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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수업이 있는 시간은 오후였다. 그 때까지 아직 몇시간이나 남았지만, 핀은 가공간으로 미리 이동했다. 일찍 가서 하고 있던 대형 벽걸이 작품을 미리 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세드릭과 로리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불편하기만 했다.
가공간에서는 뜬금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호수는 얼어있었고, 나무들은 새파란 잎사귀 위에 눈을 얹어놓은 채 기이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때마침 바깥 세상이 무더운 계절이어서, 이러한 추위는 핀의 온 몸을 기분 좋게 식혀주었다. 이 모든 환경이 마법사 황제의 아내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눈치 챈 핀이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언덕 집 안으로 들어갔다.
괴상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악, 아! 읏! 아읏!”
“허? 소리 내지? 더 맞아야 정신 차리겠지? 히엘?”
“여왕님, 아프잖아! 살살 때려줘!”
“좀 더 애원해봐, 응? 이 음란한 수캐야.”
“헉, 핀이다! 하리, 핀이야! 이제 그만해야겠어!”
핀은 이름이 불리자 곧바로 밖으로 다시 나왔다.
나와야 했다.
‘뭐지, 방금……?’
대체 자신이 어떠한 광경을 본 것인가. 논리적인 이유를 생각해보려한다. 어째서 황제인 형이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어째서 황후인 하리가 드레스대신 황제 제복을 입고 있는지, 그것도 속옷만 달랑 입은 민망한 상태에서 제복 상의만 느슨하게 걸친 채로.
거기다 하리가 들고 있는 검정색 줄은 대체 무엇인지, 채찍이랑 매우 닮았는데 아니, 채찍이었는데……?
‘원칙대로라면 지금 황제는 조회에 참가할 시간 아닌가? 뭐하는 거야, 히엘?’
핀이 추측을 하려 하는 그때, 문이 열렸다. 맨 상체에 제복 상의를 걸쳐 입고, 바지 또한 급한 대로 입고 나오는 히엘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 까칠한 태도로 핀에게 따지듯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일찍 오냐?”
“그냥 덥기도 덥고 바느질이나 하려고. 근데 방금 그건 뭐…….”
“네가 말한 그 교수, 내가 알아서 손썼다.”
“그렇군. 근데 방금 그건 뭐…….”
“교수를 죽이는 것 보다 더 괜찮은 방법이 있어, 이 녀석아.”
“죽이는 게 편할 텐데. 근데 방금 그건 뭐…….”
“안 죽이고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다고.”
“근데 하리랑 방금 그건 뭐…….”
“묻지 마.”
묻지 말라는 말에, 핀은 심술궂게 웃었다.
“그러니까 더 묻고 싶어지잖아.”
제복의 단추를 다 끼워 맞춘 히엘은 니이새 둥지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아무튼 네 형수는, 대단한 여자야.”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히엘은 최근 하리가 눈떠버린 가학 성욕자 기질에 휘둘리며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평범한 여인, 전대 황제가 감금시킨 대로 감금당하고 미쳐버렸던 눈물 쟁이 광녀, 바느질 잘하는 고운 아가씨, 귀여운 아가씨, 그렇게만 보였던 하리가 남자를 괴롭히며 섹스하길 좋아하다니! 그녀의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취향을 발견한 히엘은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그녀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딱 한 번 ‘폐하를 괴롭히고 싶다’는 청을 듣고,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인 후 틈만 나면 그녀의 노예를 자청해 즐겁게 즐겨왔다. 그녀에게 채찍을 맞아도, 그녀의 발에 차여도, 그녀에게 뺨을 맞아도, 그녀로부터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분을 희롱당해도, 그는 모두 적응하고 즐겼다. 하리는 때로는 그에게 ‘네 년은 예쁘장한 얼굴이라 여자 옷이 잘 어울린다, 주인님의 말에 복종하도록.’이란 명령을 내려 여장을 시키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도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본격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 놀이의 끝은 언제나 히엘이 원하는 섹스였으니 나쁠 것 없었다. 게다가 하리가 딱 한 달만 자신의 ‘노예’를 해주면 한 달 뒤에는 그녀 자신이 ‘노예’가 되어준다 하였기에, 히엘은 그때를 기다리며 더욱 즐겁게 노예 놀음에 응해왔다.
‘오늘 플레이 마치고 하리랑 호숫가에서 눈사람이나 만들려고 가공간에다 얼음 마법을 뿌렸는데 이 녀석이 이렇게 일찍 올 줄이야……, 그나저나 노예 생활도 오늘이 끝이군. 내일이면 난 하리에게 주인님이 되는 거야. 아아…… 얼른 와라. 내일!’
그러한 사연을 알 수 없는 핀은 멀뚱히 서서 알쏭달쏭한 표정만 지었다.
‘하리가 대단하다니…… 뭘 어떻게 한 거야.’
그런 걸 왜 궁금해 하는 건가. 핀은 자신의 궁금증을 애써 날려버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막 드레스를 다 갈아입은 하리가 그를 맞이했다.
“왔어? 어디 얼마나 진도가 나갔나, 좀 볼까, 핀의 작품…….”
