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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는 최대한 우아하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망토가 불편한 히엘이었지만, 그도 하리처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얄에서 최고로 잘 나간다는 남자 배우도 그의 미모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린 소녀참석자들은 총총히 눈을 빛내며 잘생기고 젊은 황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한 때 그 황제와 숱하게 시선과 스킨십을 나누었던 여성참석자들은 하리를 향해 마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니가 걷는 그 길, 그 길이 내 길이었어야 해, 그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해.’
‘니가 입은 그 옷, 그 옷이 내 웨딩드레스였어야 해, 그 베일이 내 베일이었어야 해.’
‘안면몰수하고 부케라도 받아버릴까…… 경매에 팔면 짭짤할 거야.’
그 질투와 미련과 후회의 시선 속에서, 하리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갑자기 히엘이 하리의 손목을 굳게 잡았다. 그는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도 풀리지 않는 그녀의 하늘색 팔찌가 야속하고 답답했다. 어서 풀어버리고 싶었다.
하리는 히엘이 자꾸 팔찌를 만지작거리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나 히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가이덴의 성검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받으시오!”
그때 갑자기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드래곤의 등 뒤로 뭔가가 제 형체를 드러내며 허공으로 올라가 지상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려 중앙궁의 1/3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검은 형체가 하늘에 둥둥 떠있었다. 그 고압적인 형체에 시선을 빼앗긴 채 웅성대는 사람들을 보며 히엘은 씩 웃고는 주머니 속 축소 성검을 꺼냈다.
그때까지도 긴장만 하고 있던 하리는 그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후, 폐하, 저 떨려요.’
반지를 받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히엘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성검을 내려둔 뒤, 성검으로부터 이 혼인의 허락을 받는다. 그것이 하리가 알고 있는 순서였다. 그녀는 성검이 자신을 신부로서 받아들여야 할 텐데, 그 증거로 결혼반지가 자연스럽게 끼워져야 할 텐데, 하는 염려를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수상한 검성을 들은 후로 그 웃음은 뚝 멈추어버렸다.
[우우우웅- 우웅-]
제 크기로 돌아온 성검은 끊임없이 불길한 칠흑의 검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드래곤의 뒤에 나타난 거대한 검은 형체에 시선이 빼앗겨 성검을 보지 못했다. 히엘이 성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리의 눈이 커졌다.
‘폐하! 어째서 검을 들어버리시는 겁니까! 내리셔야 할 때인데!’
드래곤이 씩 웃었다. 사람들이 드래곤의 등 뒤로 나타난 검은 물체의 또렷한 형상에 다들 외쳤다.
“저건 뭐야!”
“어떻게 저렇게 거대한 것이!”
중앙궁의 1/3에 달하는 검은 형체의 본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거대 블랙 유니콘이었다. 하리는 예정에 없던 것이 나타나 불안한 눈으로 히엘을 보았고, 히엘의 손에 들린 성검 역시 불길한 검성을 우웅-하며 냈다. 드래곤이 지루한 듯 히엘에게 채근했다.
[빨리 하여라.]
히엘은 불안한 듯 제 팔을 잡는 하리에게 잠시 몸을 뗐다. 하리가 외쳤다.
“폐하!”
“안 아프게 해줄게.”
히엘이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헉!”
하리의 몸통을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검은 긋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놀랐다. 황제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황제가 황후를 죽이려 하다니!
“꺄악!”
“헉!”
짧은 순간, 하리는 이유도 모른 채 성검에게 죽겠다 싶었다. 입술이 질끈 물리고,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폐하!’
한 차례 성검을 휘두른 히엘이 그대로 성검을 던졌고, 드래곤의 뒤에 있던 흑인 남자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흑인 남자는 히엘이 머슈타트 광산에서 데려왔던 소년 히든이었다. 즉, 히든의 마력 성장한 육체인 것이다. 히든은 성검을 가지고 그대로 부유마법을 이용하여 튕기듯 하늘로 올라가 블랙 유니콘의 뿔을 잘랐다. 잘린 뿔에서는 진한 검 보랏빛 마나가 튀어나왔고, 그것은 히든의 셀바히트 성력과 합쳐져 발광하려는 성검을 제어했다.
그러자 하리의 손목을 오랜 시간 옥죄었던 하늘색 가이덴 팔찌가 투둑-하고 떨어졌다. 그 팔찌는 곧바로 히든에 마법에 의해 소멸되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하리는, 허전해진 자신의 손목을 보다가 히엘을 보았다. 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었다.
“그거 하려고, 바빴었던 거야.”
“폐하! 어, 어떻게 이런……!”
“성검이 눈치 못 채게 하느라 여기까지 걸어오기 직전까지도 숨겨야 했었어. 저 거대한 마력 증폭기를 만드는 것도 마계에서 해야 했고, 여러모로 그동안 바빴던 거지. 네 손목에 있던 그 끔찍한 팔찌, 그게 널 죽일 수도 있는 건데, 놔둘 수야 없잖아. 안 그래?”
“폐하…… 흑.”
“좋은 날 왜 울어?”
