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회 -->
라브는 다른 학생들에게 자유과제를 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었지만, 순 거짓이었다. 그는 틈틈이 포로출신 제국민들의 다큐를 찍으며 과제를 하고 있었다. 그 일은 그리 시간이 많이 들진 않았다. 밤일을 하며 오다가다 만나는 밑바닥 인생의 포로출신들이 넘쳐났으니, 라브는 그들에게 영상구 렌즈인 수정석을 들이밀며 일상적 대화를 가장한 인터뷰만 하면 되었다.
그 날도 라브는 블랙 유니콘 병사들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가진 포로 출신 노인들을 인터뷰한 뒤, 지친 몸으로 귀가를 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패션 스트리트를 지나가게 됐는데 곳곳에 레이디 로리의 포스터가 있었다. 학교에서 많은 여자들이 수군거리긴 했었다. 라이트릭 에센이 레이디 로리의 화보를 찍었다고. 하지만 라브는 다른 일들에 바빠 그런 것에 잘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그 화보를 마주한 순간, 라브의 걸음을 멈출 만큼 놀라고 말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생겼던가.’
그는 ‘라이트릭 에센’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라이트릭의 옆에 있는 검정 머리카락 미녀 역시 꽤나 그와 어울려 보인다. 학교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제대로 화장을 하고 화보에 찍힌 라이트릭의 얼굴은 낯설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짧게 쳐진 금발, 푸른 눈, 날카로운 턱선, 가슴에 난 심상치 않은 상처, 아무리 보아도 라이트릭 에센은…….
‘이건…….’
라브는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왜 그토록 그 남자를 괴롭히고 싶어 했었는지.
***
‘정말이지 아버지께서는 어째서 그런 사진을 찍으신 거야!’
세드릭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정체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시라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레이디 로리의 화보를 찍어 얼굴을 만 천하에 공개해버렸다. 너무나 야속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얼굴에 변화를 주었다 해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누구 하나라도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남자가 핀라이트라는 알게 된다면, 부자의 평온한 생활은 거기서 끝날지도 모른다.
소년이 며칠 동안 화가 난 채로 있자 핀은 처음엔 참아주다가 결국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남자애가 너무 소심해도 매력이 없다. 루비가 왜 널 떠났는지 알 것도 같군.”
“루비라니요?…… 제 일기장을 훔쳐보셨군요! 다시는 제 방에 오지 마세요!”
그것을 시작으로 부자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며칠 후 핀은 아버지답게 먼저 화해를 시도 했다. 그는 밤에 아들의 방으로 들어가 한 침대에 누워 싱거운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구구절절, 살가운 말 같은 거 하나 없이 부자는 화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세드릭은 아버지의 하체에 짓눌린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핀의 몸은 너무나 무거워 소년의 허리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으, 아버지…….”
게다가 핀은 난폭한 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꿈에서 전쟁이라도 하는지 거칠고 사납게 사지를 휘두르며 잠을 잤고, 그 탓에 세드릭의 몸은 안 쑤신 곳이 없었다. 소년은 아무리 아버지가 좋아도 이제부터 같이 자는 것은 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핀을 불렀다.
“다리 좀 치워주세요, 허리가 너무 아프잖아요.”
하지만 핀은 대답 대신 이를 갈기 시작했다. 결국 세드릭이 조금 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버지!”
“어, 어…….”
서릿발 같은 외침에 몽롱한 대답이 나왔다. 세드릭이 허리를 매만지며 심상치 않은 듯 증상을 하소연했다.
“저 허리가 이상해요. 너무 아파요.”
“어, 왜…….”
갈라진 목소리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 같다. 세드릭은 심통이 났다. 꽃다운 나이에 허리 질환을 앓을 것 같아 불안한데 아버지의 속 편한 목소리가 얄미웠다.
“허리가 아프다니까요.”
“어…….”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요.”
“어어, 그래……, 5분만.”
“심각한 척추 병이 온 것 같은데요.”
“내일 오라…… 그러면…… 안 될까.”
재미도 없고 싱거운 대답이라니. 이토록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라니. 솟아오르는 실망감에 소리가 빽 하고 나왔다.
“계속 주무실 거예요!”
그제야 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와 꿈결을 걷는 듯 몽롱한 눈빛이 아침 햇살과 어우러져 뭇 여성들의 가슴을 살살 녹일 모습이지만, 그 흐트러짐을 용납할 수 없는 세드릭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허리가 너무 심하게 아프다고요! 학교를 못 갈 것 같아요!”
“아, 허리가 아프다고? 흠…….”
핀은 목을 주무르며 남은 잠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과제를 제출하러 학교에 가야한다. 그 뒤, 회사에 가서 다음 시즌 컨셉 회의를 해야 한다. 말단 디자이너지만 장신구 디자인에 꽤나 좋은 평가를 받아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의 일과는 그러할 진데…….
하지만 아들이 허리가 아프다고 하니, 학교와 회사 중 하나는 일정에서 제외시키고 간호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정에서 제외시켜야 할까. 자신을 약 올리기 좋아하는 라브라는 청년이 있는 학교를 안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매우 성가시게 구는 대표가 있는 회사에 안 가야 할 것인가?
당연 회사를 빼먹어야 하리라. 대표 로리의 허락 따위는 그에게 필요치 않았다. 언제부턴가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이 그녀, 로리가 된 것이다. 핀은 학교 갈 준비만 간단히 하고 바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오늘 학교 쉬려무나. 수업 받고 와서 간호해줄게. 계속 아프면 나랑 병원에 가보자. 2시간쯤 지나서 집에 올게.”
