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77화 (77/123)

<-- 77 회 -->

흐드러지게 핀 방울꽃들이 각자 그 화사한 꽃봉오리 속에 아침 이슬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세드릭은 이미 등교해서 집에 없었다.

지난 삼 일 연속, 소년은 아버지의 몸을 걱정하여 지극정성으로 병시중을 들었다. 온열석을 수건에 두르고 자는 제 아버지가 걱정되어 새벽마다 식은 온열석을 치우고 따뜻한 것으로 새로 갈아주고, 하루 세끼 식사를 미리 만들어 둔 뒤, 차를 한 주전자 끓여놓고 학교로 가곤 했다.

핀은 아들이 기특하면서도 신기했다. 소년이 누굴 닮아 그토록 다정하고 섬세한지 모를 일이다. 그는 아들이 만들어 준 스프를 두 그릇이나 해치우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다. 역시 요리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될 뛰어난 실력이야.’

그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앞치마를 둘렀다. 한때는 황제로 살았었지만, 이젠 이런 평민의 삶이 익숙하여 이런 살림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때 철커덕,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장을 보고 온 시종이 현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히엘의 지시를 받고 핀 부자를 보살피고 있었다. 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서 쉬셔요.”

시종의 말에도 핀은 꿋꿋이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궁으로 돌아가세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폐하께…….”

“제가 잘 말해두겠습니다.”

시종은 매우 난처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종종 사람을 보내오면 궁에서 지내던 시절을 완전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는 조만간 다시 히엘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시종이라던가, 여기 저기 숨어있는 병사 따위를 두지 말라고 단단히 이를 작정이었다.

물론 그 속마음을 세드릭이 알기라도 하면 크게 분노할 테지만.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또 현관문을 두드렸다. 시종이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방문자는 로리였다. 그녀의 종달새 같은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어조로 핀의 귀에 사정없이 꽂혔다.

“애완견!”

“…….”

“뭐야? 설거지 할 정도로 멀쩡하잖아? 아픈 거 맞아?”

시종은 전직 핏빛 강철 검에게 애완견이라 불러대는 로리를 보고 기겁했다. 핀이 앞치마를 천천히 벗고 예를 갖추어 그녀를 환영했다.

정확히는 환영하는 시늉에 불과한 것이지만.

“대표님, 오셨습니까.”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 지금이 얼마나 바쁜 때인데…… 응? 넌? 넌 뭐지?”

로리는 좁디좁은 평민의 집에 시종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시종의 옷차림은 맞는데 지나치게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게 또 한 편으로는 수상한 것이다. 시종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자, 핀이 화제를 돌렸다.

“누추한 곳에 어떻게 몸소 오셨습니까?”

그의 가식적인 웃음, 그 말투는, 누가 보아도 방문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로리는 시종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제 질문만 해댈 뿐이었다.

“저 시종은 뭐냐니까? 이런 추레한 집에 사는 평민 주제에, 어떻게 시종까지 부리면서 살 수 있는 거지?”

대답해주지 않으면 집요하게 물을 기세라 핀은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어떻게 하면 패악녀의 의심을 차단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패악녀의 관심을 쳐 낼 수 있을까. 그도 레이디 로리에서 두 달 이상 허드렛일을 해왔던 터라, 로리가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가 자신을 형편없는 남자로 보게 해야 했다. 왜? 그것이 덜 성가신 일이니까. 결론이 내려진 그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시종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빚이 많아 하루하루 단금으로 받으러 오는 분입니다.”

일수대출이나 받고 사는 가난뱅이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눈치 좋은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맞장구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내일은 반드시 돈을 준비해놓으라’ 외치는 연기까지 해보였다.

시종이 밖으로 나가자 로리는 흐음,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일수대출이나 받고 살다니. 정말이지 허영에 가득 찬 남자군! 쯧!”

어쩐지 입고 다니는 옷도 평민주제에 비싸 보이더라니, 다닌다는 예술 학교도 돈 많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었어, 등등의 생각을 하며 그녀는 핀을 혼내듯 말했다.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해댄 거지, 넌?”

“그러게 말입니다.”

핀은 로리가 어서 이곳을 나가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제 집처럼 소파에 자리했다. 불길함이 점점 핀을 감싸왔다. 이러다가 그녀가 몇 시간이고 눌러앉는다면 어쩐다? 그는 일단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얼른 대접을 하고 보내버릴 작정이었다. 세드릭이 구운 쿠키, 세드릭이 말려둔 과일 등등 간단히 대접할 것도 챙겼다. 귀족이 몸소 찾아왔으니, 맹물을 바칠 수는 없는 노릇.

“뭐지, 이 구린 음식들은?”

로리는 핀이 내민 다과를 흙 묻은 개똥 보듯 찌푸리며 보다가, 핀의 푸른 눈동자를 향해 찌를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부터 출근해도 괜찮아 보이는데? 어디가 아픈 거야?”

“심장 쪽이 좀 안 좋습니다.”

“꾀병 아니야?”

핀은 망설임 없이 셔츠 아랫자락을 홱 올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로리가 기겁을 하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지만, 그녀의 눈동자만은 그 손가락 틈사이로 핀의 몸을 부지런히 살피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탄탄한 근육과 상처로 얼룩진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온열석을 가슴에 대고 그것을 얇은 수건으로 압박한 가슴 주변의 상처들이 유독 시선을 잡았다. 대충 아문 불그스름한 상처는 그 누가보아도 심장 수술을 받은 사람의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로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핀이 셔츠자락을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꾀병 아닙니다. 그날 수술을 받으러 가느라 조퇴한 겁니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했어야지.”

