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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95화 (9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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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은 지금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이유인 즉 오늘부터 착실한 노예, 야릇한 노예가 되어주기로 했던 황후가 노예플레이를 중단하기로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실컷 ‘주인님’ 역할만 즐기고 ‘노예’ 역할은 거부한 채 침대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하리의 모습이 너무나 야속하다. 히엘은 까칠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광녀가 이리도 비겁한지 몰랐어. 아무리 내가 네 말에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나 원래 이렇게 당하고만 있는 성격은 안 된다고. 알아? 듣고 있어? 이건 공정하지 못해. 이런 건 상상도 못했어. 이런 치사한 여자인 줄 알았다면, 그때 가공간에서 처음에 뽀뽀하려고도 안 했을 거야. 듣고 있냐고, 어이, 이 나쁜 여자!”

하리는 대답대신 푹신한 엔젤리카 깃털 이불 속에 온 몸을 더욱 깊이 파묻었다. 몽롱한 잠결에 들리는 히엘의 투정이 귀엽게 느껴졌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확실한 임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황의를 부르지 않았다. 황의가 알면, 황실의 모든 자들이 알고,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제일 먼저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전에 장난기가 살짝 도져 이제 ‘주인님 놀이’를 못하겠다고 선언을 해버린 것이었다.

“아아, 졸려요. 저리가.”

“저리가? 지금 말 다했어? 어?”

“더 자야 돼…….”

“그렇게 맨날 잠만 자니까 뒤룩뒤룩 살만 찌잖아. 응? 궁에 온 뒤로 예전 사이즈 속옷이 안 들어가지? 내가 다 안다고. 척 보면 다 알거든.”

“무슨 소리예요? 아직도 그때 속옷 들어가거든요? 저리가…….”

“아, 진짜, 안 일어날 거야? 어? 뚱녀!”

도저히 참지 못한 히엘은 이불을 홱 걷어버리고 그녀의 뱃살을 꼬집으며 외쳤다.

“이런데 무슨 속옷이 들어간다는 거야, 응? 입고 있지도 않네!”

“앗! 만지지 말아요.”

하리가 다시 이불을 덮으려 하자, 히엘은 아예 이불을 들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하리는 졸음이 어린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하으…… 왜 그러십니까, 폐하…… 피곤합니다.”

“더 피곤하게 해줄게.”

히엘은 자신의 제복을 벗어젖혔다. 한 달간의 ‘주인님’ 자리를 보상받지 못한다면, ‘주인님’의 기세로 하리를 괴롭히면 그만이었다. 아침 햇살에 환히 드러난 히엘의 나신, 그 분신이 그의 기분처럼 성나있었다. 그는 그대로 하리의 품안으로 파고들어갔다. 하리의 침의를 벗겨버리고, 급하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결국 하리가 짜증을 내고 말았다. 사실, 짜증이라기보다는 숨겨진 ‘주인님’ 근성이라 봐야 했다.

“아, 놔 진짜! 이걸 확 그냥!”

하리의 ‘주인님’ 역할에 익숙해진 히엘은 그 말이 그다지 놀랍게 들리지도 않았다. 도리어 눈을 크게 뜨며 따질 뿐이었다.

“허? 화냈어,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내야 하는 지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거야?”

하리는 커다란 초록 눈동자를 굴리며 남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남편의 화난 표정이 심상치 않다. 예쁘게 생긴 눈이 이렇게 날카롭게 보일 수가 있었던가. 미간에 팬 주름도 낯설었다. 하지만 하리는 그런 점이 웃겼다. 또한 서글펐다. 조회에 나가야 할 시간임에도 이렇게 와서 색사를 보채는 것, 그만큼 색사에 대한 집착이 느껴져 걱정스러웠다.

‘우리 아기가 배울까봐 걱정되네, 이를 어째.’

그녀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나, 아이 가진 것 같아요. 그러니 이제 그런 거 안 돼.”

그 말을 들은 히엘은 피식 웃었다.

“웃기지마. 내가 건드리는 게 귀찮아서 그런 거잖아.”

“아냐, 진짜야. 아니, 진짜래도, 아, 읏…….”

“가만있어, 어차피 진짜라도 상관없잖아.”

가슴을 살짝 깨물며 그러한 말을 한다. 물론, 그의 장난기로 보아 농담일 것이다. 하지만 하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남편을 내심 바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차분하고 진지하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했다.

“아이 가진 것 확실해요. 분명하다고요.”

