 거 진짠가? 어흐흑…….”
드래곤? 그건 무슨 말이지? 어쨌든 그렇다고 울기까지……. 생각지도 못한 하리의 반응에 핀은 자신의 농담을 책망했다.
“하리, 농담이잖아. 갑자기 드래곤은 왜…… 아무튼, 뭐 일로 바쁘긴 할 테니까 내버려 두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먼저 마활궁에도 가보고 해봐. 히엘이 보기와는 다르게 좀.”
“좀……?”
핀은 어릴 적부터 겪었던 형의 버릇들을 떠올렸다. 언제나 속에 든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동생을 능청스럽게 놀리며 낄낄대던 성격을 가진 히엘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상처받았을 때에는 제 본심을 숨기는 기질이 있었다.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다고 선황에게서 쓴 소리를 들었을 때라던가, 난잡한 사생활 문제로 태후에게 한바탕 크게 혼나던 때에도 히엘은 며칠씩 제 궁에만 칩거하며 모든 황실 행사에 불참을 하곤 했었다. 이렇게 하리가 임신을 했음에도 황후궁에 들르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히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히엘의 그러한 버릇을 사실대로 말하면 하리가 상처받을지도 몰랐기에 핀은 최대한 둘러가며 말했다.
“너무 기쁘면, 사람을 낯설게 대하는 그런 버릇이 있어.”
뭔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뱉어버린 후다. 핀은 재빨리 바느질 도구를 정리하고서 일어섰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아이에게도 안 좋고. 밝은 생각만 해야지. 갈게.”
“잘 가.”
핀은 언덕 집을 나서자마자, 휴대하고 다니는 필기르의 깃털에 마법어를 날리고 있었다. 히엘에게 보내는 말이었다.
[어디 있어? 나 이동 좀 시켜봐. 만나서 할 말이 있어.]
핀은 그대로 마활궁, 황제의 집무실에 이동되었다. 이동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히엘의 마력이 넉넉한 상태라는 뜻이다. 핀은 화가 났다. 마력이 넉넉한 만큼, 마활 일이 쌓여있지 않다는 뜻 아닌가. 얼마든지 하리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넘쳐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내를 방치하고 있는 것에 신경질이 나고 있었다. 핀은 바느질 가방을 탁자에 던져버리고 히엘에게 날 선 소리를 했다.
“대체 왜 그러는데?”
“뭘?”
“시치미 뗄 거야?”
“무슨 말이야?”
“정말 몰라서 물어?”
핀이 들고 온 바느질 바구니라던가, 하는 말로 얼핏 추측이 된 히엘은 별거 아니란 듯 미소를 머금었다.
“하리가 뭐라 그러던?”
“누가 그랬는지가 중요해? 왜 황후궁에는 들르지 않는 건데?”
“그 이유를 내가 너한테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냐?”
“어.”
핀은 나오는 대답에 따라서 형을 팰 준비도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나 히엘은 딴 소리를 했다.
“그 교수 말이지. 점령지 출신 고아들을 4명이나 데리고 살더라. 입양한 애들에게도 그 영상을 보이고 싶었다나, 뭐라나, 뭐 그런 교육의 차원이었나 봐. 그 말로 다 믿는 건 아니라서 사람을 시켜 감시하고는 있지만…….”
“히엘!”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핀을 보고, 히엘이 조금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너, 우리 일에 그렇게 참견하는 거 아니야.”
“그럼 하리 표정이나 좀 어떻게 바꿔보란 말이야!”
“어련하시겠어. 제일 큰 상처를 준 사람이 본인이니, 신경이 쓰일 만도 하겠지.”
아주 오랜만에 나오는 히엘의 빈정거림이었다. 핀은 화가 끝까지 나서 히엘의 멱살을 쥐러 다가왔지만, 그 전에 히엘이 먼저 마력을 써서 핀은 소파에 곱게 앉히고 있었다.
“으윽!”
“이봐, 라이트릭 에센 씨. 여전히 귀엽긴 한데…… 걱정 마. 나도 길게 이러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우린 알아서 잘 살 거라고. 나, 참. 패악녀랑 성격개조 겸 연애나 하라고 붙여줬더니 대체 뭐하는 거야? 나한테 이렇게 따지러 올 시간이나 있…….”
“닥쳐!”
“아무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다음에 보자.”
히엘은 곧바로 핀을 그의 집으로 이동시켜버렸다.