“예정된 대로 이레 쯤 쉬어도 되겠습니까?”

“네 맘대로 해버려!”

“감사합니다.”

로리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커녕,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책장 가득한 수예, 미술 관련 서적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늑하고도 서민적인 소담함을 자랑하는 인테리어, 여인들이나 좋아할 법한 분홍 색채의 패브릭 소품 등등, 그 모든 것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애완견, 너 혹시 돈이 없어서 여자한테 얹혀사나?”

“자꾸 애완견이라 하시는데, 전 개가 아닙니다.”

“대답이나 해.”

“혼자 삽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레이스 커튼?”

“취향입니다.”

이제와 새삼 숨길 것도 없는 핀이었다.

“신발이 많던데?”

“전부 제 겁니다.”

그때였다.

로리의 눈에 창밖, 세드릭이 널어놓고 간 빨래 들 중, 교복이 보인 것은.

“저 옷은 그때 갔던 학교의…… 이봐, 너 정말 혼자 살아?”

“예.”

“그럼 저 교복은 누구 건데? 왜 있는데?”

핀은 점점 대답하기가 짜증이 났다.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대표님?”

“뭘.”

“저한테 너무 지나친 관심을 보이시는 것 아닙니까?”

“난 그저 네가 꾀병인가 싶어 와본 것뿐이야!”

로리는 어디까지나 직장 상사로서의 의무를 내세우며 차를 마셨다.

“아잇, 뜨그!”

차는 아주 뜨거웠다. 그 뜨거운 찻물이 허공에서 그대로 뿜어져,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핀의 셔츠를 적셨다. 핀이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고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곧 그의 서늘한 눈빛이 로리에게 꽂혔다.

“감히 평민 주제에 얻다 대고 눈을 부라려!”

“죄송합니다. 제 눈이 이렇게 생겨서.”

“칫.”

“꾀병이 아니란 걸 확인하셨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보셔도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제가 평민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제국 법은 사생활의 존중을…….”

로리는 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귀족으로서의 품위도 찻물을 토해내느라 구긴 판이다. 그녀는 애완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져왔던 의문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끄러! 가만 보니 너 수상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거든? 일단 네가 황제 폐하의 후원을 받는 학생이라는 게 이상해! 게다가 너는 예술 학교에 입학할 만한 나이 치고는 서너 살 많지 않나? 심장은 또 그렇게 빨리 수술이 될 수가 있나? 상처를 보아하니 마법이 아니면 삼 일 동안 그만큼 아물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일수대출을 받으러 온 사람이 장본 것을 들고 현관으로 들어서나? 그리고, 어디 보자…….”

끝도 없이 이어지는 로리의 추궁은 핀을 성가시게 만들었다. 애완견이라 불러대며 부하직원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으면서, 지금 보이는 이 집착은 너무나도 집요하다. 로리의 말이 너무 길어지자, 핀은 결국 그녀를 보낼 어떤 방법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눈빛을 빛냈다.

“호위기사 데리고 오셨겠지요?”

그는 대공의 영애가 이런 사가에 호위 기사하나 없이 올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로리는 갑작스럽게 싸늘한 눈빛을 하는 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뭐라고 했어, 지금?”

“그를 일단 다른 곳으로 가 있게 하십시오. 그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뭘 말한다는 거야?”

“저에 대해 매우 알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싫으시다면 강요 않겠습니다.”

“이게 어디 감히 평민 주제에 하라마라…… 저스티스. 잠시 카페에 가서 차나 한 잔 하고 와.”

의외로 시키는 대로 잘 하는 로리였다.

핀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나 자신에 대해 궁금한가? 그렇다면 알려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로리의 호위 기사 저스티스가 자리를 완전히 비울 때 까지 차를 반잔이상 말없이 마시기만 했다. 저스티스가 창밖에 서서 난색을 표했다.

“아가씨, 호위 기사에게 자리를 비우라 하시다니요.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이게 어딜 기어올라 오르긴! 썩 안 꺼져? 잘리고 싶어?”

“전 대공각하께 고용되었지 아가씨께 고용된 건 아닙니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그냥, 확! 아주 그냥 구둣발로 짓밟아버릴라!”

“아가씨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전 항상 아가씨의…….”

아가씨를 홀로 둬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호위 기사와 핀의 정체를 알고 싶은 로리의 승강이가 한동안 이어졌다. 결국 기사는 아가씨의 악다구니를 이기지 못했다.

저스티스가 떠나자 정적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핀이 로리의 성을 불렀다.

“젤레테스 영애.”

“그래, 이제 말해봐.”

“유명한 학교의 수석 졸업자라더군.”

“그런데? 그리고 갑자기 그 무례한 말투는 뭐지?”

“기본마력 성적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마력이 영애보다 낮아서 그런데, 가시광선마법 가능하면 잠시 ‘내’ 머리카락 좀 검게 물들여주겠습니까? 눈동자도 함께 해준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긴 말을 하며 핀은 상의를 모조리 탈의했다. 아까처럼 옷깃만 올려 가슴을 보인 게 아닌, 완전한 탈의였다.

“꺅! 뭐하는!”

로리는 비명을 질렀다. 아까보다 더욱 많은 상처가 보였다. 칼자국 같았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남자이기에 이러한 상처를 가지고 다니는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