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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을 짓궂게 놀리는 하얀 머리 청년의 이름은 라벤더 쥴 세르티에였다. 그의 고향과 가족들은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의 군대에게 짓밟혀 모두 사망했고 자신도 병사들의 마법 농간으로 전신 백화증에 걸려 피부,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런 그가 가엾다며 그의 눈동자를 마법사에게 맡겨 검게 바꿔주도록 도와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현재 그의 양부인 세르티에였다. 세르티에는 라브를 입양할 때만 해도 사르제스의 부유한 귀족이었으나, 현재는 모든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늙고 병든 노인이 되었다.
라브는 전쟁고아였지만 세르티에에게 거두어진 덕분에 사르제스 제국 귀족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제 양부를 버리지는 않았다. 라브는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은밀한 업소에 가서 창기노릇을 하며 양부의 약값을 댔다. 물론 약값만 버는 것은 아니었다. 미래를 위한 자금도 모으고 있었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청년답게 야심이 넘쳐났다. 그것은 바로 제국이 일으킨 전쟁의 후유증을 영상으로 고발하여 간접적으로나마 황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었다. 지금은 망국이 되어버린 고향을 위한 복수이기도 했다.
라브는 오늘도 강의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에, 추상 미술의 역사는 제국의 제 4대 황제께서 종교 자유령을 내리시면서 부터 시작되어 현대에 이르게 되었고…….”
졸다보니 펜을 떨어뜨리게 되었고, 그것을 줍다가 자연스레 주위를 둘러보게 됐다. 금발의 미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자신이 괴롭히기 좋아하는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이름을 가진 평민 학생이었다. 라브는 피식 웃었다.
‘평민이라면서 저 번지르르한 옷은 뭐냔 말이지.’
라브는 핀만 보면 가학심이 솟구쳤다. 예술 학교 등록 첫날, 등록을 위해 모두가 줄을 서고 있을 때였던가. 여자들이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금발 미청년이 등장하자마자 자리를 모두 비켜주는 괴 행동을 했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라이트릭 에센이 단지 반반하게 생겨서? 라브는 여자들의 그 웃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불합리한 대우를 마치 당연한 것인 양 받으며 맨 앞줄에 당당히 서는 라이트릭 에센 그 자체였다. 라브는 당시 너무나 화가나 라이트릭 에센에게 복수하기 위해 새치기를 했다. 뿐만 아니라 라이트릭 에센의 옷차림을 보며 시시껄렁한 말로 빈정거리기도 했다. 그날 라이트릭 에센 즉, 핀은 그를 살기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라브는 그에게 혀를 내밀며 약을 올렸었다.
첫 만남이 그러했던 것 때문일까. 라브는 그 후로도 핀을 숱하게 골렸었다. 라브는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자신과 똑같이 꾸벅꾸벅 조는 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너도 몸을 파냐’고 물었고, ‘너도 꽤 생겨서 돈 잘 벌겠다’고 모욕을 주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핀은 라브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기만 했고, 단 한 번도 반항을 한 적은 없었다.
라브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핀을 괴롭히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오늘은 핀이 입고 있는 옷, 등 뒤에 묻은 핑크색실이 놀림거리로 좋은 듯 했다. 뭐하다가 등에 핑크색 실을 붙이고 다니는 지 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라브는 앞에 앉은 핀의 등에다 대고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네 손님, 핑크색 속옷 입었었나봐?”
하지만 핀은 어떤 대답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네가 핑크색 속옷 입은 거야?”
그때 교수의 눈이 그들에게로 향했고, 라브는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계 생물 그 자체를 박제하는 설치 미술에 이르게 되었으며…….”
교수의 몽롱한 수업소리가 핀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자신이 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졸림, 이 상태로 수업을 마치고 또 레이디 로리 사무실로 가서 상사 로리의 뒤치다꺼리와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졸면서도 나오는 한숨,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웃겨서 핀은 웃어버렸다.
“후우, gm.”
“킥.”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핀이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등 뒤에서, 하얀 머리 청년이 웃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더라, 라벤더 세르티에. 평민들은 그를 세르티에 님이라 불렀고, 귀족들은 그를 라브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평민으로 사는 핀에게는 꼬박 존대를 해야 하는 귀족 녀석이었고,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핀은 라브의 웃음소리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고 교수가 결국 지적을 했다.
“에센 군.”
“…… 예?”
“자네의 조는 모습을 박제시켜두고 싶을 정도네.”
“…….”
“뭐, 그만큼 모델로서 더할 나위 없다는 말일세.”
킥킥, 하고 웃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핀의 귀가 새빨개졌고, 라브는 그 뒤에 그 뒤통수를 보며 신나는 듯이 웃었다.
***
히엘은 국혼을 코앞에 두고서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력 증폭기라는 기계의 완성을 위해서였다.
‘후, 이거 진짜 힘들군.’
