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회 -->
로리와 세드릭이 나가자 집에 고요와 평온이 찾아왔다. 핀은 혼자만의 시간을 환영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반짇고리를 꺼냈다. 이제부터 조각천을 미리 오려둘 생각이었다.
원단에 선을 그을 때는 뭉툭한 초크보다 세밀화용 연필이 좋다. 그 가느다란 연필을 쥐고서 핀은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조각선을 그렸다. 그 뒤 가위를 들고 하나하나 오리기 시작했다. 워낙 대형 작품을 할 생각인지라 조각천을 오리는 작업만 해도 꼬박 반나절이 걸릴 것이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다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자의 숨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핀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간을 내서 하리가 온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리 왔어?…… 하리?”
하늘거리는 옷자락 소리와 가뿐한 걸음 소리가 분명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을 본 순간 핀의 몸에 한기가 돌았다.
‘냉열석을 너무 많이 세워두었나?’
핀은 자신이 들은 소리들이 전부 바람 소리인가 보다 하며 다시 가위를 들었다. 또 한 번 인기척이 났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는 핀이었다. 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핀! 핀! 피인!”
장난기와 애교가 섞인 목소리. 핀은 밝게 웃었다. 그녀는 핀이 가공간에서 은거 생활을 할 때 그의 일을 봐주던 시종과 함께 이동해왔다. 입은 옷도 거추장스럽지 않은 간편한 원피스, 그것은 핀과 함께 바느질을 즐기러 온 것을 뜻했다. 핀은 냉차를 준비했다.
“오늘은 바쁜 일 없어?”
“응. 네 작품 도와주러 왔어.”
핀은 이 순간, 아들 보다 하리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시종과 하리와 핀은 테이블에 앉아서 수다를 떨며 조각 자르기를 했다. 시종도 하리와 오래 지내다 보니 바느질을 어느 정도 익혀서 시접에 따라 조각을 잘 잘라줄 수 있었다. 덕분에 작업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던 핀은 감사의 표시로 점심을 직접 만들어주었다. 세드릭한테서 배운 특제 냉 토마토스프였다. 궁에서는 나오지도 않을 투박한 가정식이지만 하리는 굶주린 사람처럼 재빠르게 그것을 다 마셔버렸다. 핀은 놀라서 물었다.
“요즘 살이 찐 것 같긴 한데…… 먹성이 좋네, 하리. 그런데 궁 음식, 맛없어? 아니면 굶고 온 거야?”
“아니, 이런 음식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흐흐.”
그 말을 들은 시종이 일어나 한 그릇 더 뜨려 했으나, 핀이 말렸다. 그는 직접 스프를 퍼서 하리에게 내밀었다. 물도 한 잔 더 따라주며 말했다.
“이거 만드는 거 그다지 어렵지 않아. 요리사들한테 시켜봐.”
“응. 그래야겠다.”
하리는 대답과 함께 번개 같은 속도로 그것을 비웠다.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오자 꾸역꾸역 먹던 자신이 민망한 모양이다. 우아하게 레이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녀는 곱게 웃었다.
“원래 토마토를 안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먹으니 괜찮네. 아, 배부른데 뭐 재미있는 거나 좀 볼까.”
마법영상구가 켜졌다. 핀은 하리의 행동이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감정도 느꼈다. 자신으로 인해 한때 망가졌던 여인이 이렇게 웃으며 행복한 오후를 보낸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라 할 수 있다. 고마웠다. 이렇게 포만감을 느끼며 행복감에 젖어 배를 문지르는 그녀에게 고마웠고, 그녀를 그럴 수 있게 만들어준 히엘에게도 감사했다.
“히엘이 잘 해줘?”
“응. 바빠서 얼굴 보긴 힘들지만, 만날 때 마다 얼마나 잘해주시는데.”
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딱 그때, 마법영상구의 한 채널에서 어떤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귀족을 상대로 불법 피임 마법 시술을 해온 마의사가 잡혔습니다. 오늘 아침 8시 소도시 세리스의 한 여관에서 잡힌 L아무개 씨는 그동안 황족, 귀족들을 상대로 은밀히 피임 시술을 행해 수백 씰의 폭리를 취해 왔으며…… (중략) 한 익명의 귀족부인의 인터뷰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영상을 보고 있던 하리가 마법영상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B씨(아이얄 남쪽 거주)-어느 날 남편이 자기 아들이라면서 쌍둥이 아들들을 데려왔더라고요. 이거 때문에 내 딸 아이가 작위를 받지 못할 지경이 되고……. 그나마 우리는 사정이 낫죠. xxx 부인의 남편 xxxx 백작께서는 피임 마법 파훼를 못해서 평생 후사도 못 보고…….]
