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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68화 (6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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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드릭이 차린 식사를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강의를 받으러 간다. 오전 수업에는 하얀 머리 청년과 마주친다. 처음 학교에 등록하던 날 시비를 걸었던 그 청년이다. 청년은 늘 핀을 괴롭혀댔다. 밤새 뭘 해서 매일 그렇게 퀭한 얼굴로 수업을 받느냐, 혹시 밤마다 이상한 업소라도 나가는 것은 아니냐, 아, 물론 사는 입장이 아닌 파는 입장으로 말이지, 여하튼 잘 생긴 것들은 돈벌어먹기 참 쉽다 등등,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모욕적인 언사들을 하며 핀의 인내심을 한껏 긁곤 했다. 핀은 레이디 로리의 첫 시리즈인 렌키스의 로리 시리즈 작업이 완성된 후에 시간 여유가 되면 그 하안 머리 청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결심을 다졌다.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레이디 로리의 디자인실로 출근을 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도한 예술 학교 출신 디자이너들이 시키는 잔심부름과 디자인 업무들이다. 그 일들을 해내면 쥐꼬리 만 한 수당이란 것이 들어왔다. 핀은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다 경험이겠거니, 하고서 참아냈다.

그러나 자신을 애완견이라 부르는 오만한 귀족 아가씨의 카페인 음료수 심부름, 저녁 심부름, 심지어 사무실 청소심부름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강제로 떠맡아 하는 것은 도무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했다.

히엘에게 어떤 약점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전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깎이고 있었다. 혹여 누군가가 핀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를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을 말렸을 테지만, 불가사의하게도 그 누구도 그가 제국의 핏빛 강철 검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패악녀의 패악질이 오늘도 시작되었다.

“애완견! 내 구두 닦아놓으라고 안 했어? 얼른 이리 와서 내 구두 닦고 닦는 김에 발도 닦아!”

핀은 참았다. 오늘도 참으려 노력했다. 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성검으로 로리에게 응징을 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은 절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은 이제 성검을 쥘 수 있기는커녕 히엘에게 약점만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그가 볼일을 참다가 후에 화장실에 가서 시원히 해소하는 장면을 히엘의 마법 영상구에 찍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상은 아직까지도 히엘이 소장하고 있었다. 핀의 약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악독한 형은 제 동생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약점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봐, 핀. 레이디 로리에 출근하기 싫다고? 마음대로 해. 이 영상을 제국 내에 풀어버리는 건 시간문제니까. 하하하!…… 핀은 이를 악 물었다. 그 치욕스러운 약점만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자신이 이런 곳에서 저 오만방자한 귀족 아가씨의 잔심부름을 할 이유가 없었다.

“발 좀 내밀어보십시오.”

“뭐?”

“그래야 구두든 뭐든 닦을 것 아닙니까.”

“개 주제에 왜 이리 말투가 건방져? 잘 닦아라.”

핀은 오늘도 로리의 구두를 광이 나게 박박 닦았다. 로리가 한참 후에 만족스러운 듯 픽 웃으며 물어왔다.

“너 전직 구두닦이였니? 왜 이렇게 꼼꼼하게 잘 닦아?”

로리 딴에는 칭찬해주고자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빈정거림으로 들은 핀은 끓어오르는 살인 욕구를 잠재워야 했다. 그래도 많은 발전이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인내가 익숙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능청스러운 말까지 나오기까지 했으니.

“꼼꼼하게 닦을수록 젤레테스 님의 아름다운 발을 오랫동안 보고 있을 수 있잖습니까?”

핀은 그녀의 발을 보며 뼈까지 부서뜨려도 시원찮을 빌어먹을 발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아름답다는 말로 비아냥거리듯 하니 약간이나마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냉소하며 구두를 닦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정적이 흘렀다.

처음으로 핀의 능청스러운 말을 들은 로리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가고 있었다.

‘뭐, 뭐야, 이 개가! 감히 내 발을 탐내? 내가 널 탐내는 건 괜찮지만, 감히 너는 평민 주제에 날 탐내선 안 되잖아! 주제도 모르는 녀석이!’

로리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핀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애완견이 냉혈미남으로 알려진 전 황제 핀라이트랑 묘하게 닮은 것 같다. 머리를 새까맣게 염색하고, 눈동자도 새까맣게 만든 다음, 눈에 칼자국 하나만 그으면 영락없이 핀라이트와 똑같은 얼굴이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핀라이트의 형이자 황제인 히에라지엘을 닮은 것 같기도 한 것이?

로리의 눈초리를 부담스럽게 느낀 핀은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을 너무 빤히 살펴보니 자신의 정체가 들킨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평민처럼 굴어야했다.

핀은 정중한 태도로 바꾸어 말했다.

“흐음. 저기, 대표님.”

“가만, 가만 있어봐.”

로리는 핀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긴장한 핀의 얼굴이 붉어져갔다.

한참 후에 로리가 피식 웃으며 그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쳇, 황족의 귀티까지 닮은 잘생긴 녀석이군. 그래봤자 평민일 뿐이지.’

그녀는 구두 신은 발을 핀으로부터 떼어내고는 차갑게 명령했다.

