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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었다. 로리는 시꺼멓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훅 쓸어 올리며 잘난 체를 했다.
“내가 좀 매력적이긴 하지.”
“누나, 혹시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나요?”
“응.”
너무 좋아해서, 네 아버지가 너무 잘생겨서, 한때는 나의 애완견으로 삼으려고도 했단다, 라는 말을 목구멍에서 겨우 삼킨 로리였다. 세드릭은 해맑게 웃으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3년 드릴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3년 지나면 아버지와 연애해도 봐준다는 말이에요.”
그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현재 세드릭의 나이는 서류 상, 그리고 마력성장을 한 사연 상, 열다섯 살로 되어 있다. 그 말인 즉 3년 뒤면 제국 성인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된다는 말. 소년은 3년 동안 열심히 로리의 환심을 사서 성인이 되면 바로 청혼을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소년의 흑심도 모르고 로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야심을 다졌다. 핏빛 강철검 아들이 자신의 연애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매우 기뻤던 것이다.
“너 내 편해라. 알겠니?”
“네. 3년만 참아주세요.”
“근데 폐하께서 이미 나한테 반한 눈치인데 말이야.”
세드릭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웃기는 소리.
***
핀은 수업을 마치고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라브가 어딘가로 따라오라 명령했기에 시간을 지체해야했다. 라브는 그동안 오다가다 마주치며 빈정대는 것 외에 사람을 따로 부른 적이 없었다. 하여 핀은 무슨 일인가 하며 그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들은 합주실에 자리했다. 그곳은 교내에서 버려진 곳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늘 텅 비어 있었다. 핀이 들어오자마자 라브는 합주실의 문을 굳게 잠갔다. 뿐만 아니라 다짜고짜 핀의 셔츠 단추를 끄르기까지 했다. 숨기고 있던 가슴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핀은 당혹스러움과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흐음.”
라브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새하얀 얼굴은 오늘따라 눈밭처럼 더욱 하얘 보이고, 그래서인지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 도드라져있었다. 그 눈동자가 가슴에 난 상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핀은 라브를 내려다보며 눈빛으로 말을 재촉했다. 갑자기 라브가 눈을 치켜뜨고 핀을 보며 웃었다.
핀은 엉겁결에 따라 웃었다. 이 건방진 귀족 도련님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에 대해 뭐라도 눈치 챈 건가? 핀은 만약 라브의 입에서 전대 황제 핀라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한 마디라도 나온다면, 라브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라브는 핀의 가슴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아팠겠다. 전쟁에서 다쳐온 거지? 블랙 유니콘 부대 출신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라브는 셔츠 단추를 다시 여며주고 히죽거렸다.
“몸이 말이야. 근육이 탄탄하고 운동을 오랫동안 한 것 같은게, 딱 군인 몸이야. 게다가 가슴에 이런 상처 달고 다니고, 그리고 또…… 여기 입학하기엔 늦은 나이 등, 뭐 빤하잖아? 블랙 유니콘 부대에서 열심히 구르다가 모은 돈으로 뒤늦게 미술 쪽이나 어슬렁거리고 싶어 들어온…… 아닌가?”
핀은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고작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 여기로 불렀단 말인가? 다행인지 아닌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라브는 책상에 걸터앉아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마력도 약해, 그렇다고 미술을 어릴 때부터 해온 것도 아냐. 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블랙 유니콘에 몸담았다 번 돈으로 귀족처럼 사는 듯한데…… 라이트릭 네 나이 또래의 남자 평민들이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창기 아니면 그 역겨운 부대밖에 없거든.”
핀은 굳이 아니라고 대답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하기야, 레이디 로리의 화보를 본 모든 아이얄 시민들도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하는데, 라브가 뭐라고 눈치를 채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눈치가 상당하십니다.”
“큭, 내 감이 좀 괜찮나보군. 좋아.”
“뭐가 좋단 말씀입니까? 그리고 하려는 말씀이 뭔지요?”
라브는 목에 있는 수정석 목걸이를 빼내고는 씩 웃었다.
“오늘 내 과제 좀 도와줘야겠어.”
라브가 하려고 하는 과제는 간단한 것이었다. 점령지 포로 출신 제국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단 사실을 고발하는 영상을 찍는 것. 당연히 제국 황실에 대한 비판은 기본이었다. 핀이 도와줘야 할 일이란 것은 블랙 유니콘 부대 출신으로서 그 집단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을 하나도 빠짐없이 토로하는 것이었다.
“그 역겨운 부대에서 얼마나 역겨운 일을 해야 했는지 사실대로, 낱낱이 이야기 해주기만 하면 돼. 인터뷰인 셈이지.”
“제가 왜 그런 것을 해야 합니까?”
“너는 일개 평민이고, 나는 귀족이야.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그게 네가 인터뷰에 응해야 하는 아주 단순한 이유지. 다른 이유를 더 말해줄까?”
“…….”
라브는 핀의 가슴에 난 상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억울하지도 않아? 그렇게 다쳐온 거.”
한동안 생각을 하던 핀은 수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브는 아직 자신이 핀라이트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리라. 그런 상황에 굳이 거절을 하는 것은 이상해보일 수도 있었다. 말마따나 저쪽은 귀족이고 자신은 평민으로 살고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해주는 게 나았다.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고, 얼른 집에 가는 것이 편했다.
“알겠습니다. 인터뷰 해드리죠.”
그렇게 블랙 유니콘 부대의 병사로 살아온 평민 남자 라이트릭 에센의 ‘거짓’ 고백은 시작 됐다.
“블랙 유니콘 부대는 끔찍한 집단입니다. 방화, 강간, 고문, 여러 왕국의 문화유산 파괴 등등, 하나하나 그 악행을 짚어 말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죠. 제국의 영웅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륙의 악인 것은 확실합니다. 저도 그 부대의 한 사람으로서…….”
