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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은 피식 웃으며 온열석을 싸둔 수건까지 모두 벗었다. 결코 사흘 만에 아물었다고 할 수 없는 흉터, 심장이 다시 박힌 자국이 모조리 드러났다. 로리의 눈이 커졌고, 핀은 짧게 말했다.
“마법, 둘러요.”
“두르는 중이거든!”
수석 졸업자답게 가시광선 마법은 빨리 발동되었다. 핀의 머리카락이 검게 변했고, 눈동자 또한 푸른색에서 새까맣게 변했다. 원래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을 가진 그가 로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다가 점점 얼굴을 그녀의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헉!”
로리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핀은 코앞에 있는 로리의 얼굴을 웃으며 보다가,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전 황제가 살카령에서 심장을 도둑맞고 왔다는 이야기는 아이얄의 최대 화제가 되었다죠?”
“그, 그런데?”
“이 상처, 평민이 일반 병원에서 수술하고 회복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드는 상처인 걸 알고 있습니까? 젤레테스 영애?”
“그래서?”
“마력의 여유가 더 된다면, 내 이마와 눈 사이에 긴 상처도 하나 그어 구경해보세요.”
“……?”
“긋지 않는군요. 상상중입니까? 뭐가 보입니까?”
핀은 기억해보라는 듯 자신의 눈과 이마에 걸쳐 손톱자국을 길고 붉게 냈다. 그러다 장난기가 도져서 살짝 긴 머리카락을 황제 때처럼 묶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그러다 재미가 들었는지 일부러 깎은 코마저 세우는 재간까지 부리기 시작했다.
로리의 얼굴에 충격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 얼굴은!’
로리는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남자에게서 핀라이트라는 전 황제,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을 보고 말았다.
“유, 유령! 아, 아니지, 유령이라면 여기 이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
로리의 표정 변화를 우스운 듯 바라보던 핀은 눈을 살짝 들고 조롱하듯 말했다.
“당신 눈에 어떤 분이 보입니다. 세간에서는 죽었다고 알려진, 하지만 이렇게 살아있는 어떤 분 말입니다. 영애.”
로리는 숨을 쉬지 못했다. 예전부터 이 남자가 전 황제랑 닮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인 남자가 신생 패션 브랜드 사무실에서 여자 발이나 닦고, 음료 심부름이나 하고, 잡다한 업무를 말없이 고분고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검은 머리가 된 남자는 로리에게 영락없는 전 황제의 차가운 미소를 내보이며, 로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자신이 황제였다는 말만 하고 있었다.
“한때는 말입니다. 나의 보여주기 싫은 부분을 들키게 되면, 그것을 본 사람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희생된 사람도 많았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그게!”
“평민인 ‘나’를 귀족의 신분으로 부려먹는 당신의 태도야 뭐, 이해합니다.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요. 당신 같은 안하무인의 성격이라면 이해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들키기 싫은 ‘나’에 대한 것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베른슬츠 쥴 젤레테스 대공의 차녀, 로가드리아?”
로리는 말을 들을수록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지 점점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죽을 지도 모른단 말이지 않은가!
“제가 감히 폐하를 몰라보고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핀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계속 모른 체, 부탁합니다.”
“허헉! 저를 살려주시는 거예요?”
“나는 단지, 그 예쁜 발, 별 일 없이 조용히 닦으며 사는 소시민이고 싶다는, 그런 간단한 말입니다.”
그 말은, ‘앞으로 또 발 닦는 일을 시키면 너를 소시민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으로 로리에게 들리고 있었다.
“협조, 해주시겠습니까, 대표 님?”
다시 대표라고 부르는 공손한 말에, 로리는 일초에 다섯 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뒤, 핀은 보름간의 휴직과 사흘에 한 번씩 근무를 두 시간 뺄 수 있는 로리의 ‘배려’를 얻게 되었다.
진작 이 방법을 쓸 것을. 핀은 후회를 했다.
***
수많은 시체가 널려있는 폐허. 흙먼지 바람이 부는 그곳에서 어린 라브는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었다. 사르제스 제국과 핀라이트는 라브에게 사신의 이름과 같았다. 그의 블랙 유니콘 병사들은 라브의 부모를 짓이겨 죽였고, 막 소년티를 벗은 라브를 죽이기 전에 능욕까지 하려 했었다.
당시 그를 구해준 이는 모순되게도 침략군의 정점에 있는 핀라이트였다. 검은 갑주를 입고서 흐린 눈빛으로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어린 소년을 욕보이려는 병사 몇 명이 보였다. 그는 그대로 그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제 아무리 침략자의 수장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병사들이 어린 소년을 능욕하는 추잡한 꼴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핏빛 강철검이 떠난 뒤, 시체를 확인사살 하기위해 남아있던 병사들은 라브를 죽이는 대신 그에게서 색(色)을 빼앗았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재미있다는 웃으며 떠나버렸다. 동료 병사들을 죽게 한 벌로 평생 그 꼴로 살라는 이죽거림을 남기고.
그것이 라브가 백화증에 걸린 이유였다.
수년이 지난 뒤, 라브는 그 어떤 성별도 가리지 않는 창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창부가 된 라브의 가장 큰 무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백화증에 걸려 새하얗게 된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 새하얀 몸 덕분에 어느 몰락한 귀족의 눈에 띄었고, 그 집에 양자로 들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양자로 들어간 귀족가문은 그 후로 더욱 가세가 기울었고, 라브는 창부가 되어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이제는 창부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에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그는 아직도 블랙 유니콘의 병사들이 침략하던 그 때의 일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은 꿈속에 나타나 괴롭히기 까지 했다. 하필이면 손님과 잠들어있는 지금도.