핀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작품과 바느질도구를 펼치며 조심스레 말했다.
“음, 내가 일찍 와서 뭔가 방해가 된 것 같은데…… 나야 혼자서 해도 되니까. 히엘한테 가.”
“아니, 아니, 아니야! 나도 바느질이 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이젠 뭐랄까, 너무 탐닉을 해버려서…… 바느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핀은 도무지 하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탐닉? 무엇을?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내가 참…… 이 무슨 망발을, 미안.”
하리는 더운 듯 손부채질을 했다. 핀은 피식 웃었다. 하리의 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녀가 밝아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행복해보이네.”
“으응? 우욱!”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헛구역질을 하고 마는 하리였다. 아까부터 핀과 대화를 나누며 쿠키를 하나 씹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래 됐는가 하는 의심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곧 핀이 한 말에 의심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아이 가진 거야?”
아내 리이라의 임신 초기 징후를 무려 네 차례나 보았었던 적이 있었으니 척하면 척이었다. 아니, 굳이 그런 남자가 아니더라도 여자의 헛구역질은 빤했다. 아이를 가졌느냔 핀의 말에 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 내가?”
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느질 도구를 다시 정리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음. 궁으로 돌아 가봐. 황의를 불러봐야지. 히엘이 좋아하겠다.”
“아, 내가 이, 임신이라니!”
“다음에 왔을 땐 좋은 소식을 확실히 듣길 바랄게.”
핀은 조카가 생기게 될 지도 몰라 설렘을 느꼈다. 재위 시절 황후의 회임 소식을 들었던 때 느꼈던 설렘과는 다른 종류의 설렘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핀을 반기는 것은 샌드위치 한 접시뿐이었다. 세드릭은 방문에 공부 중이란 팻말을 걸어놓고 쥐죽은 듯 조용히 있었기에, ‘사촌 동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소풍은 흐지부지된 건가?’
휴가 마지막 날을 뭐하며 즐길까. 생각하던 핀은 혼자 장을 보러가기로 했다.
그가 거리로 나서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묘한 시선으로 보았다. 훤칠한 키, 군더더기 없는 몸매,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라는 평범한 복장이지만, 그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아기자기하기 이를 데 없는 디자인과 색감의 바느질 장바구니였다. 하필이면 그 장바구니가 스승 하리의 취향이 깃들어 있어 파스텔 톤 색깔이었다. 심지어 레이스도 달려있었다. 아이얄 시민들은 훈훈한 미청년과 알록달록한 장바구니의 상관관계를 한참 생각해야했다.
‘유치원 선생님인데 뭔가 사러 잠시 나온 건가?’
‘누군가와 내기를 해서 져서 벌칙을 수행중인 것일 수도?’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쩌면 미친 것일 수도?’
‘변태인지도?’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있음에도 정작 핀은 그러한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여러 상점을 들러 장을 보는 것에만 집중했다. 내년이면 세드릭이 기숙사에 들어가고, 자신은 혼자 살게 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혼자서 식사를 해결할 줄은 알아야했다. 어떤 요리를 해볼까. 요리 이전에 재료가 우선이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눈에 보이는 재료 중 괜찮아 보이는 것이면 그는 무엇이든 샀다.
물론 그런 막무가내식의 장보기를 하면 세드릭의 잔소리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 조리법이나 알고 사 오시는 거예요? 아버지, 또 음식물 쓰레기를 만드시려는 거예요? 아버지, 이번 것은 아버지가 만드셨으니, 아버지가 모두 드세요, 전 안 먹을 거예요, 맛보라고 하지 마세요…….’ 그러나 핀은 이전에 들었던 그 잔소리들을 새까맣게 잊은 채 장바구니를 꾸역꾸역 채워갔다.
어느새 장바구니는 끈이 위태로울 만큼 가득 차게 되었다.
‘이쯤이면 열흘 간 장을 보지 않아도 되겠군.’
핀은 뿌듯하게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뇌리에 스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염색약.’
그는 염색약이 필요했다. 지난번 우연찮게 라브를 만나 붉은색 염색약을 사고, 그것을 모조리 라브의 머리에 칠해주느라 정작 자신의 염색을 미뤄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장바구니가 가득 차 있었고, 냉열석 근처에 보관해둬야 할 식재료도 있어서 빨리 집으로 가야했다.
‘샵으로 가서 염색을 하는 것은 당장 무린데…….’
그래서 저번에 갔던 그 미용재료 가게에 들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곳에서 라브를 만나고 말았다. 맨 처음 새빨갛게 잘 물들었던 라브의 머리 색깔은, 그사이 물이 빠져 꽃분홍색이 되어 있었다.
“여어, 라이트릭 에센 군.”
“안녕하십니까.”
핀은 피식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라브에게 예를 갖추었다. 라브가 제 머리카락을 곤란한 듯 만지작거리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내 흰머리가 좋다고 찾는 손님도 있었는데. 너, 은근 내 영업 방해했다고.”
“아, 죄송합니다. 어울리셔서, 그만.”
핀은 사과를 하면서도 짓궂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