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85화 (85/123)

<-- 85 회 -->

레이디 로리의 패션쇼가 열리는 오늘, 안개꽃처럼 화사한 아침 햇살이 맑은 날씨를 예고했다.

세드릭은 부지런히 과일주스를 만들었고, 그것을 받아 마신 핀은 학교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사실 전날 로리를 데리고 사냥을 나간 뒤 후유증으로 심장이 아파 쉬어야했지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레이디 로리의 패션쇼에 자신이 디자인했던 장신구도 나가게 될 예정이라 신경이 쓰였고, 학교에 결석을 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로리의 상태가 어떤지 점검도 해야 했다.

“주스 잘 마셨다. 맛있구나.”

핀은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본 뒤로는 무얼 먹든 맛있다고 해주었다.

“더 드세요.”

“난 이걸로 됐어. 너 마셔라.”

핀을 보는 세드릭의 안색은 어두웠다. 핀도 그것을 느꼈다. 아들을 키우고 싶어서 함께 살자고 권했던 사람은 자신인데, 아침 식사며 빨래며 온갖 집안일은 아들이 다 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신경 쓰였다.

“티에리아, 네가 원하면 시종을 다시 부르는 것은 어떨까 하는데.”

“그런 것은 됐고, 아버지 호위 병사나…….”

“아무튼 다녀오마. 생각해봐.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하다.”

세드릭은 핀의 뒷모습을 야속하단 듯 바라보았다.

***

인기인은 어딜가나 피곤했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핀을 둘러싸고 질문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라이트릭 오빠, 이번 자유 과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 회사 행사 스케치 한 걸로 제출 할 겁니다만.”

“와아, 레이디 로리 패션쇼 말이죠?”

“멋지시다. 바로 현장에서 과제하시고.”

몸이 아파 학교에 안 나오던 미청년이 이렇게 다시 등교하니 그들은 너무나 반가워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조잘조잘 말하는 그들을 일일이 상대하기 버거운 일이었다. 핀은 낮은 한숨을 쉬었고, 그때 누군가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참견했다. 반항기 어리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핀 못지않게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라브였다.

“얼마나 뒷배가 좋은 평민이신지, 과제 따위는 날로 먹어도 그냥 넘어간단 말이지. 스케치? 흠. 드로잉 기본도 안 되면서 뭘 한단 말이지?”

핀이 황실 재단의 후원을 받는 장학생임을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라브를 따르는 여학생 무리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등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핀 파의 소녀 중 한 명이 따지듯 물었다.

“그럼 라벤더 님께서는 어떤 걸로 하실 생각이세요?”

“라벤더는 왠지 또 재미난 영상 찍어올 것 같은데.”

“뭘 하든 라브가 하는 건 기대되긴 해.”

당사자인 라브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영상 따위 찍을 시간 없어. 그래서 그냥 남이 만든 과제나 빼앗아서 내 이름 달고 낼 거야. 에센 저 녀석이 한 걸 가져가는 것도 괜찮겠지. 혹시 알아? 큰 점수를 얻을 수 있을지. 킥.”

그러자 핀 파의 소녀가 라브를 흘겨보며 따졌다.

“어머, 그건 명백히 도둑질 아닌가요?”

그러자 라브는 대꾸는커녕, 핀을 처음 만나던 날 새치기하던 그 때처럼, 심술궂은 미소를 짙게 날리며 가던 길을 갔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핀의 눈에 날카로운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

레이디 로리의 쇼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직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표 로리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지금 로리는 쇼를 앞두고 기분이 최악이었다. 그렇잖아도 핀과 함께 마력 화산으로 사냥을 가고 돌아왔던 날 마담 젤레테스에게 정숙치 못하다고 ‘사랑의 구타’를 당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나빴는데, 그것보다 더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너희들은 다 해고야! 쇼를 4시간 앞두고 모델들의 반 이상이 배탈이 났다는 게 말이 돼? 앙?”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동창회까지 열어서 병풍역할을 맡겨두었던 귀족들도 모조리 개인사정을 들먹이며 불참을 선언했다.

모델도 없고, 관람자들도 없다. 그렇다면 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이 모든 위기 상황을 마담 젤레테스가 듣게 된다면 그녀는 ‘일 똑바로 못 한다’며 또 한 번 딸을 구타할지도 몰랐다.

결국 로리는 뛰어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기로 했다. 불참한 모델들 대신 무대에 서려는 것이다. 비록 마담 젤레테스에게 맞아서 눈두덩이 새파래지긴 했다. 그 멍 자국을 마법으로 지우려 시도했지만 마력 화산에서 사냥할 때 마력을 너무 소모한 탓에 회복 중이라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글라스라는 물건이 있잖은가? 가리면 될 일.

