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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93화 (9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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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눈부신 아이얄 공원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연인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 양산을 쓰고 혼자 책을 읽는 여인들, 가벼운 운동을 하는 남자들, 애완견을 산책시키러 나온 노인들까지, 휴가기를 맞은 이곳은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표정만큼은 여유로움으로 넘쳐났다.

분수대 앞에서 로리는 세드릭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막 나타난 루비를 보고 우아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어머, 뭐야? 이 냄새나는 평민 계집애는?”

그 말은, 전 황태자 ‘티에리아’를 쥐락펴락 하려는 소녀 루비에게 날리는 사나운 맹견의 빈정거림이라 할 수 있었다. 루비는 로리에게 겁을 먹었다.

“저기 세드릭, 이 여자 분은 누구야?”

루비의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로리의 몫이었다.

“건방지군. 너 따위 평민은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볼 수 없는 신분인 것만 알아두고. 더는 우리 세드릭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세드릭, 대답해줘. 이 여잔 누구냐니까?”

세드릭은 뜸을 들이다 말했다.

“미안, 루비. 사실 오늘 여기 나온 건, 나 여자 친구가 보다시피 이렇게 생겼으니까, 더는 내게 편지 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서야.”

물론 세드릭의 여자 친구는 로리가 아니다. 방금 그 말은 그저 로리가 시킨 대사였지만, 연기 초보인 세드릭은 굉장히 어색하게 말을 하여 로리를 당황시켰다.

하지만 그런 서툰 연기가 먹힌 눈치였다. 루비는 상처 받은 표정을 한 채로 돌아섰다.

“안녕, 세드릭…… 흑흑. 행복해야해! 그동안 편지로 귀찮게 해서 미안해!”

루비는 이제 더는 세드릭의 근처에서 얼씬거리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제국 귀족 영애들 중 최고의 미모라 할 수 있는 로리가 세드릭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선글라스를 뱅뱅 돌려대며, 루비의 모습을 발끝에서부터 위로 약 올리듯 올려다보는 모습, 그 하나만으로도 루비의 마음은 크나큰 타격을 입고 만 것이었다.

로리는 즐거워하며 세드릭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뭐야, 이대로 깨갱하고 가는 거야? 참 허술한 계집이네. 하필 저딴 애와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고 논 거야?”

“누나…….”

팔짱, 그 스킨십의 힘은 대단했다. 애초 루비에 대한 마음이 불분명했던 세드릭은 로리가 자신의 곁에 찰싹 붙어 팔짱을 끼고 루비에게 그런 일격을 던지는 순간, 마음속으로 루비를 날려버렸다.

‘로리 누나가 이 세상에서 최고야!’

세드릭은 이제 로리에게 일편단심 하고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로리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오직 세드릭이 핀의 아들이기에 이렇게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훗날 자신이 핀과 잘 되어 세드릭과 아들, 어머니 하며 지내게 될 지도 모르잖은가.

그 후 세드릭과 로리는 어느 카페에서 가볍게 한 잔의 음료를 마신 뒤, 여름 햇살을 즐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

문이 열리고 로리의 눈에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샤워 후 하반신에 수건 하나만 걸치고 주방에서 열심히 손을 씻는 핀이었다.

“어머! 난 몰라! 꺄악!”

로리는 다섯 개의 손가락을 쫙 펼친 채 눈을 가렸다. 가리나 마나한 행동이라 보일 건 다 보였다. 새까만 눈동자가 집요하게 핀의 반라를 살펴보고 있었다. 과연 애완견 삼을 만한 몸매라며 로리는 내심 감탄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탄탄한 어깨, 가슴팍, 복근 여기저기에 상큼하게 부딪쳤다. 수건 아래로 보이는 종아리는 준마의 근육처럼 척 보기에도 단단함이 예사롭지 않았다. 늘 깔끔하게 차려입던 옷 속에 이런 멋진 몸매를 숨겨두고 있다는 걸 예전 화보 촬영을 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로리였다. 저절로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아, 역시 내가 첫눈에 반했을 정도로 멋진 남자야!’

핀은 손 씻는 것에 집중하느라, 그들을 보지 않은 채 형식적인 인사만 했다.

“오셨습니까.”

그런데 세드릭이 핀의 손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호통을 쳤다.

“아버지! 그 손은 뭐예요!”

라브가 자고 있을 때 그의 머리카락을 새빨갛게 염색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핀이었다. 당연히 손에도 빨간물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은 성큼성큼 다가가 아버지의 손을 만지며 다시 따졌다.

