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회 -->
술에 취한 하리는 여전히 망상추리를 자세하게 하고 있었다. 히엘은 그 모습이 너무나 황당하고 웃겼다. 또한 아내의 질투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여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를 입 맞추다가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자신의 가슴께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이거, 네 거잖아. 드래곤은 남자라고. 그의 마법어를 하리가 들어봐야 해. 그는 영락없는 중년변태 아저씨란 말이야."
“좋다, 이번 한 번만 봐 준다…….”
“봐주긴 뭘 봐줘! 아무런 잘못도 안 했다니깐!”
“단 조건이 있어…….”
“큭! 조건은 또 뭔데! 왜 거는데!”
히엘은 마법을 이용해 하리의 혈관에 녹아난 알코올을 모두 날아가 버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또 무슨 재미있는 말이 나올까 싶어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하리의 입에서 숨겨진 욕망이 흘러나왔다.
“나도 채찍…….”
‘채찍’이라는 말에 가학성향 성벽이 있는 히엘의 귀가 번쩍 뜨였다. 몸도 더욱 달아올랐다. 눈을 감은 채 말끝을 흐리며 발그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하리의 볼이 꼬집히듯 만져졌다. 그렇게 잠을 깨워서라도 하리의 다음 말, ‘채찍’ 다음 말이 듣고픈 히엘이었다.
“하리, 하리, 정신 차려. 뭐라고? 채찍이 뭐라고?”
“나도 채찍…… 하고 싶어…….”
“때려달라고? 그런 거야? 드래곤, 질투, 의심, 뭐 이런 거 해서 미안하니 벌 해달라, 채찍으로 벌 해달라, 이런 거지, 응?”
그런 식으로 벌주는 놀이를 하고 싶은 히엘이었다.
“흐응, 채찍…….”
“응응. 기다려. 5분만 기다려.”
마음이 급해진 히엘은 2분간 마력 정제를 한 뒤, 3분 만에 그것, 채찍이라는 물건을 구현해냈다. 아내가 ‘초보자’이기에 부드러운 끈이 달린 것이 좋았다. 그는 채찍을 들고서 하리를 급히 깨웠다.
“하리. 여기 있어, 여기 원하는 장난감 있다니깐? 자지 마. 계속 자면 마법 써서 깨워버린…….”
그러자 하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히엘로부터 채찍을 낚아채어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외쳤다.
“엎드려!”
그날 밤 벌을 받는 쪽은, 히엘이 되고 말았다.
***
라브가 살고 있는 저택은 보잘 것 없었다. 잡초만 무성한 정원은 관리할 시종들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녹이 슬어 조금만 손을 대도 사람의 신경을 긁는 소리를 내는 철문은 새로 집을 단장할 여유가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 누가 보아도 몰락한 귀족의 집이었다.
노쇠한 집사가 이 저택 일손의 전부였다. 집사는 주인이 데려온 양자인 라브에게 예를 갖출 필요를 못 느껴 늘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라브가 손님을 데려오자 집사는 형식적으로 예를 갖춰 인사하며 금 간 잔에다 맹물을 부어 대접했다. 하지만 라브는 그것을 고맙다고 말하며 받아들었다.
집사가 자리를 비우자 라브는 손님과 마주앉았다. 손님, 그러니까 핀의 손에는 라브가 골라준 염색약이 있었다. 라브는 그 염색약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 색, 마음에 들지?”
핀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한턱 쏘겠다는 말에 거절하려 염색약을 사야한다고 대답했었다. 그러자 라브가 졸졸 따라와서는 붉은색 염색약을 골라주며 귀족의 명이니 들으라 했었다. 핀은 얼떨결에 취향에도 없는 붉은색 염색약을 사고 만 것이었다.
“마음에 들 리가 있겠습니까?”
“솔직해서 좋군.”
핀은 할 말이 없어 맹물을 마셨다.
“한 턱 쏘고 싶어.”
핀은 라브가 거듭 말한 ‘한 턱 쏘겠다’는 말이 이제야 이상하게 들려왔다.