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로리에게 눈치 없는 제안을 했다.

“대표님, 이렇게 된 이상 대표님께서 직접 쇼에 모델로 서심이 어떠신지요? 얼른 그 선글라스를 벗으시고 옷을 갈아 입으시…….”

“너 따위가 내 선글라스를 왜 벗으라, 마라야? 감히?”

“예? 하지만……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남은 4시간 동안 어떻게든 모델들을 다시 구해봐야겠네요. 흠흠.”

“무슨 개소리야? 나보다 못생긴 것들이 우리 레이디 로리 옷을 입고 쇼에 설 바에는 차라리 내가 서는 게 훨씬 낫다고!”

그럼 어쩌라는 거야? 직원들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로리는 이어서 말했다.

“선글라스는 벗지 않겠어. 이대로 레이디 로리의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서겠어.”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드레스, 레이스와 프릴이 치렁치렁 장식된 드레스에 선글라스를 고집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한탄을 했다.

‘우리 브랜드는 이제 망했구나!’

때 마침 수업을 마친 핀이 쇼를 돕기 위해 행사장으로 왔다. 태양 같은 미청년인 그의 등장에 여직원 하나가 미소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환영했다.

“어머나! 에센 씨 오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핀은 직원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대표 로리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 뒤 고개를 드는데 어쩐지 로리의 선글라스가 뒤늦게야 낯설어 보이는 것이었다.

거대 독사의 마력이 로리의 눈을 공격하기라도 했던 건가? 분명 그날 히엘이 로리에게 강력보호막을 둘러준 덕분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핀은 로리가 무엇 때문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건지 궁금해져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을 터. 로리는 딴 곳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에센. 좀 더 쉬지 않고요?”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표가 평소 애완견이라 부르던 평민말단직원에게 제대로 성을 붙여 호칭하고 존대하는 것이 매우 놀라웠기 때문이다.

‘저 여자가 미쳤구나!’

‘뭐지? 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혹시 라이트릭 에센이 대표를 굴다리에 불러 패버린 것은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돌변할 수 있는 거지?’

핀은 돌처럼 굳은 표정을 했다. 그렇게나 티내지 말라고 했거늘, 차라리 예전처럼 애완견으로 불리며 막 대해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는 로리의 손목을 잡고 어딘가 으슥한 곳에 데려가서 ‘호칭을 원래대로 하라’고 협박을 하려 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나 많다. 다짜고짜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 보다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

“대표 님.”

“예, 에센 님.”

예, 에센 님? 핀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제가 새로 디자인해놓은 것이 있는데 좀 보러와 주시겠습니까? 탈의실로 말입니다.”

쇼를 앞둔 시점에 디자인을 보여주겠다며 탈의실로 가자는 말. 그것은 직원들의 눈에는 애완견으로 불리던 평민 미청년이 더러운 성격의 귀족 아가씨를 역조련 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여직원들이 꺄아-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로리는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말없이 따라가 보았다.

좁은 탈의실에 들어선 두 남녀 사이에 긴장감이 드리워졌다. 핀은 문을 쾅 닫고서 다짜고짜 그녀의 선글라스를 벗겼다. 그런 그의 행동에 로리는 반사적으로 팔을 X자로 만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뭐야? 선글라스를 왜 벗겨?’

그녀의 시퍼런 눈두덩을 확인한 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눈은 뭡니까?”

“신경 쓸 거 없잖아……요오.”

“전처럼 말씀하시지요, 대표님?”

“알…… 거 없잖…… 아……여…….”

“반……! 아무튼, 자꾸 직원들 앞에서 티내지 마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여기서 당신의 부하직원일 뿐입니다.”

“…….”

“대답하세요.”

“네.”

“똑바로 하세요.”

“…… 응.”

“이게 마지막 경고입니다. 그동안 많이 인내했습니다. 알겠습니까?”

“ㅇㅇ…….”

로리는 차마 ‘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괴상한 초성만 뱉고 있었다. 그때 현장에 갑작스레 한기가 몰아쳤다. 직원들 중 하나가 패션쇼의 위기 상황을 고자질이라도 한 것인지, 마담 젤레테스가 노발대발하며 등장한 것이다. 한 무리의 비서, 종들을 데리고 온 그녀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씹어죽일 듯 살기등등했다. 대공의 부인이 가지는 우아함과 교양은 이 패션 스트리트에서는 그녀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는 로리를 찾으며 외쳤다.

“이 망할 년 어디 있어! 일을 이 따위로 해? 얼른 나와! 얼굴을 다 갈아엎어버리기 전에 빨리 나오지 못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핀이 문을 열고 나가려했다. 그런데 로리가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개가 물이라도 털어내듯 세차게 흔들어대는 몸짓이었다. 그때 한 직원이 마담 젤레테스에게 ‘아가씨께서는 탈의실에 계시다’는 고자질을 했고, 마담 젤레테스는 탈의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너 이 년! 여기 숨어있었군!”