“이 손은 대체 뭐냐고요? 상처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핀은 침묵했다. 아버지로서 차마 ‘학교에서 날 골리는 귀족 녀석이 있어서 그 녀석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여주는 복수를 했다’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어쩌다 손이 이렇게 되셨어요?”

핀은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했다.

“염색약 색깔을 잘못 사서 버리다가 이렇게 됐어. 잘 안 지워지는군.”

그제야 안심하는 세드릭이었다. 한참 전부터 목이 탔던 소년은 찬 물을 두 잔에 나누어 담아 한 잔을 로리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로리는 그 잔을 테이블에 그대로 올려두고, 한손으로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수줍고도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그 빨간 물, 지워줘도 될까?”

핀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뭘 말씀입니까?”

“그 손에 묻은 거 말이야. 나, 마력 있잖아.”

“해주신다면야, 뭐.”

로리는 마법을 이용하여 핀의 손에 있는 붉은색을 빠르게 지워주었다.

“감사합니다.”

“뭘…….”

로리는 계속 얼굴을 붉혔다. 핀은 그녀를 신기한 듯 보았다. 그토록 건방지고 앙칼지게 굴던 공녀가 맞던가? 이렇게 자신과 눈도 못 마주치면서 손에 묻은 염색약을 지워주는 친절이라.

‘귀엽군.’

그 시선의 의미가 전해져 로리는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그녀의 발그레한 볼과, 또 핀의 상의가 탈의된 모습, 그 모든 것이 신경 쓰이는 세드릭은, 핀에게 조금 딱딱한 어조로 ‘명령’했다.

“아버지, 옷 입으세요.”

“그래. 그럼 대표 님, 쉬다 가십시오.”

핀은 더 이상 그곳에 서있을 이유가 없어서 다락으로 올라갔다. 더 있어봐야 로리가 또 마력화산으로 사냥을 가자고 할 것 같아 미리 도망을 가는 이유도 있었다.

다락방에 들어온 그는 창문에 냉열석 두 개를 세워두고 알몸이 되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오후 햇살이 비치는 방은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살짝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자야할 테지만, 그냥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비록 낮에 잠자고 밤에 바느질을 하면 아들이 혼을 내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봐줘, 티에리아.’

핀은 눈을 감으며 천천히 의식을 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가에 있던 냉열석 하나가 툭 떨어졌다. 핀의 몸 위로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들어온 것처럼.

***

“그만, 그만, 헉……!”

핀은 몸부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냉열석은 모조리 기화되어 사라졌다. 무거운 호흡에 가슴에 먹먹해졌다. 사락거리는 커튼이 더운 바람을 공간에 열심히 퍼다 나르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며 악몽을 떠올렸다.

‘리이라, 당신…….’

황후 리이라가 꿈속에서 몇 번이나 자신의 목을 졸랐다. 힘으로 그녀를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 때문인지 그러지 못했다. 그저 괴로워하다 겨우 깨어날 수 있었다.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사라락, 사라락, 사라락…….

‘하리가 왔을 때에도 분명…… 이 소리가.’

핀은 요즘 누군가가 있는 기척을 자주 느끼곤 했다. 보통 거의 창문을 열어놓아 들리는 커튼 소리였지만, 그 소리가 유난히 누군가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로 들렸다.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많아 그런 환청이 들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직장 레이디 로리의 대표인 로리, 학교의 라브, 그러한 온갖 스트레스 중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핀은 히엘과 통신하기 위해 침대 맡에 놓아둔 필기르의 깃털을 들었다.

[린시안트 쥴 리이젠 교수. 암적인 존재야.]

라브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라브의 과제를 모든 귀족들에게 공개하려고 하는 그 교수를 죽이라는, 지시였다.

***

로리는 아침 댓바람부터 핀에게 찾아왔다. 핀은 이제 자동적으로 그녀를 떼어낼 궁리부터 했다.

“아, 대표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몸이 안 좋…….”

“아니, 아니! 그게 아냐! 사냥 가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로리는 말을 하다 말고 뺨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요즘 어째서인지 매번 핀에게 사냥을 가자고 할 때 마다 거절을 당하는 느낌이다. 핀의 태도가 뭘 말하는지, 핀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그녀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당히 상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마지막일 것이다.

“라이트릭 에센, 나랑, 오늘 나랑…… 놀러 갈래?”

