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70화 (70/123)

<-- 70 회 -->

핀은 마력 화산으로 이동해서 닥치는 대로 몬스터들과 짐승들을 죽였다.

실로 몇 개월 만에 하는 사냥인가!

히엘으로부터 건네받은 평범한 검 날에 수많은 몬스터들이 소나기 맞은 풀처럼 우수수 쓰러져갔다. 검 질이 지겨워질 때면 마나폭탄이 사용되기도 했다.

“헉……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금발과 경갑에 짙은 핏물이 배었다. 숨소리만 들어서는 마치 거대한 트롤 한 마리라도 잡은 느낌.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이미 그런 중대형의 몬스터들은 제국 마활들이 세워놓은 몬스터 방어벽 덕분에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가 잡은 것은 자그마한 고블린들이나 산짐승들뿐이었다. 그조차도 많이 보이지 않아 한 마리를 잡고 수백 미터를 뛰어야만 또 다른 한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 간만에 스트레스를 풀러 나온 사냥치고는 폼이 죽어도 너무 죽고 있었다. 핀의 눈은 연신 더 센 것, 더 강한 몬스터를 찾으려 애를 썼다.

[스궤에에에에에엑]

때마침 거대독사가 저 앞에 나타났다. 어린 암컷이라 길이가 20m에 불과했지만, 검은 비늘 밖으로 풍기는 보랏빛 마나를 풍기며 마법 공격도 가능한 몬스터였다. 검으로 잡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강한 녀석을 찾던 핀의 얼굴에는 화색만이 감돌고 있었다.

‘기다렸다!’

그는 한 손에는 검, 다른 한 손에는 소형 마나폭탄을 든 채, 거대독사를 도발하며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거대 독사도 먹이를 발견한 기쁨에 신나게 그의 뒤를 쫓았다. [펑]소리와 함께 마나 폭탄이 터지고, 뱀의 단단한 검정 비늘이 사방팔방으로 부서졌다. 지금이야말로 검으로 베기 딱 좋은 상태였다. 핀은 곧바로 제자리에서 용수철처럼 뛰어 올라 뱀의 대가리를 베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목이 시큰거렸기 때문이었다.

“윽!”

너무 오랫동안 사냥을 하지 않다가 한 탓일까. 손목 관절염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이게 전부 레이디 로리에서 각종 디자인업무에 혹사당한 탓이었다. 그의 손목이 디자이너들의 손목처럼 약해진 것이었다. 암컷 새끼치고는 거대 독사의 목이 생각보다 단단하기도 했다. 핀의 공격에 화가 난 뱀은 대가리를 미친 듯 돌려대며 꼬리로 핀의 등을 후려쳤다. 핀은 하마터면 내장출혈을 일으킬 뻔했다. 곧바로 바닥으로 튕겨나가는 그의 표정은 고통에 젖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

고통조차 그에게는 반가운 것이었다.

‘짜릿하다!’

이게 얼마 만에 얻는 고통의 쾌감인가. 대륙 가장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쾌감이었다.

거대 독사가 마치 아파 죽겠지? 용용 죽겠지? 약을 올리듯 똬리를 틀며 핀을 놀려대는 소리를 냈다.

[스궤에에에엑]

도발이었다. 얼른 나를 쳐, 얼른 나를 치지 않으면 또 한 번 너의 등짝을 이 꼬리로 사정없이 후려친 뒤, 독이 줄줄 흘러나오는 나의 송곳니로 네 녀석의 모가지를 콱 물어버릴 테니까!

도발을 제대로 알아들은 핀이 문득, 거대 독사를 보고 ‘그것’을 연상시켰다.

‘너는, 너는…… 새까만 것이…… 그래, 그 여자가 딱 좋겠군.’

핀은 거대 독사를 보며 자신의 상사인 로리를 떠올렸다. 새까만 머리,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로리가 새까만 몸체를 가진 거대 독사의 이미지와 딱 어울렸다. 핀은 거대 독사에게 마나 폭탄 하나를 더 던졌다. 그리고선 검을 쥐고 저 멀리 탄탄하고 굵은 나무쪽으로 뛰어갔다. 거대 독사가 그의 뒤를 쫓아갔고, 핀은 나뭇가지를 디딤돌 삼아 위로 올라가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날려 검 끝을 거대 독사의 목에 쑤셔 박아 넣었다.