순간, 하리는 언젠가 히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응, 그게…… 멀고 먼 옛날 옛적에 내 몸에 피임 마법을 걸어둔 적이 있었거든. 그게 파훼가 안 되지 뭐야?’
갑자기 하리가 말이 없어지자, 핀은 걱정스레 물었다.
“하리, 왜 그래?”
“점심 잘 먹었어. 난 이만.”
하리는 시종과 함께 궁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핀은 설거지를 하고, 조각 자른 것을 차곡차곡 그 순서대로 상자에 넣어둔 뒤, 산책을 할 생각으로 거리로 나섰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핀은 오히려 그 따가운 햇볕을 반겼다. 최근 하얀 피부를 좀 그을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멋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화보를 찍은 뒤에는 살짝 그을린 피부도 매력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궁에서와 달리 자신의 옷을 일일이 골라주는 시종도 없고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최근 핀은 선택의 폭이 매우 넓어질 수 있었다. 자신의 취향대로 귀도 한 쪽 뚫어보고, 머리를 자를 때에도 유행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 살펴보기도 하고, 그렇게 뭐든지 다 취향대로 할 수 있는 지금의 삶이 그는 꽤 신이 났다. 솔직히 자신을 따르는 많은 소녀 떼들이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이제는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어 기분이 좋기도 했다. 거리로 나온 김에 염색이나 해볼까, 하고 미용실을 가야할지, 아니면 직접 염색약을 사야할지, 무슨 색깔이 좋을지, 고민을 하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귀 뚫었네?”
라브였다. 핀은 예를 갖춰 말없이 인사했고, 라브는 그에게 수정석 목걸이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전에는 짓지 않던 밝은 웃음을 지었다.
“너 덕분에 과제 1등 했는데, 따라 와.”
“어딜 말씀입니까?”
“한 턱 쏘려고.”
***
황제의 여름휴가가 하루 앞당겨졌다. 히엘은 가벼운 마음으로 황후궁을 찾았다. 넝쿨라일락이 화원을 물들이며 진한 보랏빛 향기를 뿜어댔다. 히엘은 화사하게 웃었다. 빠듯한 일정을 다 소화해냈겠다, 이제부터야 말로 진정한 신혼의 시작일 것이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황후 어디 있소, 하리, 하리, 하리!”
다른 때 같으면 황후는 미리 맞이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황후궁 깊숙한 곳에서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바로 요리였다. 황제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절구에 토마토를 짓이기는 그녀 때문에 요리사들이 황망해했다.
히엘이 의아해하며 웃었다.
“하리, 무슨 일로 요리를 다 하는 거야, 이렇게 뒤룩뒤룩 살이 쪄 놓…….”
하리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나자 히엘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내가 돼지도 아니고 뒤룩뒤룩은 좀 심했나싶었다. 사과의 의미로 예쁜 미소를 지어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요리사들에게 얼른 자리를 비우라고 눈짓을 했다.
이윽고 하리에게 조심스러운 질문이 던져졌다.
“무슨 일 있어?”
“폐하, 냉 토마토스프 드셔보시겠습니까?”
냉 토마토 스프? 토마토, 당근, 피망 같은 맛없는 채소들이 다발로 들어가 짓이겨진 괴상한 맛이 나는 요리? 히엘은 어릴 적부터 편식이 심했었고 그러한 요리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싫어, 싫어! 당근, 피망, 너무 싫어…….”
아이처럼 떼를 쓰던 히엘은 하리의 섬뜩한 눈빛을 목격하곤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인 법이지. 어떤 맛일지 너무 기대 되는군, 후훗!”
절구 안에서 토마토가 다시 부지런히 찧어졌다. 히엘이 자리에 앉아 멍하니 하리의 모습을 구경한지 몇 분 후, 토마토 채소 범벅 스프에 약간의 오일과 소금이 가미되어 요리가 완성됐다. 척 하고 코앞에 내밀어진 스프접시를 본 히엘은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일곱 살 때 이후로 처음 맛보는 공포의 토마토! 그러나 그는 최대한 웃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스프를 한 번에 다 삼켰다.
“우와! 참 맛있네!”
“여기요.”
스프가 한 그릇 더 들이밀려졌다. 이제 히엘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내가 주었기에 한 그릇 정도는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너무나 역하여 무리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걸 먹으라, 저걸 먹으라, 강권한 적이 없었다. 물론 하리가 강권한 것은 아니지만, 어째 분위기를 보아하니 먹지 않으면 달콤한 신혼 휴가가 엉망이 될 눈치였다.
대체 하리가 왜 이러는 걸까. 난데없이 시종들을 당황케 하며 요리를 만드는 것도 이상하고, 그녀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는 표정도 이상했다.