그러겠다는 대답을 듣는다면, 데이트하자는 의미로 들을 참이었다. 그래서 핀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짝사랑만 할 순 없잖은가.

“오늘 너랑, 너와, 놀고 싶어. 밖에서.”

거듭된 부탁에 핀은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응?”

“네라고 했습니다만.”

“데, 데, 데이트…… 가자고?”

“티에리아. 일어나. 소풍가자.”

핀은 로리가 한 말 중, ‘데이트’라는 말을 철저히 빼고 들었다. 그는 세드릭을 깨운 뒤 도시락을 싸자고 말했다. 로리, 자신, 아들이 함께 하는 소풍, 아주 소풍다운 소풍. 그제야 로리는 자신의 고백이 잘못 전달되어도 아주 잘못 전달되었음을 깨달았다.

‘소, 소풍이라니! 진짜 소풍을 가잔 말이야? 핏빛 강철 검…… 제발 두 귀를 열란 말이야, 한 귀로만 쳐듣지 말고!’

최근 핀은 바느질로 대형 벽걸이 작품을 만들면서 틈틈이 도시락 가방 같은 작은 작품도 같이 만들고 있었고, 그 도시락 가방에 어떻게든 도시락이라는 것을 넣어보고 싶었다. 소풍은 그러한 의도로 나온 말이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바느질에 미친 남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열심히 도시락 만들 재료를 뒤적거리는 세드릭을 보고 로리의 눈썹이 씰룩이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아냐……, 우리 둘만 가자고 하는 거라고. 세드릭 너희 아버지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 아니라 제국의 둔치 같아…….’

하지만 그녀는 핀이 앉을 자리를 정중히 안내하자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핀이 주는 차를 두 손으로 받아 마시고, 어설프게나마 웃어보였다. 겉으로는 그러해도 속은 연신 ‘이게 아닌데’ 싶어 구두 굽을 바닥에 계속 긁어댔다. 그녀는 여태 신경질적이면 신경질적이었지, 지금처럼 소심하면서도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종은 그녀를 참 이상한 일이 있어났다는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아가씨가 왜 저러실까? 설마하니 큰 볼일이 급하신가…….’

도시락 메뉴는 샌드위치로 결정 났다. 요리 실력이 없는 핀은 세드릭이 지시한 대로 샌드위치 속을 빵에 끼우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형식적인 질문이 나왔다.

“휴가를 이렇게 보내셔도 괜찮으십니까?”

귀족들은 휴가철이 되면 고위 마법사들에게 부탁하여 대륙의 여러 휴양지로 이동해 여름을 즐겼다. 특히 핀라이트가 추운 지역 살카를 점령한 이후부터, 그곳은 이런 더운 계절 최고의 휴양지가 되었다. 그런 곳에 놀러나 가지 왜 자꾸 우리 집에 찾아오느냐는 것이 핀의 속내였다.

핀의 질문에 로리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데이트에 대한 무게감을 실어 주고자 솔직하게 내뱉었다.

“에센 그대와 ‘단 둘’이 보낸다면, 그게 제대로 된 휴가라 할 수 있지이…….”

그 누가 들어도 고백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진짜 의미를 펼쳐보자면, ‘너와 단 둘이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 그러니까 세드릭은 좀 빼자. 난 제국의 핏빛 강철검, 오직 너하고만 오붓한 시간을 원해’ 그러한 뜻이었다. 아버지보다 눈치가 좋은 소년 세드릭은 그 말을 듣고 썩은 생선과 같은 표정을 했다. 소년은 불을 한껏 키우며 촤르르- 촤르르- 소리가 크게 나도록 거칠게 고기를 구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이 아버지를 ‘노려서’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너와 단 둘이 보내고 싶…….”

핀은 요리에 집중하느라 로리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티에리아, 팬 불 좀 낮춰. 소리가 안 들려.”

세드릭은 핀의 말을 듣지 않고, 불을 더욱 키우며 싸늘히 말했다.

“아버지.”

“응?”

“솔직히, 오늘 소풍갈 여유 되세요?”

“무슨 말이지?”

“도시락 가방을 쓰시고 싶어서 나가자고 하시는 거 아니냐고요! 원래 오늘 무슨 날이었죠?”

“…… 아! 이런.”

그제야 핀은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오늘은 며칠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약속된 황후와의 바느질 수업이 있는 날인 것이다. 도시락 가방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앞치마를 내리고 로리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선약이 있어서. 그럼.”

로리는 그에게 원망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그것도 모른 체 그대로 다락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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