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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너무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에 눈을 떠 조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된다. 제국에는 아직도 그가 처리해야 할 골치 아픈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포로 문제, 낙후된 지역들의 발전 문제, 그리고 마활의 업무 등 모든 것에 세세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황후와 달콤한 오수도 느긋하게 즐길 수 없었다. 그나마 가끔씩 마법영상구를 이용하여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부부애를 다질 수 있는 시간의 전부였다.
“폐하, 안마를 받으실 시간입니다.”
오랜만에 여유시간이 생기자 시종들이 피로회복을 위해 안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엘은 이런 귀한 시간을 안마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시종들을 물렀다.
혼자 남은 그는 무심코 마법영상구를 켜보았다.
‘응? 이건 뭐야?’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마법영상구 속에서 눈에 익은 두 남녀가 연인처럼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젤레테스 대공가의 꽃 로가드리아와 평민 출신 모델 라이트릭 에센의 화보 현장으로 가 보시죠. 이들은 레이디 로리의 패션쇼에서 호흡을 맞춘 뒤로 아이얄에서 가장 뜨거운 커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로가드리아 님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고 남자들 역시 라이트릭 에센처럼 아름답고 높은 신분을 가진 여성분과 사귀려 혈안이 되었다죠. 이들이 입은 의상 또한 대륙의 절대자 드래곤께 바쳐지는 공물이라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요, 브랜드 명 레이디 로리의 의상은 모두 아이얄 전역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
영상구 속 나레이션을 듣고서야 히엘은 알 수 있었다.
‘이게 레이디 로리 패션쇼 그 후에 아이얄 전역에 퍼졌다는 그 홍보 영상인거로군?’
화면 속 ‘라이트릭 에센’으로 불리는 핀은 처음부터 모델이라 해도 될 만큼 완벽하고 멋진 그림을 연출해고 있었다. 로리 역시 미모가 뛰어나 그 둘의 조합은 그야말로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저렇게 연인처럼 화보를 찍다가 정이 들어 진짜 사귈 수도……, 히엘은 그렇게 되길 바라며 흡족한 듯 웃었다.
‘저 정도면 녀석이 잘 적응을 하는 것 같군. 그럼 난 하리와 낮잠을 자러 가볼까.’
히엘은 황후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곳엔 하리가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본궁 침소에 가셨습니다.”
황제도 없는데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에 가 있다? 그것은 하리가 본궁 침소 안 욕실 벽면에 있는 가공간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얼마 전부터 하리가 며칠에 한 번 간격을 두고서 그곳에 가도 되느냐 물은 적이 있었고 황제 자신이 그것을 허했던 적이 있었었다. 망설일 것 없이 히엘은 가공간 속으로 이동했다.
언덕 집으로 걸어가는 히엘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이 얼마 만에 즐기는 황후와의 낮잠 시간인가! 싱글벙글거리며 그가 현관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두 남녀의 대화가 문밖으로 새어나왔다. 하리와 핀의 목소리였다.
“어머, 핀! 이 천 참 예쁘네! 보는 눈이 높아진 것 같아.”
“그럼.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저절로 높아질 수밖에 없더라.”
“그래? 레이디 로리에서 원단 디자인도 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보는 게 많잖아. 그런데 하리, 이것 좀 봐줘. 어때?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나온 신작 시리즈 원단이야. 프린트가 아주 예술이지. 너도 구해다줄까?”
“어머! 그렇다면 아주 고맙지!”
세상에나, 원단 이야기를 저렇게 신이 나게 할 수 있는 건가? 그건 그거고 이 은밀한 공간에서 저들은 뭘 하는 거야? 정말 고작 저런 원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고 있는 거야? 히엘의 표정이 배신감으로 얼룩졌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뗀 그는 엽궐련을 꺼내 조용히 피워댔다.
‘이러려고 가공간을 이용하겠다고 한 거야? 하! 누군 바쁜 시간 쪼개서 같이 있으려 왔는데 저렇게 핀과 바늘이나 잡는다니, 정말이지 실망이군!’
하리와 핀의 대화는 끊임없이 문밖으로 새어나왔다. 주로 하리가 말하고, 핀이 대꾸를 하는 식이었다.
“마법영상구에 내 졸업사진이 그렇게 퍼질 줄 누가 알았겠어?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서 내가 동창생들에게 말했지. 사진을 퍼뜨린 애를 알려주면 황궁 관광 한 번 시켜주겠다고. 그랬더니 다들 실토를 하는 거야. 범인은 글쎄 누군지 알아?”
“음, 누군데?”
“세상에나! 나와 제일 친했던 친구였지 뭐야! 그 아이를 불러 차를 마셨지. 왜 하필 많고 많은 사진 중에 그런 찢어 불태우고 싶은 사진만 올렸느냐고 웃으면서 넌지시 따져보았어. 그랬더니 걔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면서 울며 비는 거야. 그렇게 심하게 울 줄은 몰랐어.”
“응, 그랬구나. 그 친구가 잘못했네.”