“음식은 그냥 사오세요. 괜히 요리 재료 사오시지 마시고.”
“그래.”
핀이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문 앞에 한 사람의 방문자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로리였다. 그녀는 뺨에 꽃물처럼 빨간 홍조를 드리우곤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녀를 마주한 핀은 석상처럼 굳은 표정을 했다.
‘당황스럽군.’
전 황제라는 걸 알지 못했을 때는 사람을 개처럼 대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 자신이 개가 된 듯하다. 커다란 눈을 귀엽게 뜨고선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눈빛을 쏘아댔고, 가녀린 몸은 어딘가 간지러운 사람처럼 배배꼬고 있었다. 그 낯선 태도에 핀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대표님.”
“오늘 컨셉 회의인데…….”
“그런데요.”
“어차피 나나 에센 당신이나 회의에서는 별로 할 일도 없으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녀는 자신이 컨셉이나 디자인 회의를 할 때 꿔다 놓은 곡물 자루처럼 가만히 있었기에 부하직원인 핀 역시 회사에서 매우 한가한 줄로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핀을 발 닦는 용도로나 썼으니 오죽하랴.
“그래서 하는 말인데, 괜찮다면 저번에 갔던 곳 다시 가면 안 되겠나, 에센?”
저번에 갔던 곳, 바로 마력 화산. 그랬다. 그녀가 품고 있는 기대감은 그곳에 가서 사냥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애완견 삼고 싶은 미청년과 함께 다시 한 번 그곳에 가서 짜릿한 사냥 쾌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 뱀…… 또 잡고 싶은데 말이야.”
“그렇군요.”
핀은 가슴도 거의 회복되어서 그러자고 하고 싶었다. 마력 화산에 가서 대표 로리를 조련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아들의 간병이 가장 중요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곤란합니다. 세드릭의 몸이 좋지 않아 제가 일찍 귀가해서 돌봐줘야 합니다만.”
“아, 그렇군. 그렇다면 말이야. 내가 세드릭 군을 돌보아주어도 괜찮겠나.”
지나친 친절 아니, 오지랖이었다. 로리는 마담 젤레테스의 지휘 아래 레이디 로리의 화보를 찍으며 핀과 포옹하고 이마에 키스를 받고 별의별짓을 다 하다 보니 이제 그의 아들 세드릭의 간병을 해주어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핀이었다. 대표랍시고 사생활을 깊게 침해하려 드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로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참에 로리를 부려먹고 싶은 심술이 더 크게 작용했다.
“좋습니다. 제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만 그 아이를 좀 봐주십시오.”
좋지 않은가. 이제는 자기 자신이 개 조련사가 되어 ‘똥개’ 로리를 훈련시키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발 닦는 데 이용했던 것처럼 자신도 그녀를 사소한 것에 이용할 것이다. 그러한 속도 모르는 로리는 핀의 허락을 매우 자기중심적이고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핏빛 강철검이 나에게 반했군, 후후.’
그녀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제 호위 병사에게 물러가라 전한 뒤 집안으로 들어왔다. 핀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중히 부탁했다.
“바빠서 아침 식사며 청소며 설거지며 아무것도 못해주고 갑니다. 부탁합니다. 세드릭은 위장이 안 좋으니 소화하기 좋게 부드러운 음식으로 해주십시오.”
부탁이긴 하나 본질은 명령과 다름없는 가사노동! 그런데 로리는 두 팔을 걷어붙이며 열정을 보였다.
“맡겨만 다오.”
‘정말이지 시키는 일은 다 할 기세군. 좋아.’
핀은 기분 좋게 학교로 갔다.
그가 떠나자마자 로리는 어떻게 이 집안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정체를 꽁꽁 숨겨야 하는 처지의 남자, 핀라이트가 사는 집이니, 대공가의 시종을 부려서 가사를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자신의 마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간단한 마력 정제를 거친 뒤 온 집안을 정화하여 유해한 기운부터 없앤다. 그 뒤 물건을 정리하고 세드릭의 척추도 제대로 끼워 맞춰 준다. 잡다한 일들에 마력이 금세 소모되었다. 그녀는 이제 직접 소매를 걷어 올리고 요리를 시작했다. 맛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양배추 스프를 만들었다. 그것을 맛 본 세드릭은 입안에서 펼쳐지는 지옥에 죽을상을 할 뻔 했다. 하지만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웃었다. 왜?
로리가 예뻤기 때문이다.
사춘기 소년에게 예쁜 소녀 로리는 굉장한 존재였다.
로리는 세드릭이 양배추 스프를 맛있게 먹어주자 뿌듯했다. 어차피 이곳에는 단 둘밖에 없으니 그녀는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편하게 호칭을 사용했다.
“황태자 전하, 맛있니?”
세드릭은 양배추 스프를 씹지 않고 그냥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나. 정말 여태 태어나서 이토록 신선한…… 양배추 스프는 처음이에요.”
“칭찬 고맙구나. 호호호.”
“그러니 누나도 좀 드셔보세요.”
“됐다. 나는 요리를 하느라 냄새에 질려 별로 식욕이 없군.”
“하하…… 저기, 누나 솔직히…….”
“솔직히 뭐?”
“누나를 맨 처음 봤을 때는 말이죠. 우리 아버지에게도 막 대하고, 소리도 고래고래 지르고, 뭔가 좀 이상해보여서 미친 여자인줄 알았거든요. 어떤 미친 여자가 노숙을 하다가 학교에 온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미친 여자 취급당한 로리의 표정은 굳어버렸다. 세드릭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정말 이제 보니 누나는…… 진짜…… 매력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