하늘색 팔찌의 이중성력은 거대 블랙 유니콘 즉, 히든이 조종하는 마력 증폭기에 의해 그 힘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성검은 히든이 가진 어마어마한 셀바히트 성력으로 인해 모든 성력을 잃고, 평범한 하나의 검이 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혼인식의 진행에 참석한 자들은 혼란을 느꼈으나, 드래곤의 뒤에 있던 백인 남자 두 명이 상황을 깔끔히 정리시켜 주었다.
“드래곤께서 오늘의 혼인식에 기하여, 가이덴 성력의 횡포를 단절할 거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친히 그 의견에 온 제국의 힘을 다 쏟을 거라 약속하셨습니다.”
점령지의 영주들이 기나긴 정복 전쟁의 설움을 잊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약속되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히엘이 드래곤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감사합니다.]
[흠. 나는 평화주의자니 말일세.]
드래곤의 말에 히엘이 씩 웃었다.
이렇게 히엘은 하리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키스를 했고, 아껴두었던 말을 했다.
“사랑해. 하리.”
하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양 그를 안았다. 하늘에 거대한 폭죽이 터졌다. 참석자들과 관중들은 이제 더는 정복 전쟁으로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했다. 그렇게 황제는 일과 결혼을 동시에 해냈다.
***
히엘은 히든과 드래곤에게 부탁하여 핀의 심장을 회수했었다. 성검의 성력이 소진당하는 순간부터 약 한 시간 정도 핀의 몸은 사실상 사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드래곤은 핀의 영혼을 하늘로 올라가지 않게 묶어두었고, 히든은 성검의 비처에 가서 핀의 심장을 가져와, 그것을 그대로 죽어있는 핀의 몸 안에 이식시켰다.
그 뒤, 히엘은 소생, 치유 마법을 이용하여 핀을 되살렸다. 도중에 핀의 소생을 원치 않는 영혼들의 방해가 많았다. 그 영혼들은 한때 핀이 전쟁을 하며 몰살시켰던 사람들도 있었고, 대주교, 황후, 엔, 세라비도 있었다. 히엘은 그들로부터 무사히 핀을 소생시키기 위해 수많은 퇴령 스크롤을 이용해야 했다.
핀은 가슴에 묵직한 것이 들어온 느낌에 눈을 떴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새까만 나무 벽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둡고 서늘한 공기를 가진 이곳은 와인 저장고였다. 중앙궁 앞뜰 지하에 있는 장소. 어쩌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그는 기억을 떠올렸다. 형과 괴상한 키스 사건을 겪고, 그 후유증으로 드래곤에게 형을 죽여 달라는 요청을 한 뒤, 기절했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핑리스를 걸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했다.
‘심장이?’
늘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온기막이 사라져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한숨이 따뜻했다. 손을 가슴에 대봤다. 뛰었다. 성검 때문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심장이 다시 되돌아오기라도 했나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는데, 욱- 신음이 나올 정도로 가슴이 아렸다. 등 뒤에서 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레 정도는 꼼짝없이 쉬어야 할 거다.”
“히엘?”
예복 차림에서 망토만 벗은 히엘은 이제 막 행사를 마치고 이곳에 온 참이었다. 그는 지하에 공간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핀을 세드릭과 함께 사는 집으로 되돌아가게 할 이동진이었다.
“젤레테스 대공의 패악녀에겐 적당히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대 버려.”
“내 심장, 어떻게 다시 돌린 거야?”
“큭, 마법사출신 황제 좋은 게 뭐겠냐? 이용할 건 다 이용해야지.“
“…….”
핀은 히엘이 소생, 치유 마법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사라진 심장을 되찾게 해준 것 또한 힘들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힘들었을 텐데.”
“묻지 마.”
히엘은 자세한 상황은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는 성의 없는 손짓으로 마법 이동진을 완성하고 난 뒤, 고갯짓을 했다.
“가라.”
“히엘.”
“왜.”
“결혼 축하해.”
“어.”
“행복하게 안 살면, 죽여 버린다.”
끔찍한 키스까지 하면서 지킨 결혼이었다. 핀은 정말로, 진심으로, 그들의 행복을 바랐다.
***
집으로 간 핀은 세드릭이 끓여준 스프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예전 하리의 방이었던 그곳은 이제 핀의 방이 되었다. 크기와 꾸밈을 보자면 그가 한때 살았던 황궁의 침소보다 보잘 것 없었지만, 황궁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평범함, 소소함, 그리고 아늑함. 핀은 이 방의 분위기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이레 동안 휴식이라, 좋군.’
일주일간 라브, 로리 등등을 보지 않아도 되어 매우 기뻤다. 그는 심장 이식으로 아린 가슴에 온열석 하나를 대고 수건에 감은 뒤, 목까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때 세드릭이 노크를 했다.
“아버지.”
“들어와.”
세드릭은 핀에게 줄 따뜻한 차 한 잔을 챙겨왔다. 핀은 꼼꼼하고 다정한 아들의 태도가 사뭇 신기했다. 세드릭이 침대 옆에 책상 의자를 당겨 앉으며 어렵게 말문을 뗐다.
“아버지, 내년이면 저 기숙사가 있는 요리 학교로 가잖아요.”
“응, 그런데?”
“그때까지 황실에 호위병도 요청하시고, 여자 친구도 사귀시고, 여러 사람들 불러서 바글바글하게 사세요.”
뜬금없는 아들의 말에 핀은 웃고 말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