“남자랑 해봤어?”
갑작스러운 말에 핀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안색을 드러냈다. 라브가 침대로 걸어가 옆으로 누운 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턱 쏠 건 그거밖에 없거든. 가진 건 이 몸뚱이뿐이라서 말이야.”
하지만 그 새하얀 몸은 가히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여자였다면 그 어떤 남자도 혹할 만한 몸이었다. 핀은 싸늘하게 웃었다.
“대답은 굳이 안 하셔도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자고?”
“…….”
“응, 뭐. 농담이야. 큭.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데려온 거지, 그냥.”
핀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날까 생각했다. 라브가 자신의 수정석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1등한 과제,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핀은 학생으로서 과제에 대해서는 솔깃했다.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궁금합니다.”
“보여줄까?”
라브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마법영상구를 들고 그 뒷면에다가 수정석 목걸이를 빼 박았다. 얼마 후, 지지직거림과 함께 영상이 흘러나왔다. 첫 시작은 유치했다. 새 하얀 알몸을 내보인 라브가 스케치북을 들고 ‘사르제스의 눈물들’이라는 글씨를 적고 있었다. 핀라이트의 악행을 고발하는 영상의 시작이지만, 정작 돌 던진 사람은 기억을 못한다고 핀은 그저 유치한 제목이라며 조소하기만 했다. 그러자 라브가 날카로운 눈을 하고 물었다.
“뭐가 웃기지?”
“…… 아닙니다.”
잠깐이나마 라브에게서 살기를 느낀 핀이었다. 핀은 할 수 없이 지루한 머릿속을 텅 비우며 차분히 감상하기로 했다.
많은 포로 출신 제국민들이 밑바닥에서 장애를 껴안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제국을 원망하고 있었다. 또한 다른 제국민들도 ‘황제가 바뀌었다고 패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 말하며 지금의 제국을 불신하는 말을 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핀의 고백이 나왔다. 한때 블랙 유니콘 부대원으로서 제국이 저지른 각종 패악과 악행에 동참했지만, 지금은 매우 후회하며 살고 있다고 한 말들……. 며칠 전에 라브가 부탁하기에 얼른 들어주고 자리를 빠져나오기 위해 해주었던 인터뷰가 지금 이 순간 핀의 차분함을 깨트리고 있었다.
‘학교 교수도 썩었군. 이런 정치색 짙은 것을 1등으로 하다니. 히엘이 너무 무르게 구니까 이런 것들이 설치는 거야.’
라브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며칠 후 학교에서 열릴 연회에 이게 상영될 거라고 교수가 그러더군. 나, 참. 1학년 때부터 주목받긴 좀 그런데 말이야.”
라브는 자신의 과제가 포로 출신으로서 매우 자랑스러운 듯했다. 핀은 라브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그를 칭찬했다.
“1등이 될 만한 작품이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많은 귀족들, 그들이 누리는 지금의 평온한 생활들이 결코 아무런 희생 없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좋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고마워.”
하지만 핀은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히엘에게 연락하여 라브의 영상을 1등으로 뽑게 한 교수를 제거하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치기어린 스무 살짜리 포로 출신 라브야 내버려두어도 괜찮으나, 교수는 그렇지 않다. 교수는 귀족이다. 귀족의 반제국 행위는 견제되어야한다. 핀은 자신이 이룩한 대 제국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라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장을 뒤져 싸구려 술과 잔 2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마침 테이블 위에는 상하기 직전인 라임 서너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라브는 주머니에서 조각칼을 꺼내 라임을 자르며 핀에게 물었다.
“술, 잘해?”
“못합니다.”
“나도 못해. 그래도 에센 네 덕분에 일등 했으니, 축하주는 마셔야겠지.”
두 술 잔에 독한 술이 따라졌다. 핀은 말없이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라브가 라임 조각 하나를 핀에게 건네며 웃었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해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질문은 조금 무거웠다.
“내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알아?”