“일단 걔를 달랬지. 그리고 딱히 벌할 생각으로 부른 것은 아니라고 해줬어. 다음부터는 옛날 사진을 올리더라도 좀 잘 나온 걸로 올려달라고 너스레를 떨어보았지. 걔가 앞으로는 그러겠다며 엉엉 우는 거야. 사실 내가 황후가 된 게 무척이나 배가 아팠다나 뭐라나.”
“응, 그럴 수도 있겠다. 여자들은 그렇다고 하더군.”
“그리고 한번은 말이야, 시종들과 이런 일도 있었어…….”
세상에, 바느질을 하는 건지 수다를 떠는 건지! 히엘은 말수가 적은 줄 알았던 하리가 저토록 말이 많을 수 있단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엽궐련이 다 탔고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도 핀은 놀란 기색 없이 살짝 눈짓으로 인사했다. 하지만 하리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입을 열었다.
“폐하, 어떻게 여기를!”
“황후.”
새삼 근엄함을 연기한 히엘은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 테이블의 흔들의자는 하리와 핀이 앉은 단 두 자리뿐. 히엘은 할 수 없이 주방에 있는 작은 스툴 하나를 마법으로 이동시켜 그 위에 앉았다. 흑색의 멋진 제복을 입은 그가 등받이와 팔걸이도 없는 낮은 스툴에 앉는 것은 황제로서, 남편으로서, 형으로서, 너무나도 품위가 깎이는 일이었다. 그가 핀을 슬쩍 노려보며 하리에게 물었다.
“황후는 어째서 여기서 바느질을 하는 거요?”
히엘은 태후나 고관들이 아닌 이상 공, 사적인 곳 두루두루 평민 말투를 사용하기로 유명한 황제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렇게 근엄한 말을 어색하게 하자 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서 바늘을 놓은 하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그게 사실은…… 며칠에 한 번씩 바느질 수업을 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만.”
바느질 수업? 설마 핀과 단 둘이 그걸 하겠다는 건가? 그러기 위해서 이 가공간을 사용하겠다고 한 건가? 히엘은 고운 두 눈을 부라렸다.
“그런 것을 나와 상의도 없이? 황후, 진짜 이러기요?”
“분명 저번에 말씀드렸을 때 폐하께서 그러라고 하셨습니다만.”
바빴던 히엘은 그런 것을 일일이 기억할 정신이 없었다. 이럴 때에는 무조건 잡아떼는 것이 최고였다.
“무슨 말이오? 나는 분명 처음 듣소만.”
그러자 핀이 누비고 있던 작품의 가장자리 처리를 하며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하자고 했어.”
히엘은 두 바느질 인간들을 찌릿 노려보았다.
“황후는 저 ‘평민’이 하자고 한다고 해서 하는 게요? 황후에게는 바느질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소? 렌키스의 퍼레이드도 곧 열릴 것이고, 전 가이덴 대성당에 만들어진 보육원 행사에도 간다고 준비해야 할 것이 있지 않았소? 제대로 준비는…….”
“폐하. 그런 것은 전부 정오 전에 다 해둡니다. 식순도 다 외웠고 의상도 준비해놨고 그냥 기다렸다가 시간이 되어 참가면 하면 될 일입니다만.”
오죽 할 일이 없으면 이런 오후에 바느질을 다 하겠느냐는 듯한 말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황후로서 정말이지 허망할 정도로 별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주어진 일이 있으면 눈 뜨자마자 처리를 해버렸던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이 늘 정오가 되기 전에 끝이 났고, 그때부터는 빈 시간일 뿐이었다. 남편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외롭고 심심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그녀에게 이런 바느질 시간만이 소중한 여가 시간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히엘은 끄응- 하는 소리를 삼키다가 공격 방향을 핀에게 재조정했다.
“넌 젤레테스 가의 그 계집애가 안 찾아? 여기서 이럴 시간 있어?”
“쇼도 끝났고 딱히 할 일도 없어.”
“그렇단 말이지.”
어떻게 하면 핀을 빨리 쫓아버릴 수 있을까. 직장 문제를 걸고 넘어져? 렌키스의 로리 패션쇼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그 일을 핑계삼아 보내버리기엔 이상했다. 그리고 학교 문제도 핀 본인의 학업이니 딱히 시비를 걸 수 없다. 그렇다면?
“심장은 괜찮냐? 괜히 아픈 몸으로 무리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지?”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갑자기 왜 안 하던 걱정을 하고 그래?”
“형이 동생 걱정하는 게 왜?”
“웃겨서.”
히엘은 동생을 쫓아낼 궁리를 하느라 이마에 주름이 늘어났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야 얼마든지 악독하고 유치한 작전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동생의 소변보는 영상을 찍어두지 않았던가? 귓속말로 그것을 들먹이며 ‘온 제국에 그 영상을 퍼뜨리기 전에 얼른 여기서 꺼지라’ 말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작전을 쓰는 것은 치사하고 품위가 상했다.