[스궤- 스궤-]

거대 독사는 고통에 신음하며 꼬리로 핀의 등을 다시 한 번 후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핀은 두 번 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거대 독사의 꼬리가 주는 반동을 이용해 그 꼬리를 타고 올라가 거대 독사의 다른 쪽 목에도 검을 찔러 넣었다. 사방팔방 검붉은 피가 튀었다. 핀은 이미 두 차례나 찔린 뱀의 목을 사정없이 검으로 다시 짓이겼다. 그 눈빛은 제국의 핏빛 강철 검 시절의 잔인함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뱀은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그간 인간들의 주거지에서 훔쳐 먹었던 가축들의 뼈를 우르르 쏟아냈다.

[스궤- 스궤-]

그 모습을 보며 핀은 시원함과 통쾌함을 느꼈다. 거대 독사를 로리라고 생각하고 베어버리니, 정말로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하였다.

핀은 그 후로도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던 자들이라 생각하며 거침없이 죽였다. 마력 화산의 동굴에 서식하며 사람들의 뼈를 갉아먹고 사는 하얀 박쥐를 학교의 얄미운 녀석 라브라고 생각하며 마나폭탄으로 산산이 부수어 죽였다. 윤기 나는 갈색 털을 가지고 꼬리를 얄밉게 휘날리며 여러 암컷들을 취해대는 붉은 여우 수컷을 히엘이라 생각하며 발로 밟아 죽였다.

사냥을 마친 뒤 핀은 궁으로 이동했다. 한 때 자신의 침소였던 중앙궁의 침소에서 샤워를 하며 핏물을 씻어 내렸다. 그리고는 세드릭과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그만 피로에 찌들어 잠이 들고 말았다.

***

하리는 지난 시절을 생각했다.

히엘과의 연애가 평생 있었던 연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한때 남자 친구는 존재했었다. 다만 그들은 하나 같이 손잡기나 포옹과 같은 스킨십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그녀를 떠나갔다.

‘넌 너무 엄마에게 의존을 하고 지루하며 답답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하리는 히엘과의 연애를 첫사랑이랑 다름없다고 여겼다. 비록 시작은 감금광녀와 감금광녀의 치료를 담당하는 봉사정신 강한 마법사의 관계였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됐다. 히엘은 하리가 어린 시절 잃었던 존재인 아버지처럼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상냥한 성격이었고, 예전 남자 친구들처럼 그녀에게 지루하단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무리 싫어도 꿋꿋이 다 해주었다. 비록 바람둥이라는 과거가 있고 틈만 나면 자기 편하고자 양해의 한 마디도 없이 의식단절 마법을 걸어버리거나 하지만, 하리에겐 가장 소중한 남자였고, 진정한 사랑이 될 단 하나의 존재였다.

하지만 국혼을 앞둔 지금, 그 관계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하리는 너무나 우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내일이면 혼인식인데, 두 달 만에 얼굴을 들이민 히엘은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황후궁의 침소에 드러누워 잠을 잤다. 예전에 종종 시도하던 야하고 엉큼한 행동은커녕 살가운 인사조차 없이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하리는 혹시 히엘의 바람기가 드러나 이렇게 국혼을 치르기도 전에 상처를 받는 건가 싶어 울었다.

“흑흑.”

그녀는 불안에 떨었다. 어떻게 이렇게 키스 한 번 안하고 속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어떻게 부인이 될 사람이 결혼식이 떨린다고 말하는데도 웃으면서 못 들은 척 그냥 잠들 수 있는 걸까. 히엘에게 스킨십이나 감정의 진한 표현을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정함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굴욕감이 들었다.

‘진짜 바람나신 거 아니야? 흑흑.’

때마침 히엘이 침대 맡에 두었던 필기르의 깃털이 우웅- 하고 울었다. 해괴하게도 그는 하리의 울음소리는 못 들으면서, 필기르의 깃털 소리는 잘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하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으휴, 이런 무능한 마활들 같으니. 그런 거 일일이 나한테 허락 맡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좀 알아서 할 수 없어? 나 내일 결혼하거든? 귀찮게 자꾸 이럴래? 이제 연락 하지 마.]

히엘은 신경질적으로 필기르의 깃털을 침대 맡에 던져버리고 다시 누웠다. 그때였다. 하리가 이불을 홱 걷어버리고서는 짧게 외쳤다.

“방금 전언을 해온 사람은 누구인 가요!”

