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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81화 (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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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로리는 돌아선 핀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몸을 돌리기 위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핀은 화난 얼굴로 거칠게 앞으로 나아갔고, 그런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로리는 그 힘에 이끌려 앞으로 휘청거리며 넘어지고 말았다.

“으아액!”

힐은 벗겨져 한 편으로 뒹굴었고, 다리엔 상처가 생겨 고통스러웠지만, 술에 취한 로리에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든 자기 앞에 있는 이 청년이 핀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로리는 고개를 들고 흐린 눈빛으로 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술기운에 초점이 제대로 안 맞는지 연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어제 자신이 폐하의 가시광선 마법을 풀어주고 왔던가, 아니었던가, 저 금발 머리 청년이 핀인지 아닌지 술에 취한 로리는 확신 할 수 없었다.

“폐, 하? 하, 닙, 니, 까?”

“아닙니다.”

핀은 그렇게 대답하곤 돌아섰다. 그는 술 취한 패악녀가 어떻게 귀가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기다리고 있을 아들에게 치즈가 질척하게 녹은 그라탕이나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로리가 온 대로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제국의 핏빛 강철 검 하, 니, 십, 니, 까?”

마차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베니안에게도 들릴 수 있을만한 큰 목소리였다. 한껏 분노가 치민 핀은 장 본 봉투를 입에 물고 그대로 로리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로리는 핀이 다가올수록 그가 전 황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자신의 힐이 들리자 그것으로 모친에게 맞듯 신나게 두들겨 맞겠구나 생각하며 두 팔을 머리위로 교차하여 X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핀은 장본 봉투를 입에 물고 힐을 든 채로 등을 보이며 그녀 앞에 쪼그려 앉을 뿐이었다.

“업혀.”

패악녀가 온 거리에 전 황제의 출현을 고성방가 하기 전에 어디론가 유폐시켜둘 작정인 것이다.

집에 도착한 핀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고통스러워했다. 가뜩이나 심장이 아픈데 등 뒤에 업힌 로리가 귓가에 대고 연신 폐하, 제국의 핏빛 강철검 아니냐고 물어 대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꾹 참으며 바람처럼 달려온 탓이었다. 청소 중이었던 세드릭은 핀의 등 뒤에 업혀온 여자, 그때 그 참회당의 노숙 귀족 여인을 보고는 인상이 굳어 싸늘하게 질문했다.

“그 여자는 대체 뭐죠?”

핀이 대답하기도 전에 로리가 핀의 고개 뒤에서 혀 짧은 소리를 냈다.

“제국의 황제 폐하 하니십니까하?”

“보다시피 이런 일이다. 티에리아, 잠시.”

핀이 그라탕 재료를 세드릭에게 내밀었고, 그 사이에 전 황태자의 이름을 들은 로리는 이제 세드릭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황태자 전하 하니십니까하?”

“…….”

부자는 로리의 입을 한시라도 빨리 봉하든가, 아니면 그녀를 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드릭은 로리의 외침이 세어나가지 못하게 온 집안의 문을 닫았고, 핀은 그녀를 업은 그대로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세드릭이 핀을 불렀다.

“아버지, 잠깐만요! 그 여자, 제 방에 두세요.”

핀은 세드릭이 그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세드릭 방의 창문은 매우 커서 만에 하나 로리의 시끄러운 바깥으로 새어 나갈 수도 있었다.

“글쎄, 왜 네 방에 둬야 할지 모르겠군.”

“두시라니까요.”

세드릭은 아예 핀의 몸을 자신의 방 쪽으로 밀기까지 했다. 로리를 업고 있던 핀은 그대로 떠밀려갔다. 사실 가슴에 감싸고 있던 온열석의 열기도 다했고, 그녀를 거리에서부터 업고 오느라 지쳐서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세드릭은 로리를 침대 위에 내버려두고 핀에게 염려와 원망이 섞인 말을 했다.

“요즘 몸도 안 좋으신 분이 이렇게 무리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 여자가 주정을 한다고 온 거리에 나를 다 알릴 기세였어.”

제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로리는 널브러진 채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녀의 술주정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폐하, 제 목숨은 안전한 겁니까하, 애완견이라 불러 죄송합니다하, 등등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얄 최고의 미인은 이 순간, 헝클어진 머리, 찢어진 스타킹, 혀 꼬인 목소리를 내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핀은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고 주방으로 나갔고, 세드릭은 그녀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문에다 이불 세 겹을 걸어두었다.

“하리 누나…… 가 아니라, 백모님께서 만들어주신 엔젤리카 깃털 이불이 참 유용하게 쓰이네.”

방에서 나온 세드릭은 주방으로 가서 아버지를 보았다. 핀은 세드릭에게 요리를 해주려고 채소를 손질하려고 했다. 세드릭은 곧바로 핀에게서 요리용 단도를 빼앗았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행동에 핀이 왜 그러냐는 듯 세드릭을 보았지만, 세드릭은 묵묵히 채소 손질만 할 뿐이었다. 핀은 부자끼리 단둘이 있을 때만 쓰는 세드릭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티에리아, 오늘은 내가 저녁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

“맛없어요.”