히엘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하리는 핀과 함께 다시 수다를 떨어댔다.
“그런데 핀. 여자 친구랑 사냥 안 나가? 이런 시간에 바느질 하고 있는 거…… 여자 친구는 알아?”
“여자 친구? 누가?”
“저번에 사냥 간다고 데리고 왔던 아가씨 말이야.”
핀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째서 그 오만방자한 귀족 아가씨가 내 여자 친구가 되어야 하는 건가. 단지 사냥 한 번 나간 것으로 여자 친구 취급이라니. 핀은 확실하게 말해두었다.
“여자 같은 거 흥미 없어. 그 여자는 내 직장 상사일뿐이지.”
“아냐? 분명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히엘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법영상구를 급하게 이동시켰다. ‘심심한데 재미있는 거나 볼까?’라고 중얼거리며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행동이 아주 의뭉스러웠다. 핀은 히엘에게 물었다.
“히엘, 딴청 부리지 말고. 대체 하리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 여자가 내 여자 친구라니?”
히엘은 마법영상구 속에서 레이디 로리의 포스터가 나온 화면을 찾아 하리에게 보란 듯 들이밀며 핀의 말에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여기 있잖아. 네 여자 친구.”
그러자 하리가 마법영상구 속, 연인 포즈를 하고 있는 핀과 로리의 화보에 집중하며 말했다.
“아니, 이 커플은…… 정말 잘 어울리잖아!”
산뜻한 색채에 심플하면서도 야성미가 드러나는 디자인의 옷들을 걸친 핀이 사랑스러운 레이디 로리의 드레스를 입은 로리를 뒤에서 안거나, 이마에 키스를 하거나, 손을 잡고 푸른 들판을 뛰어가거나, 형형색색의 풍선 가득한 욕조에서 다정하게 껴안고 있거나, 얼굴을 부딪칠 듯 가까이 대고 막대 회오리 사탕 하나를 핥으며 웃고 있었다. 아무리 콘셉트로 찍힌 장면들이라지만 너무나 잘 어울려 실제 연인 같았다. 하리는 그러한 장면, 표정을 연기할 수 있는 핀이 새삼 놀라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준수한 외모의 모델을 보고 그 누가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 생각할 것인가. 저런 장면들이 버젓이 아이얄에 이곳저곳에 보여지고 있어도 그 누구도 그의 비밀을 눈치 챈 사람이 없다는 것 역시 하리는 신기했다.
하지만 핀은 그런 장면들을 하리에게 보여주는 히엘의 속내가 자못 궁금했다. 하필이면 런웨이를 걷는 모습을 빼놓고 마치 저런 연인 콘셉트의 화보만이 전부인 양 들이미는 것이 살짝 유치한 것 같아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난해, 히엘?”
“뭐얼?”
“이건 업무상 어쩔 수 없이 했던 거잖아. 여자 친구는 무슨 여자 친구야.”
히엘은 손뼉을 치며 갑자기 외모에 어울리는 여자 흉내를 냈다.
“어머! 어머! 아무리 업무라도 포옹이라니! 키스라니!”
“키스 한 사진은 없어. 그 여자와 키스한 적도 없어. 멋대로 말 지어내지 마.”
코웃음을 치는 히엘이었다.
“푸후- 사탕 하나 둘이서 빨면 그게 키스지, 뭐! 업무라고 둘러대면 갈 때 까지 가는 짓도 서슴없이 할 남자네, 참, 나! 아무리 일이라도 마음이 있으니 이렇게 하는 거 아니겠어? 응응?”
“진짜 이렇게 유치하게…….”
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마법영상구를 뚫어져라 보던 하리가 감탄을 내뱉었다.
“진짜 잘 어울린다, 핀! 벌써 커플 사진까지 찍고…… 이거 티에리아는 봤니? 뭐래? 아, 근데 갑자기 티에리아 생각을 하니 무조건 이 사진들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네. 사실 이거 그때 네 여자 친구 처음 볼 때부터 생각한 건데, 음…… 너, 아무리 ‘홀아비’라고는 하지만…… 너무 빨리 여자 친구 만드는 건 아니니? 여자로서 조금 실망이다…….”
드디어 히엘은 킥킥거리며 웃을 수 있었다. 한숨을 쉬는 핀이었다.
“하리. 이건 그냥 일에 불과해. 여자 친구 따위, 그런 관계에 신경 쓸 정신이 없어. 난.”
그때 히엘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공격했다.
“그럼 바느질할 정신은 있고?”
핀은 히엘의 눈을 외면하며 해명했다.
“나도 느긋하게 쉴 시간은 필요해.”
바느질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그게 바느질이냐? 내 아내와?”
히엘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짙게 배어있었다. 핀은 히엘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질투야?”
“질투를 일으킬 만한 일을 저질렀단 자각은 있나 보지?”
“고작 이렇게 바느질 하는 건데. 히엘이 조급해할 만큼 하리에게 못해줬던 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