일단 그는 솔직하게 스프 그릇을 물렸다. 그러자 하리가 노려보기 시작했다.
“안 드시겠습니까?”
“후우.”
히엘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신혼이고, 어지간해서는 아내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긴 하나, 자신은 원래 성격이 까칠했다. 게다가 이런 황금 같은 시간에 싸움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곧 그는 정색을 하고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어?”
“별로.”
하지만 얼굴은 ‘별로’가 아니었다. 여자들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야 말로 ‘별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걸 히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황후의 기분을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리, 드래곤 공물 증가 문제로 휴가가 없던 일이 됐어. 그래서 오늘 하루만 겨우 시간 내서 쉬러 온 거야. 지금 뭐가 별로인지 말 하지 않으면, 오늘 내내 이렇게 서로 어색하게 지낼 수밖에 없겠지. 하리는 그러고 싶어?”
앞으로 보름 동안 황제의 휴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거짓말이었다. 궁에서 들리는 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말이 거짓이란 걸 곧 알 테지만, 하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결국 그녀는 이때 아니면 언제 속을 터놓나 싶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히엘, 피임마법 자기가 직접 두른 거예요?”
“으응? 그건 왜?”
하리는 빽 소리를 질렀다.
“대답이나 해요!”
히엘은 겁먹은 아이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피임마법을 자기가 직접 두른 거냐고 묻다, 라……. 자신은 마력의 크기는 크나, 그것을 의술이라는 섬세한 분야에 이용하지는 않았고, 이용할 까닭도 없었다. 그의 임무는 예전부터 파괴 스크롤 제조에만 한했고 그거 하나만 잘 하기에도 머리가 복잡했다.
“후, 그렇단 말이죠!”
하리는 무언가 벼른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마법영상구를 가져와 어떤 채널을 재생시켰다. 곧 마법영상구 화면에서 피임마법을 잘못 받아 문제가 생긴 귀족들의 하소연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불법 마법 의술을 행한 범인의 얼굴을 보게 된 히엘은 곧 사색이 됐다.
‘저 특이한 머리 색깔, 저 오동통한 체구는 분명 10년 내게 마법을 걸어주었던 그 사람!’
10년 전, 17세의 히엘은 누구였던가. 피가 끓는 소년이었다. 또래들처럼 성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왕성했으며, 그에 따른 욕구를 충족시켜줄 여자들도 차고 넘쳐나던 미소년이었다. 당연히 피임은 중요한 일이었다. 황족의 몸으로 세간에 흉이 될 흔적을 만들어선 곤란했다. 하여 피임마법이 시급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마법 수련생에 불과할 뿐이라 자신이 직접 피임마법을 몸에 두를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음지의 어느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았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지금 그의 새파래진 얼굴은 자신 역시 불법 피임마법을 받았던 것을 시인하는 것이리라. 하리는 도끼눈을 했다.
“저 사람입니까? 폐하의 존체에 몹쓸 마법을 걸어놓고 황족의 씨를 말리게 된 그 분이?”
“응.”
“어떻게 그런……! 그럼 전 평생 아기도 못 가지게 되는 건가요?”
히엘은 번개처럼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제부터 연기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무슨 말이야?”
“그야 당신이 파훼가 안 된다고!”
연기는, 지금부터다!
“내 스스로 다 깨놨지. 날 뭐로 보는 거야? 한 때 마활의 탑이었다고. 진즉에 공부해서 스스로 깼어.”
오늘 거짓말을 두 번이나 하게 된 히엘이었다. 그동안 다망한 국사로 인해 하리를 보러 올 시간도 없었는데, 마법의학을 공부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진짜란 말이죠?”
“응응.”
“흠. 뭐. 그렇다면……, 이거나 한 그릇 더 하셔요.”
하리는 다시 한 번 토마토 스프를 내밀었다. 죄책감이 깊어진 히엘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식도로 내려가는 토마토의 괴상한 맛에 표정이 절로 굳어진다. 문제의 그 뉴스만 아니었다면 당장 하리를 데리고 침소로 갈 예정이었다. 침소로 가서 즐겁게 사랑을 나눌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슴에 무거운 죄를 지고서 사랑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기를 기대하는 아내와 자신, 그리고 황손을 기대하는 제국민들, 태후, 등을 위해서라도, 이참에 즉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휴가 보름동안 달콤한 사랑 나누기와 후계자 만들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지금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굉장히, 작위적인 말이 나왔다.
“흠흠. 오붓한 밤을 위해선 준비가 필요한 법이지. 잠시 기다리시오.”
하리는 히엘이 예전에도 그러하였듯 잠자리를 위해 별의별 요란한 마법 스크롤을 준비해올 거라 생각하며 수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