“하리?”

하리는 언젠가 청소를 맡은 시종들에게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려냈다. 황제가 서남쪽 출신의 화끈한 여인과 낳았다는 흑인 혼혈의 아이!

“방금 폐하께 전언을 올린 자는 혹시, 그 아이의 엄마…… 인가요? 아니면 누구? 세라죠? 그렇죠!”

히엘은 황당해서 웃음이 터졌다.

“풉, 뭐라고?”

“어서 말씀해주세요! 방금 폐하와 이야기를 나눈 자가 누구인지! 세라라면 세라라고 말을 해도 돼요!”

히엘은 머리가 아파왔다.

“이봐, 광녀. 또 그 분이 오신 거야?”

광녀라는 단어는 한때 하리에게 애칭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호칭에 광분하고 있었다.

“저는 광녀가 아니에요! 당신의 부인이 될 사람이라고요! 이 제국의 황후가 될 사람이라고요!”

“하리?”

“흑흑……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뭐하시느라 두 달 간 저를 안 찾으셨는지, 혹시 그동안 그 여인과…….”

난감한 히엘이었다. 여태 마력 증폭기와 황제가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느라 시종들에게 말을 해두었었다. 분명 이런저런 이유로 황후궁을 찾기가 어려울 거라 미리 일러두라 했었다. 하지만 예비 황후를 우습게 보는 시종들은 그 말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히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그는 하늘에 맹세코, 또한 드래곤에게 맹세코, 하리가 말하는 아이가 누구인지, 그 아이를 낳은 여인이 누구인지, 세라는 또 누구인지, 몰랐다.

정말 몰랐다.

“나는 하리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천연덕스럽고 기운 없이 되묻는 히엘의 태도가 하리에겐 오히려 수상쩍어 보이고 있었다. 하리는 떠올렸다. 얼마 전에 핀이 쿠션을 전해주러 오면서 했던 표정을.

핀은 히엘이 바람둥이라서 잘 잡아야 한다고 했고, 그녀는 맹약이 있어 괜찮다고 대답했었다. 그러자 핀은 짧은 순간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그렇다고 무표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었다.

지금 이 순간, 하리는 그 표정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맹약은 거짓인 거죠? 흑흑. 그래,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셔도 드래곤께서 그런 약속을 주관해주실 리가 없어. 한 여자에게만 일편단심 할 거라는 맹약이라니.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맹약이라니! 고작 나 때문에 폐하께서 그런 위험한 맹약을 맺을 리가 없으실 테지!”

“하리, 갑자기 왜 이래?”

하리는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왜 이러긴요! 아까 필기르의 깃털로 대화한 사람이 누구인지나 말씀하시라고요!”

국혼을 치르기도 전에 바가지를 긁는 하리에게 히엘은 당황하고야 말았다.

“일로 연락한 마활들이야, 진짜야.”

“거짓말! 대답이나 해 주세요. 사실은, 사실은 그런 거잖아요. 제가 황후로 앉혀놓기 만만하고 그러니까 제게 청혼하신 거 아니에요?”

“쉿. 그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거든! 광녀, 실망이거든!”

히엘은 장난스럽게 대꾸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 너무나 피곤한 상태였다. 오죽하면 오랜만에 만난 하리와 키스도 나누지 않고서 바로 수면에 빠졌었을까? 그는 하리의 감정이 더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다정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흐흐, 안심해. 나는 너한테 맹약한 몸이잖아.”

“마활이라는 말은 거짓이잖아요! 흐흑! 정말, 정말 저를 속이시는 거라면 이쯤에서 다 그만두…….”

“하리!”

히엘은 급기야 자신도 모르게 버럭 외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내 누그러진 목소리로 살살 달래주었다.

“미안. 하지만 나 진짜, 속이는 거 아냐.”

“그럼 증명을 해주세요!”

“아, 그러니까 아까 그 마법어는 마활들에게 한 거였어. 마활들이란 말이야. 그리고…….”

지금 중요한 일 때문에 연락 온 거고, 맹약도 모두 진짜고, 나 지금 솔직히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은데, 내일 다 천천히 다 알아듣도록 이야기해 줄 테니 그냥 자면 안 될까? 그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을 할 기운도 없는 히엘이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리가 폭탄선언을 했다.

“말을 흐리시는군요. 역시 다 거짓말이잖아요! 우리, 결혼 다시 생각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