히엘은 애무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리를 보았다. 서로가 말없이 얼굴만 보는 정적의 시간. 하리의 얼굴 표정에 화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히엘은 침대에서 나와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하리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니까 폐하, 제가…….”

“황의 불러.”

“네?”

“부르라고. 난 조회에 갈게.”

싸늘한 반응은 하리를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돌아서서 침소를 나가는 히엘의 얼굴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황의는 같이 부르려 했는데…….’

그녀는 그의 화난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

핀은 라브의 방에 있었다. 물론 핀은 금세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라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식품들이 상하면 안 되겠지?’라고 말하며 핀이 들고 온 장바구니 주변으로 무려 아홉 개의 냉열석을 둘러놓았다. 덕분에 식재료들이 상할 일은 없겠지만, 핀은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하며 난감해 했다.

냉열석이 많아서인지 라브의 방은 그다지 덥지 않았다. 핀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고, 라브는 염색약을 섞고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용기가 아닌, 파렛트 위에서 붓으로 섞고 있었다. 마치 화가와 같은 모습이었다.

“뭐해? 얼른 여기 앉아봐. 염색 해줄 테니.”

핀은 ‘필요 없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지난번 라브의 머리를 붉게 물들인 것에 대한 복수로, 이번엔 핀의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 위기에 처해있었다. 정말이지 라브가 귀족이건 뭐건 다 엎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얼른 오라고 했다.”

결국 그의 말을 이기지 못한 핀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라브는 그의 머리맡에 앉아 머리카락 구석구석 염색약이 묻은 붓을 휘둘렀다.

“넌 금발이니, 나처럼 분홍색보단 예쁜 주홍색으로 들 거야.”

핀은 화가 날수록 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하며 자신의 짜증을 잠재웠다.

“저도 그랬으면 합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럴 리가요.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거짓말 솜씨가 제법이야.”

라브는 지금 기분이 꽤 좋은 상태로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는 ‘라이트릭 에센’이 못이기는 척 하면서 이렇게 따라 와준 것도 좋았고, 붉은색 염색약을 거절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너, 이런 짧은 머리보다 긴 머리가 어울리는 것 같아.”

“당신께선 대머리가 어울리십니다.”

라브는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학교에서 언제나 타인들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의 라이트릭 에센이 이러한 농담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라브는 농담에 농담으로 맞섰다.

“그럼 염색 다 하고 나면, 네가 내 머리 대머리로 만들어 줄래?”

“저야 괜찮습니다만…… 두피가 썰리진 않을지 걱정이군요.”

농담의 수위는 높아졌고, 라브의 희열은 배가 되었다. 주고받는 농담들이 오래전부터 친했던 친구와 같은 느낌. 염색약이 묻은 붓이 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쓴다. 이토록 극명한 금발은 오히려 가짜가 아닐까, 라브는 의심을 해보았다. 그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운지 핀이 눈을 감았다.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 말이야, 에센.”

“네.”

“첫 키스가 언제야?”

난데없는 유치한 질문에 핀은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는 ‘무슨 수작이십니까?’ 하는 물음이 배어 있었다.

“대답해봐. 궁금해.”

“지금 당신처럼 어렸을 때라 기억합니다.”

스무 살인 라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충분히 빈정거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브는 싱겁게 웃으며 질문할 뿐이었다.

“너랑 키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데?”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응.”

“제가 그걸 왜 대답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괴상한 색으로 염색을 하는 것도 사실은 싫습니다. 그저 귀족인 당신이 하는 말이라 거역할 수 없어서 하는 것뿐입니다만.”

“아니야. 틀렸어.”

라브는 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살짝 잡아당겼다. 마치 개구쟁이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네가 내 머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으니, 복수를 당하는 거라고. 귀족이라던가, 평민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야.”

“복수, 입니까.”

“응. 복수.”

“저는 어디까지나 당신에게 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염색해드렸던 것뿐입니다만. 애초에 그 색을 고르신 것도 당신이셨고.”

“블랙 유니콘 부대에서도 그렇게 행동했던 거야?”

“무슨 말씀입니까?”

“거기에서도 그렇게 네 취향대로 만사 밀어붙였나 싶어서, 부대라는 건 꽤 상하체계가 꽉 잡혀있을 텐데, 윗사람에게도 그랬냐는 말이지.”