솔직한 말은 거침없이 나왔다.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핏빗 강철 검의 삐친 표정을 흘깃 살피며 세드릭은 솔직한 말을 계속해서 했다.

“아버지가 만든 것, 솔직히 너무 맛없어요. 재료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나저나 저 여자는 어쩌실 거죠?”

무어라 할 말이 없는 핀이었다. 어쩌긴 뭘 어쩌나? 술에 깨면 단단히 타일러서 귀가시켜야 할 테지. 그러다가 갑자기 핀은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그래. 저 시한폭탄 같은 귀족 아가씨가 앞으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으며, 또한 술주정으로 강철 검의 정체를 지껄이지 않을 거란 확신을 할 수 없다. 미처 로리의 주벽을 모르고 자신의 정체를 밝혀버렸던 핀은 그것을 뼛속깊이 후회하며 묘안을 생각해낸 것이다.

‘고된 훈련을 시켜 겁을 주고…… 영원히 입을 함부로 못 놀리도록 교육을 시켜야하겠지.’

히엘에게 도움을 좀 받아볼까?

“아버지, 제 말 들려요? 대체 저 여자를 어쩌실 거냐고요!”

“…… 두 번 다시는 술을 못 마시게 해야겠지.”

“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고요.”

“재료 손질은 내가 하마. 넌 소스를 만들어.”

“됐어요. 몸도 안 좋으신데 쉬세요.”

“오늘 하루쯤은 같이 저녁을 만들어도 될…….”

“아, 버, 지!”

아들이 뿜어내는 드래곤의 화염 같은 분노에 핀은 할 수 없이 테이블에 얌전히 앉았다. 한참 후 식탁 위에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그라탕이 올라왔고, 핀은 아들의 솜씨를 맛보며 눈치를 살폈다.

침묵이 이어졌다. 문득 세드릭의 일기장에 대한 생각으로 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버지로서 아들의 학교생활에 대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됐던 것이다. 티에리아, 학교에서 널 괴롭게 하는 ‘여자’아이는 없어? 루비와는 요즘 어때? 루비가 널 좋아하지 않았었어?…… 그런 식으로 루비에 대한 일을 묻는 것은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아들에게 훌륭한 아버지는 못 되더라도 참견꾼 아버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들의 학교, 이성 생활이 알아서 잘 될 거라 믿기로 하며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티에리아, 사랑한다.”

“네네…… 으켁!”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의 고백! 세드릭은 덤덤하게 식사를 이어갈 수 없었다. 소년은 급하게 물을 마시며 벌게진 얼굴을 식혔다. 정작 부성애를 싱겁게 고백한 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묵묵히 식사를 하고만 있었다.

어색해진 부자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세드릭의 방에 널브러져있던 로리였다.

“목이 마릅니다, 폐하!”

“자는 줄 알았더니.”

세드릭은 짜증스럽게 말하고선 주전자를 들고 그것을 통째로 로리에게 주었다. 컵 따위는 없었다. 알아서 주둥이로 마시든지 말든지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아버지.”

“응.”

“오늘 다락방에서 같이 자도 돼요?”

아들과의 하룻밤이라, 좋다. 핀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자는 다락방 침대에서 같이 잤다. 잠들기 전, 세드릭은 아주 어릴 적에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그것은 바로 제 아버지의 등을 끌어안고 사랑한다는 말을 똑같이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제발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니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핀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했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내년이면 세드릭은 기숙사가 있는 요리전문학교로 가고, 부자가 함께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들의 마음이나마 편하게 해주는 것이 좋았다.

***

히엘은 하리를 찾느라 중앙궁과 황후궁을 이 잡듯 뒤졌다. 하리의 시중을 들어야 할 시종들은 황후의 행방을 모른다고 고하였다. ‘황후 폐하께서 혼자 있길 원하셨다’며, 그래서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핑계였다.

그 태도에 기가 찬 히엘이었다. 웬만해서는 아랫사람들에게 얼굴을 찌푸려본 적이 없던 그는 처음으로 대노하여 오늘 밤 안에 황후를 찾지 못하면 전원 퇴궁 시킬 거라 했다.

황제 본인도 몸소 하리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과거 그녀가 머물렀었던 가공간도 가봤고,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는 장소인 태후궁까지 가봤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히엘은 핀의 집 다락방까지 이동해서 황후를 보았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핀은 그런 형이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혹시 예전의 바람기를 버리지 못해 하리를 울린 건 아닌가?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신혼 휴가 중에 아내를 찾는 행동이 그의 눈에는 자못 못마땅해보였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핀은 히엘에게 할 부탁이 생각났다.

“젤레테스 대공의 딸 말이야. 조만간 그 여자를 좀 손봐줘야 할 것 같거든.”

“무슨 말이야? 그 여자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조만간 히엘의 힘을 좀 써야 할 때가 올 거야. 그때 도와줘.”

“안 될 것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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