갑작스러운 고백에 핀은 경악했다. 무표정을 지키고 있지만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저를 좋아…… 그보다, 당신께서는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좋아해서, 좋아해서 싫어한 것 같아.”
핀은 라브를 경멸했다. 라브 같은 뜬구름 잡는 말을 하는 부류들은 그만큼 경박하다 생각되어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보던 그때도…… 넌 그냥 그 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 태양, 그래. 너는 태양 같았어.”
“무슨 말씀입니까?”
“기억 안 나? 모든 계집애들이 너에게 자리를 비켜줬잖아.”
“그랬습니까?”
“넌 또 그 친절들을 당연한 듯 받았고. 솔직히 나 그때 네가 엄청 미웠거든. 뭐 이런 이야기는 됐고, 아무튼 이젠 뭔가 알 것 같아.”
“무엇을요?”
“그 계집애들의 마음을 말이야. 너한텐 뭐랄까, 사람을 굽실거리게 하는 매력이 있어.”
이미 모든 이들을 굽실거리게 만들던 시절은 과거의 한 조각이 됐다. 핀은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이런 때에 라브와 같이 사람을 시험하는 듯 오묘한 말을 해대는 자가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말씀 하실 때 발음도 그렇고 늘 입고 다니시는 복장도 그렇고 매우 낯선 느낌입니다. 혹시 타국 출신인지요?”
“응. 고향에서 블랙 유니콘 녀석들에게 당한 채로 이곳에 왔지.”
그래서 그러한 영상을 만들었던 걸까. 예감은 했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듣자 핀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난 얼마나 다행이야. 내 부모님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했지. 난 우리 마을에서 혼자 살아남은 거야. 이 계집애 같은 얼굴이랑 몸매 덕분에 블랙 유니콘 병사들이 재미를 보려 일단은 살려두었었거든. 큭. 뭐 다행히 핀라이트 덕분에 어떻게 구해졌지만.”
핀라이트 덕분에 구해졌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려와 핀은 한참 가만히 있었다. 언제 그런 사연이 있었던가? 전쟁터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그였기에 일일이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 그래서 어떻게 흘러 흘러 와서 지금도 이 몸으로 먹고 살고 있어.”
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브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손님을 받는 창기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딱히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의 몇몇 학생들이 라브를 흉보았던 말이 저절로 귀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창기가 맞다니. 핀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귀족이신데 꼭 그런 일을…….”
라브는 웃었다.
“귀족? 입양된 녀석이 그런 게 중요할까? 아무런 의미도 없지. 그리고 나는 이 일이 좋아. 나쁘지 않아. 내가 앞으로 하려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되는…… 하나 필래?”
엽궐련을 꺼낸 라브가 그것을 핀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핀은 정중한 말투로 솔직히 말했다.
“거절합니다.”
“마음대로 해.”
소파에 길게 누운 라브는 뻐끔뻐끔 엽궐련을 맛있게도 태웠다. 실내는 연기로 자욱해졌다. 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년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묘하게 몽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브에 대한 그런 감상이 들다니. 핀은 눈과 이마 사이 상처자국이 있었던 부분을 버릇처럼 긁으며 한 잔을 더 마셨다. 라브는 마법영상구에 광대극을 틀어놓고 아이처럼 피히힛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 오늘 너무 걸었나. 좀 피곤하네.”
저택의 사정이 사정인지라 마차 하나 변변히 두지 못해서 종일 걸어 다니던 라브였다. 핀은 라브가 하필이면 입양이 되어도 이런 귀족 가에 입양이 되었다 생각하며 딱하단 시선을 보냈다.
그 잔혹한 전쟁 통에서 혼자 살아남은 자라면, 그 운이 앞으로는 더 좋게 뻗길 바랐다. 라브의 고향을 빼앗았던 자로서 가지는 죄책감인지도 몰랐다. 핀은 말없이 술만 마셨고, 라브는 엽궐련 세 개를 더 태웠다.
그렇게 라브가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핀은 귀가하고 없었다.
그리고 라브의 머리는 새빨갛게 염색된 상태로 변해있었다.
핀이 염색해주고 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