“싫어…… 내 몸 건드리지 마!”
큰 소리를 내며 악몽에서 깨어난 라브는 곁에 누워있는 손님을 보고서 눈을 찌푸렸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지난 밤 약속한 한 차례의 행위가 끝난 뒤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더듬던 손님 때문에 그런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뒤척이자 그 기척에 손님이 깨어났다. 깨어난 손님은 다시 라브의 몸을 더듬으며 저속한 말을 뱉어냈다. 예쁘구나, 너무 깨끗해서 더럽히고 싶은 몸이야, 네 몸은 중독성이 있어, 또 한 번 어때……, 듣다 못한 라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켜요!”
“더 줄게.”
반항하는 라브에게 손님이 추가 화대를 제안했다. 잠시 생각하던 라브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얼른 낡은 저택으로 돌아가 양부를 돌보아야 하고, 수업도 받아야 하지만, 돈을 더 준다면 다 무시할 수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수업에 나가봐야 자신이 괴롭히기 좋아하는 라이트릭 에센은 결석을 할 것이었으니.
“곧 수업가야 하는데…… 두 배로 내.”
“큭, 몰락귀족 도련님은 비참해.”
“시끄러워.”
“하긴, 언제까지 그렇게 도도한 귀족으로 살 수도 없을 테지.”
점령지 출신인데 귀족가에 입양된 운 좋은 남자, 백화증에 걸려 모든 것이 하얗지만 눈동자만은 새까만 미남자, 입양된 처지라 귀족의 작위를 받지 못할 시한부 귀족의 처지, 돈만 많이 주면 손님의 성별을 따지지 않는 창부. 그러한 라브의 사연을 손님은 모두 알고 있을 만큼 단골이었다.
“난 한 번도 도도한 귀족으로 굴어본 적 없다고. 닥치고 박기나 해.”
라브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양부의 약값과, 학비와, 생활할 돈이 필요했고, 손님은 라브의 몸이 필요했다. 쾌감은 덤이니 이 얼마나 괜찮은 거래인가. 물론 행위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남곤 했지만, 그런 것은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으읏, 거기, 좀 더…….”
“이거 참, 누가 돈을 두 배로 더 받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다, 닥쳐.”
***
히엘은 일주일동안의 신혼 일정을 신나게 즐기기로 했다. 일정이라고 해봐야 단 한 가지 목적이 전부일 뿐이지만.
그것은 바로, 후계자 만들기.
침소에서 그는 하리를 끊임없이 괴롭혀댔다.
“하리, 이제 좀 일어나. 응?”
사실 하리는 이미 깨어 있었다. 다만 자는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고 있거나, 자는 척이라도 해야 히엘의 끊임없는 애정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혼인식 후 사흘 째. 시간이 가는 것이 아쉬운 히엘은 어떻게든 신혼 휴가 중에 후계자를 만들려 노력했고, 그 노력에 비례해서 하리는 점점 두려워졌다. 첫날밤을 보낸 뒤 숙취와 몸살에 시달린 것도 억울한데 눈 뜨자마자 다시 덤비다니. 앞으로 남은 나흘이 걱정되는 하리였다.
“벌써 해가 이렇게 떴다고. 이제 안 아프잖아?”
하리는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남편이 마법사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숙취며 몸살을 모조리 마법으로 치료해 버리고 덤벼드니 말이다. 체내의 알코올은 휘발 마법으로 모두 날려버렸고, 근육통도 활성마법으로 없애버렸다. 부어오른 살도 치료하면 그만이었다. 히엘은 하리가 아플 틈도 주지 않고 있었다.
잠자리에도 적절한 시간이 있는 법, 하지만 히엘은 그야말로 지치지 않는 절륜의 종마라 할 수 있었다. 탕아처럼 살아온 터라 그냥 즐기던 대로 즐기는 것일 뿐이었지만, 숙맥인 하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쾌감고문과 같았다.
초반부터 이렇게 사람을 녹이면 권태기는 얼마나 빨리 찾아올 것인가? 어쩌면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노부부처럼 심드렁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리는 미래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히엘의 속도를 감당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느리게 피어나는 꽃과 같았다.
“하리이이이이.”
“흐이그, 진짜!”
히엘은 아내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짜증의 소리를 듣고서 주먹을 자신의 입에 가져가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아이와 같은 표정을 연기했다.
“헉…… 광녀, 지금 화낸 거야? 그런 거야?”
“아, 그게 아니고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화낸 것도 아니고 화 안낸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 상태는, 잠을 ‘깬’ 상태군. 잠을 깼다는 것은 한 마디로…….”
히엘은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며 하리를 덮은 이불을 걷어 올려 그녀의 잠옷 자락을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리가 다시 옷을 내리며 애원했다.
“폐하, 제발…….”
“히엘.”
“히엘, 저, 제발, 오늘은 좀 밖을 걷거나,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아이 낳아야 한다고.”
그 말에 하리가 울먹이며 따졌다.
“폐하, 저를 아이 낳는 기계로 취급하시는 겁니까?”
히엘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그녀를 보았다.
“으흠! 대저 황후란 제국의 앞날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후사를 보는 것이 의무 중 하나…….”
“그렇게 갑자기 점잖은 척 말하지 말아요!”
“하면 안 돼?”
“솔직히 진짜, 진짜, 힘들어요.”
“진짜? 힘들기만 해? 그럼 그렇게 앙앙거리며 울었던 것도 힘들어서 그랬던 거야, 응?”
짓궂은 질문을 하며 히엘은 킥킥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