바람기 때문에 제국의 탕아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제국의 공주라는 별명도 붙어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젠 그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외모가 엉망이었다. 갈색 수염은 흉흉히 자라나있었고, 눈 밑 검은 그림자는 음울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으며, 며칠 째 목욕을 하지도 못하고 정화마법만 두른 터라 피부도 엄청 건조했다. 실험 도중 잠시 거울을 보던 그는 스물일곱이 서른일곱처럼 보인다며 투덜대고는 중급 이상의 마력을 가진 저지능 마계생물들이 든 자루를 통째로 마력을 흡수하는 기계에다 쑤셔 박았다.
[퐁그르르- 퐁그르르-]
그러자 그 기계에서 마나 에테르가 나왔고, 그것은 곧바로 증폭기의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증폭기는 마나 에테르와 마괴석들의 불협화음을 내며 정제된 마나를 고농도로 압축시켰다. 이제 이렇게 압축된 힘은 훗날 어마어마한 마력을 뿜어낼 것이었다.
히엘은 그것을 생각만 해도 감격에 겨웠다. 그는 기쁜 표정으로 실험실의 마활들에게 외쳤다.
“다들 수고했어! 그리고 하퍼, 시간가능하면 이 증폭기 좀 괜찮은 모습으로 좀 새로 단장해봐. 이대로 내보이기엔 너무 구질구질해.”
“예. 폐하.”
“그럼 난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신부화장 아니…… 신랑화장 좀 받으러 간다.”
“폐하.”
“응?”
“쓰러지지 마십시오.”
“킥…… 고맙군.”
***
레이디 로리 사무실은 분주했다. 렌키스의 달이 닥쳐오자마자 여름 신상품 수 백 여종을 생산해야 하는 디자이너들이 겪는 압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쁘고 예민한 분위기에 사무실의 긴장감이 팽팽했다.
그리고 핀은 그 긴장감에 찬물을 부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바쁜 때에 가장 말단의 보조 디자이너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에 수석 디자이너들이 혀를 찼다. 그러나 핀은 그들의 도끼눈을 무시하고 꿋꿋이 조퇴를 결심했다. 그의 등 뒤에서 로리가 당장 이리로 오라고 악다구니를 썼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로리는 들고 있던 컵을 문 밖으로 나가고 있는 핀에게 던져버렸다.
어깨를 맞은 핀은 이를 악 물었다.
‘파괴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 이 충동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교 길에 라브가 핑크색 팬티를 입은 손님을 받았느냐고 조롱을 해서? 상사인 로리가 구두를 닦으라는 명령을 해서? 로리가 에스테틱 샵에 예약해놓으라고 시종에게나 시킬 법한 일을 시켜서? 다른 디자이너들이 번거로운 온갖 일들을 말단 사원에게 모두 떠맡겨서? 아니었다. 절대 그런 일들 때문에 이 충동을 느끼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 사소한 일들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하지만 핀은 몰랐다.
그런 사소한 것이 하나 둘 쌓여 엄청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그런 것이 평민의 삶이란 것을!
‘다 없애버리고 싶어.’
그는 자신이 그동안 마력 화산에서 짐승, 몬스터 사냥을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은 탓이라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그런 이유 때문에 이 파괴욕구에 휩싸이는 거라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는 편한 일이었다.
레이디 로리에서 조기 퇴근한 그는 곧바로 히엘에게로 갔다. 때 마침 히엘은 중앙궁 황제 침소에서 느긋하게 거품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동생을 보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흐익! 유령 같은 놈! 그 무서운 표정은 뭐냐!”
“참으로, 결혼 축하해.”
“그게 욕실서 할 이야기냐!”
“방어마법 좀 둘러줘.”
“왜?”
“둘러줘.”
예전에는 둘러, 라고 명령조로 말하던 핀이었다. 히엘은 동생이 성격의 변화에 기뻐 웃었다. 하지만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야, 저 눈빛은? 날 불태워 버릴 것 같잖아?’
히엘은 당장 방어마법을 둘러주지 않으면 자신을 죽일 것 같은 동생에게 겁을 먹었다. 그래서 동생이 원하는 대로 방어마법을 둘러주기로 했다. 마력 증폭기 실험 때문에 남은 마력이 얼마 없었지만, 딱 죽기 직전만큼만 짜내서 다중 방어마법을 둘러주었다. 그리고 핀이 원하는 장소인 마력 화산, 난폭한 짐승과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그 끔찍한 곳으로 이동까지 시켜주었다.
히엘은 핀이 뭣 때문에 그곳에 가서 사냥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핀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옛 시절부터 핀이 긴장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그런 파괴적인 것이었고, 그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바느질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고 이렇게 솔직하게 파괴본능에 이끌려 제 형을 찾는 것이 매우 기특할 뿐이었다.
“으히히, 얼마나 그 패악녀가 굴렸으면 사냥을 크크큭! 그래, 핀! 너의 길을 가라! 바느질 따위로 너의 스트레스는 풀릴 수가 없다고!”
히엘은 욕조에 다시 누워 허공으로 목화솜 같은 거품을 퐁퐁 휘날렸다.
“아아, 드디어 유부남이 되는군!”
혼인식은, 꼬박 하루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