업무실에 혼자 남은 그는 의자의 등에 고개를 최대한 뒤로 빼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엽궐련의 생각이 간절하게 났지만, 금연 중이니 필 수 없다. 정확히 하리가 황의를 찾아갔던 날부터, 그는 깔끔하게 금연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참 천장을 보던 그는, 마치 하리에게 하는 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그래서 그렇다고 했으면 좋았잖아, 이게 뭐야.”
어떤 상황이었던가. ‘주인’ 자리를 돌려주지 않는다고 유치한 화풀이를 하기 위해, 모든 업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버리고 황후궁으로 갔었다. 임신해서 살이 찐 아내에게 ‘뒤룩뒤룩’이라는 단어나 쓰고, 원하는 것을 쥐지 못해 화가 난 아이처럼 옷을 벗어버리고 달려들기까지 했었다. 하리가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처음으로 말했을 그 때에도, 단지 그녀가 ‘노예’ 자리를 하지 않으려고 둘러대는 핑계인 줄 알고 있기만 했다.
설마하니, 피임 마법을 파훼해버린 즉시 임신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발가벗고 발정난 개처럼 굴고 있을 때, 임신 소식을 듣게 되다니…….
후계자에 대한 기대가 누구보다 높았고 후계자 소식도 고대해왔다. 그랬기에 기쁜 소식을 그러한 상황에서 듣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도 하리의 눈빛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 성가심, 귀찮음, 한심함 그 모든 것을 담아 자신을 보던 그 표정.
자괴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인님 놀이’ 못하는 이유를 처음부터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던 하리에게도 조금 원망스러운 감정이 생겼다.
그 외에도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같은 심란한 마음 때문에 황후궁에 가는 것을 하루 이틀 미루던 것이 무려 열흘이나 지나 버렸다.
핀까지 찾아와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니 히엘은 조금 조급해졌다. 애당초, 핀이 누구였던가. 자신에게 핀이란, 하리에 대한 흑심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하리의 손목에 이중성력을 걸어버린 성검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가 바로 핀이었다. 도무지 왜 사내 녀석이 바느질 따위를 하러 가공간에 들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핀이 가진 작품에 대한 열망을 알 리 없는 그는 핀과 하리가 함께 바느질 수업을 하는 것이 그리 순수하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 놈의 자식이 하리에게 미련이 남아 있으니 바느질을 핑계로 오는 것은 아닐까, 혼인식 전에는 더블 웨딩링 쿠션도 주더만? 그냥 웨딩링 쿠션도 아니고 더블 웨딩링 쿠션은 뭐야? 두 번 결혼하라는 뜻 아니야? 등등의 속 좁은 의심으로, 그렇지 않아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핀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커지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중에 방금 핀이 찾아와서는 하리에 대한 표정을 운운하며 쓴 소리를 했다. 히엘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핀을 붉은 지붕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미 그의 자존심은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자존심보다도 더 큰 문제.
‘보고 싶어, 젠장, 오늘로 며칠 째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치기 일보 직전인 상태인 것이다. 도련님이랑 남편 흉이나 보냐고 따지고 싶기도 하고, 그 예쁘게 뒤룩뒤룩 찐 뱃살을 만지며 내가 아빠라고 인사도 하고 싶었다. 하리가 용서해줄까? 열흘이나 넘게 오지 않았는데? 하지만 고민해봐야 시간만 흘러갈 뿐.
결국 그는 자신이 먼저 황후궁으로 향하기로 했다.
황후궁의 침소 바깥에서는 서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히엘은 가만히 귀 기울여 서음의 내용에 집중했다. 오십 년 전 동쪽을 쓸어버린 드래곤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하리가 펼쳐놓은 책은 대륙의 역사서였다. 그녀 나름의 태교인 것이다. 하필이면 폭력은 좋지 않다는 대목이 흘러나오는 중에서도 드래곤이 부린 난동을 고발하는 내용이라, 히엘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폭력을 사랑하시던 그 ‘주인님’께서 태교 책으로 선택한 책이라 생각하니, 그냥 무조건 재미있었다. 웃다보니 그동안의 복잡한 기분도 어느 정도 날아가 버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하리.”
이름을 부르자, 아기 신발을 열심히 꿰매고 있던 하리가 뒤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밝은 그녀의 표정에 히엘은 조금 놀랐다. 왜 이제야 왔냐고, 미워죽겠다고 노려보거나 울 줄 알았다. 심지어는 채찍을 맞을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만들고 있던 신발만 흔들어 보이며 눈인사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리는 정말 천사 같은 여자야…….’
하지만 그런 밝은 인사를 하는 그녀의 속내를, 히엘은 절대 모르리라…….
‘흥, 드디어 오는군. 다루기 힘든 수컷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