길게 이어진 고백에 감정이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핀은 기계처럼 블랙 유니콘을 험담했다. 한때는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였지만 이젠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욕을 해야만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제국에 해가 되는 일 아닌가?
그러나 어차피 라브는 한낱 학생일 뿐이다. 라브가 찍은 영상이 제국에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핀은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라브는 핀을 찍고 있던 수정석을 거두며 씩 웃었다.
“과제 끝낼 수 있었다. 고마워.”
늘 건방졌던 라브가 처음으로 고맙단 말을 하자 핀은 멋쩍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너나 나나 참 불쌍한 인간들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너 징병되어서 간 거라며?”
“네.”
“원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그 더러운 전쟁에 참가했으니 불쌍한 거지. 그래도 넌 적어도 보상이나마 제대로 받고 사네, 난 말이지…….”
라브는 말끝을 흐렸다. 폐허가 된 고향과 전쟁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리던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나이답지 않은 피폐한 웃음이 머물고 있는 걸 핀은 분명 보았다. 라브는 출입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핀에게 인사했다.
“이 과제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다 네 도움이라 생각할게. 이 영상 하나로 제국이 뒤집어질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언제 한 번 공짜로 안겨줄까? 너…… 꽤 내 타입이거든.”
같은 사내에게서 ‘안겨줄까’와 같은 말을 듣다, 라…… 핀은 잠시 라브가 혹시 남장여자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
성인 다리 길이만한 것에서부터 아이 팔만한 것까지, 길이가 제각각인 냉열석들이 짙푸른 빛깔을 발하며 창문과 현관문 곳곳에 세워졌다. 이렇게 공기가 들어오는 모든 곳에 냉열석을 세워두면 찬바람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더위를 나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핀은 이런 방식이 재미있었다. 황궁에서는 언제나 마활들이 냉기 마법을 걸어두고 유지를 해왔었는데…….
“다음에는 지붕 색깔이랑 같은 붉은색 냉열석을 사와야겠구나.”
핀의 말에 세드릭은 별 걸 다 미리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외출 준비를 했다. 최근 들어 세드릭은 말수가 줄어들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등 사춘기 소년답게 굴었다.
“티에리아, 어디 가?”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사실은 루비와 만날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핀은 눈을 내리깔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들은 방학에, 자신은 휴가인데, 매일 따로 지내는 것 같아 내심 섭섭했다. 그런데 오늘 세드릭이 분명 천 조각 자르는 걸 도와준다고 한 것 같은데……? 핀은 약속을 떠올리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오늘 내 작품 만드는 거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었어?”
그랬던가? 하지만 세드릭의 머릿속은 온통 루비 생각뿐이었다.
“저녁에 해드릴게요.”
“됐어.”
핀은 아들의 배신에 적잖이 실망했다.
“삐치셨나요?”
“아니.”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세 번이나 노크했다. 똑똑똑- 급한 듯 연달아 나온 노크. 핀은 그 소리를 듣고 방문자를 어렴풋 예측하고 말았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로리뿐이었고, 그 목적은 오직 마력 화산에서 하는 사냥 때문이리라. 그는 다락방으로 도망치듯 올라가며 세드릭에게 부탁했다.
“나 찾으면 없다고 해.”
그는 그녀와 사냥을 나가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거절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고 사냥가자고 하는 숙녀에게 ‘너나 가’라고 차디차게 말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런 평범한 남자로 전락한 핀은 지금처럼 도망을 가는 방법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다락으로 올라가자마자, 세드릭은 손님을 맞기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핀의 예상대로 방문자는 로리였다. 그녀는 이 더운 여름날 무거운 물건을 드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트렁크에는 경갑 풀 세트가 한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소년에게 인사했다.
“안녕? 너희 아버지는?”
세드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버지가 집에 없다고 알렸다. 소년은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신이 아닌, 아버지 핀을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술술 거짓말이 나오고 있었다.
“궁에서 백부님이 부르셔서 가셨어요.”
“으흠. 그렇단 말이지?”
“네.”
로리는 짜증이 났다. 핏빛 강철 검과 마력 화산에서 사냥을 즐기려고 이렇게 더운 날 몸소 왔는데, 이미 마차도 대공저로 돌려보냈는데……! 그녀는 트렁크를 현관에 방치해둔 채로 선글라스를 벗어 손으로 뱅뱅 돌렸다. 그리고 꿩 대신 닭이라고 핀을 닮은 그 아들 세드릭과 시간을 보내려 물어보았다.
“넌 오늘 뭐해?”
“친구 만나러 가요.”
“여자 친구?”
“지금 여자 친구는 아니고 예전…….”
“예전 여자 친구를 왜 만나?”
“다시 사귀자고 해서요.”
로리는 코웃음을 쳤다.
“풉! 다시 사귀자고? 그래서 넌?”
“네?”
“그 애가 좋냐, 이 질문이야.”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만나보면 알 것 같아요.”
“넌 자존심도 없어?”
둘의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다락에 숨어 있던 핀도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던 일들을 가족도 아닌 로리에게 낱낱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좋으니까 다시 사귀자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한 번 만나 보려고요.”
로리는 어차피 핏빛 강철 검과 사냥도 못하겠다, 이판사판으로 세드릭에 대한 오지랖을 넓히기 시작했다.
“루비, 그 아이 좀 고약한 계집 같군. 감히 전 황태자를 뻥 차버려 놓고서 다시 가지고 놀려고 사귀자고 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 한 번 보자! 가자고!”
로리는 마치 세드릭의 엄마라도 된 듯 소년을 끌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