여상스러운 말투로 나온 질문이지만 핀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모든 행동은, 황제일 적과 다른 것이 없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귀족들을 대하는 그 말투만 달라졌을 뿐, 생각해보니 대표인 로리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고자세인 것 같아 스스로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에센?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큭. 부대 이야기 좀 해봐.”

“갑자기 부대 이야기는 왜 들으려 하십니까?”

“그야 네가 저런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궁금해지잖아. 정말 그 부대 출신 맞아? 무슨 군인 출신 취향이 저래?”

라브는 갈수록 핀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해대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애인에게서 받은 거라던가? 그런 유치한 순정을 가질 녀석으로 보이진 않지만.”

“애인…… 은 아닙니다.”

“그럼 어머니?”

“아닙니다.”

“누가 만든 건데?”

성가시다. 매우 성가신 질문만 해댄다. 핀은 대놓고 귀찮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떴을 때, 라브의 수정석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누가 만든 거냐니까?”

라브가 만든 반제국주의 동영상 정보가 들어있는 문제의 목걸이. 수정석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직접 만든 거야?”

“예? 예…… 예.”

“정말?”

“예…….”

핀은 대충 대답하며 수정석 안의 정보를 모두 없앨 궁리에 빠져있었다.

“마력 쓰십니까?”

“나는 마력 따위 없지.”

핀 역시 마력은 적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느끼기에도 라브에게서 마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모르게 그의 목걸이에 꿰인 수정석 속 정보를 마력으로 없애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핀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력 정제를 시작했다.

라브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나를 종종 놀라게 하는 녀석이야.”

핀은 대답하지 않고 마력 정제에만 열중했다. 손톱만한 수정석 하나 훼손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마력 정제에는 일 분 정도 소요될 것이고, 수정석 안의 정보를 엉망으로 만드는 데는 몇 십초면 충분할 것이었다.

“배우 같은 얼굴을 하고선, 군인에, 미술학도에…….”

라브의 나른한 목소리가 그 짧은 시간을 자꾸만 방해했다.

“저런 웃긴 장바구니도 만들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녀석인지…….”

40초, 30초…… 흘러갔다.

“입 다물고 있을 땐 무서운 짐승 같다가, 가끔 웃을 때 보면 순한 초식 동물 같으면서도…….”

조금이면 된다, 핀은 라브의 말을 묵묵히 들어냈다.

“어떤 말을 해도 묵묵부답이었던 때는 어찌나 괴롭히고 싶었던지…….”

마력 정제는 끝이 났다. 저쪽이 계속 낮게 뭐라 뭐라 중얼 거리니, 핀은 형식적인 대꾸를 해주었다.

“그랬습니까, 제가.”

“지금도.”

눈을 뜬 핀이 수정석을 훼손하기 위해 그 작은 돌을 투시 가늠하기 시작한, 그때였다.

“괴롭히고 싶어.”

라브는 고개를 숙여 핀에게 입을 맞추었다.

“……!”

당혹스러웠지만, 수정석을 투시가늠하고 있는 상태라 라브를 밀쳐내지도 못한다. 오히려 목에 수정석이 닿아있어, 투시가늠 없이 쉽게 훼손을 시키기 좋은 상태다. 맞 닿아있는 입술이 낯설다. 따뜻하고 말랑한 혀가 살짝 입술 안으로 들어선다. 핀은 끝내 입술을 열지 않고 온 마력을 다해 수정석 안의 정보를 부수는데 집중했다. 일개 학생이 만든 과제를 어째서 이렇게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참아내면서 까지 훼손해야 하는지 그 자신도 참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 제위 시절의 자신을 피곤하게 한 그 결벽증은 아직도 그의 깊숙한 곳에 남아있었다.

수정석안의 정보는 모조리 부서졌다. 라브는 입술을 떼며 말했다.

“에센, 섹스 할래?”

섹스? 핀은 이대로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괜스레 소란을 일으켜선 곤란했다. 깃털처럼 가벼운 농담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외모가 여자 같으셔서 하마터면 그러자고 할 뻔 했습니다.”

“여자보다 더 잘 조일 텐데.”

“…….”

“표정 재미있네. 애인 있을 것 같은데, 표정은 며칠 굶은 순진한 짐승 같아.”

핀은 여태 이 같은 불쾌함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다.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난 그는, 집사가 준비해둔 물에 머리를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라브가 피식 웃었다.

‘귀엽네.’

핀의 성난 사자 같은 표정, 얼굴을 붉히던 반응, 라브는 얼른 방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와 얼굴을 매일 마주칠 수 있는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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