“어머니!”

“따라 와.”

“살려주세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표 로리의 체면은 한없이 구겨졌다. 로리는 제 어머니 앞에서 파리처럼 두 손을 비비며 이 모든 패션쇼의 위기 상황에 대한 사죄를 했다. 지켜보고 있던 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리의 눈두덩을 시퍼렇게 만든 자가 그 모친이라는 점이 그에게 아주 최고의 재미를 주었던 것이다.

‘마담 젤레테스는 레드 폭스 다섯 마리보다 강력한 존재로군.’

마담 젤레테스는 딸을 먼지 나도록 패고 싶었지만, 일단은 그게 우선이 아니었다. 일을 엉망으로 만든 대가는 차후에 물어도 될 것이다. 지금은 패션쇼의 위기 상황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다. 마담 젤레테스는 한숨을 쉬다가 이를 악 물며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으기, 그스긍슨 므븝 되는 으들 읏어?”(여기, 가시광선 마법 되는 애들 있어?)“

그말은 즉 로리의 눈에 난 시퍼런 멍을 가시광선 마법으로 원래의 뽀얀 피부색깔로 회복시키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핀이 나섰다. 그는 자신의 미미한 마력으로나마 로리의 눈에 난 멍을 치료해주었고, 로리는 ‘감사합니다, 폐하’라며 또 ‘실수’를 할 뻔했다.

곧 마담 젤레테스의 지휘 아래 모든 상황이 정리 되었다. 그녀는 직접 황실에 통신을 보내어 황제가 후원해주기로 한 브랜드이니 만큼 황제 축하 메시지를 원한다 했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드래곤에게 공물보내기에 열혈인 황제가 그녀의 청을 거절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황제의 축하 메시지 영상은 번개 같은 속도로 아이얄 전역 마법 영상구에 전송되었다. 덕분에 관객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무려 꽃미남 새신랑 황제의 축하 영상 메시지가 올 만큼 대단한 브랜드라 광고되니, 소녀들이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담 젤레테스가 다음으로 처리한 일은 모델 문제. 원래의 모델들은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여인들이었다. 그것은 멍자국이 사라진 로리를 시키면 될 일. 하지만 남자 모델이 문제였다. 야성미 물씬 풍기는 남자 모델 2명이 필요한데 그 모델들마저 불참을 한 상태, 라……. 마담 젤레테스는 재빠르게 현장을 살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남자 모델을 맡길 만한 인물을 남자 직원들 중에서 찾기 위해서였다.

‘어디보자, 쓸 만한 수컷들이 어디 없으려나?’

고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담 젤레테스의 눈을 사로잡은 남자는 단연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 훤칠한 키, 탄탄한 몸매를 가진 핀이었다. 그의 육체는 ‘나만이 이 구역의 훈훈한 수컷이요’라고 외치는 듯 했다. 마치 모델이 되기 위해 그 현장에 있는 존재해있는 것만 같았다.

마담 젤레테스의 눈이 빛났다. 저 미청년이라면 완벽해! 저 자가 우리 레이디 로리의 남성복을 입고서 소녀들에게 옷을 사라고 짐승과도 같은 눈빛으로 매혹을 해버리면, 이 장사는 게임 끝이지!

곧 핀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너, 이름이 뭐야? 아니, 뭐 그런 건 중요치 않지. 오늘 그 반반한 얼굴과 몸으로 우리 옷을 팔기 위해 귀족녀들의 마음을 훔쳐야 할 거야. 대형 수렵견 짓을 좀 하는 거지.”

무려 애완견에서 대형 수렵견으로의 위치 격상이었다.

핀은 웃고 있었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신이 이제부터 남자 모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직원인 그는 레이디 로리의 남자 의상이 어떠한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의상들은 야성미를 드러내기 위해 가슴이 파인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슴이 파인 옷, 흉터를 보일 확률이 아주 높다. 추한 흉터를 핑계 삼아 모델에 적합하지 않음을 내세우는 것이 적절한 도망 법이리라. 핀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겐 심장수술 흉터가 있어서 오늘 의상을 소화하기 무리입니다만.”

그러자 마담 젤레테스가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핀의 셔츠를 팍-하고 찢었다. 온열석이 칭칭 감긴 가슴 아래 상처 자국이 정말로 보였다. 마담 젤레테스는 피식 웃었다.

“이 상처는 또 은근한 매력이군. 좋아. 레이디 로리의 콘셉트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할 테지. 참가해. 거절은 듣지 않겠어.”

꼼짝없이 무대에 서게 된 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