“너, 내 방에서 꺼, 져.”

소원하던 퇴실명령에 핀은 구두 닦던 수건을 곱게 접고 나갔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로리는 살카령 빙반을 녹인 청정 생수로 만든 화장용 미스트를 얼굴에 뿌리며 자신의 뺨을 살짝 쳤다.

‘미쳤어! 미쳤어! 너같이 우아한 레이디가 저 따위 평민 놈에게 얼굴 붉혀? 이 모세혈관에 자존심도 없는 계집 같으니! 너 같은 건 맞아야 해! 귀족의 자존심도 없냐! 저건 그냥 키우기 반반한 개일 뿐이라고! 발이나 닦는!’

***

울다 잠든 하리를 깨운 것은 핀이었다. 세드릭의 축제에서 헤어진 뒤, 그 후 처음으로 만나는 하리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침 흘리고 자네. 넌.”

“어, 어떻게 여기를 온 거야?”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는 듯, 핀은 웃었다. 퇴근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이곳에 와서 피로가 가득 쌓인 웃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줄 선물을 내밀었다.

분홍 색깔이 고운 더블 웨딩링 쿠션이었다.

“이거 받아.”

하리는 그것을 받아들고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분명히 예전에 핀이 이걸 제 형에게 준다고 만든 적이 있었었지…….

“이건 폐하께 드리면 되는 거야?”

“아니.”

하리는 쿠션 뒷면의 자수 놓인 글자를 보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하리의 결혼을 축하하며.]

“이거…… 내 거야? 폐하 준다고 만든 거 아니었어?”

“히엘이 이런 색깔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처음부터 내게 주려고 이런 걸…….”

핀은 인정의 의미로 가볍게 웃었다. 하리의 눈이 커졌다. 어쩐지 자신이 좋아하는 분홍색과 아이보리색깔이 많다고 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더라니. 이런 것을 히엘을 주려고 만들 리는 없는 것이거늘.

“처음부터, 너 주려고 한 거야. 내 선생이 결혼을 하는데 이 정도 쯤이야.”

하리는 쿠션을 받아들고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점점 묘한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금세 눈시울이 빨개졌다.

“이제 사흘 남았지? 나는 못 갈 것 같아. 미리 주려고.”

결혼식을 볼 수 없단 핀의 말에 하리는 울음을 터트렸다.

“고, 고마워! 흑흑!”

지옥 같은 황궁 생활, 오랜만에 찾아온 감동 덕분에 하리는 정말이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가둬두고, 시체랑 살게 하고, 방치하고, 또 자신을 성검으로 찔러 죽이려던 핀이, 손과 정성이 많이 가는 퀼트 쿠션을 만들어 결혼 선물이라고 내밀고 있었다. 하리는 마치 그동안의 비극들이 눈 녹듯 사라져가는 기분이었다.

“바빴을 텐데 언제 이런 걸 다 한 거야? 크흑.”

“밤마다 시간 날 때. 조금씩 하니 금방 하더라.”

“너무 꼼꼼하게 잘 누볐다. 멋져, 멋져, 핀. 흑흑. 정말 넌, 내 제자답구나!”

웃으며 우는 하리의 얼굴에, 핀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왠지 하리가 기뻐서 우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서러움에 북받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으응. 아니, 아무 일 없어. 궁이 너무 넓어서, 너무 넓어서 그냥 좀 길 외우기가 힘들 어서.”

“그럴수록 부지런히 돌아다녀봐. 꽤 재미있는 곳도 많아.”

“재미?”

“마활궁은 스크롤 재료 쓰고 남은 것들이 많아서 거의 박물관 수준일 거야. 특이한 마계 생물들을 박제시켜둔 게 많거든. 그리고 마법 영상구 창고에 가면 내가 모아두었던 여러 연극들, 꽤 많아. 심심하면 그런 것 구경해. 황후궁이 이렇게 변한 것 보니까…… 여기서 바느질도 아늑하게 하겠다. 전보다 부드러운 느낌이네.”

그저 말을 듣고 있는 것뿐인데도, 하리는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넓은 궁 안에서 마음 열 사람 하나 없던 탓일까. 그녀는 갑자기 다가올 미래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평생, 황궁에서의 삶이 이렇게 외로워야 한다면 어쩌지?

“하리.”

“응?”

“히엘, 바람둥이야.”

“알아.”

“하리가 잘 잡아야 해.”

“괜찮아. 맹약이 있으니깐.”

히엘이 하리에게 일편단심하기로 한 맹약은, 드래곤의 참견으로 인하여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리는 원래부터 맹약에 대한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기에 여전히 믿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히엘이 거짓말했던 것을 알고, 아직도 드래곤이 일개 인간의 사랑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 핀이 보기에, 맹약에 안심하는 그녀의 모습은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리, 너 아직도 맹약을 진짜로…… 음. 아냐.”

“응?”

“아냐. 아무것도. 그것보다…… 결혼, 다시 한 번 축하한다. 갈게.”

핀은 그대로 붉은 언덕 집으로 이동했다.

혼자 남겨진 하리는 쿠션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저,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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