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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66화 (6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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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는 꽃마차 없이 집을 나왔다. 집에 있다가는 꼼짝없이 레이디 로리의 대표 겸 디자이너, 즉 드래곤의 의상 심부름꾼이 되어야 했기에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어 한 가출이었다. 황후가 되지 못해 공공연히 웃음을 받는 처지에, 옷 따위나 만들라고? 황제는 설마 그 옷을 드래곤에게 주는 척 하면서 그 중 몇 벌은 붉은 머리 여자에게 주려는 속셈 아니야? 로리의 피해망상증은 극단으로 치달아갔다.

그렇게 한 가출이었는데, 갈 곳이 없었다. 똥개라는 별명을 가질 지경으로 성격이 고약해 이럴 때 의지할 친구 하나 없었고, 설사 있다 해도 자존심이 용서를 하지 않았다. 고급 숙박업소에 머물자니 얼굴이 팔리고, 허름한 곳에 묵자니 견디질 못하겠고, 거기다 이젠 발까지 시렸다. 눈이 그쳤지만 눈길을 걸어오는 것은 정말 만만찮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츠를 신고 와야 했나. 생각을 하며 거리를 보는데 온통 연인지옥이었다. 동쪽을 보아도, 서쪽을 보아도, 북쪽을 보아도, 남쪽을 보아도, 지하상점가로 내려가도 연인들만 우글거렸다. 연인들은 뭐가 그리 행복한지 하하호호 웃다가 자신만 보면 미친 여자라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집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이제와 다시 돌아가자니 어설프게 가출한 것이 들켜 모친에게 더 맞을 것 같아 두려웠다.

노숙할 만한 적당한 곳이 필요했다. 저 멀리, 가이덴 특유의 하늘색 삼각형 불빛이 아른거리는 작은 건물이 괜찮아 보였다. 색색의 고무풍선들도 많고, 비슷한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젊은 사제들이 삼삼오오 바쁘게 어디론가 걸어 다니고 있는 풍경. 로리의 눈에는 그들이 가이덴 사제로 보였고, 그곳이 가이덴 교회로 보였지만, 실상은 가이덴 계열 중등학교였다.

‘저기서 하루 기도하는 척 하며 자야겠다.’

해가 뜨면 집을 구하기로 하고,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실내는 버글거리는 외부와는 달리 사람 하나 없었다. 뜬금없이 냄비와 요리도구들이 중앙에 펼쳐져있었다. 음식 재료도 보였다. 노숙자들을 위해 밥이라도 주는 교회인가? 로리는 최대한 가이덴 신자로 보이기 위해 하늘색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폭신한 의자 하나를 발견해 앉았다. 두 손을 모으고 등을 느긋이 뻗으며 기도를 가장한 잠을 자려 했다. 그때였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뭐야? 내가 여기서 기도하겠다는데 뭐가 안 돼?”

“이곳은 기도당이 아니라 학교 강당이고, 오늘은 저희 축제용 장소입니다. 앞에 분명 안내문이 적혀 있었을 텐데요.”

로리는 잠을 방해하는 소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순진하게 생긴 금발 소년의 생글거리는 웃음이 얄미웠다. 성질 같았으면 한 대 패주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제국법은 폭력을 행사하면 귀족 평민 따질 것 없이 보안청 구치소 신세를 며칠 져야하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출한 주제에 보안청까지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 로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학교였어?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건물이 너무 구려서 학교인지도 몰랐네. 안내문을 쓰려면 다음부터 크게 쓰도록.”

그녀는 하늘색 수건을 머리에서 치워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출입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들은 붉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 하나와…….

“애완견!”

그랬다. 들어온 이들은 붉은 단발머리의 하리와, 핀이었다.

“세드릭, 여기 있었구나.”

핀은 세드릭이 학교 축제에서 요리점을 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이렇게 하리와 온 참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을 보고 다짜고짜 애완견이라 불러대는 로리를 보고 찌푸린 인상을 했다. 옆에서는 하리가 진짜 어디에 강아지라도 있는 줄 알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 여기 강아지가 어디 있나?”

“하리, 강아지 같은 건 없어. 찾지 마.”

“으응, 그렇구나.”

하리와 이야기를 마친 핀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로리를 마치 구두에 묻은 새똥 보듯 보았다. 로리는 히엘의 눈을 부시게 만든 미인이었으나, 지금 그런 미모는 핀에게 조금도 다가오지 않았다. 두 눈은 멍들었고, 이런 추운 날씨에도 얇은 소재의 드레스에 높은 구두만 신고 있었으며, 커다란 트렁크를 질질 끌고 오는 것이 아무리 봐도 미친 여자였다. 이런 여자를 내 아들의 학교 축제에 두어 행사를 망칠 수가 없다고 생각한 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강당 밖으로 끌고 갔다.

로리는 손목이 아파 악을 바락바락 썼다.

“야! 이거 안 놔? 어디서 감히 주인의 허락도 없이 손을 만져, 만지길?”

핀은 그녀를 가까운 곳에 있는 보안청에 넘겨 집을 찾아주라고 할 생각이었다. 대답도 않고 묵묵히 걷는 핀에게 곱게 뒤따를 로리가 아니었다.

“이거 놓으라고 했지! 날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 거냐고! 감히 평민 주제에 허락도 없이 손을 만져? 한 번 혼나볼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에 하리와 세드릭은 당황했다. 이미 학교 축제의 손님들이 요리점 구경을 하러 하나둘씩 입장하고 있었다. 핀이 앞머리가 휘날리도록 한숨을 쉬며 무언가 말하려 하는 그때, 일순간 고요함이 감돌았다.

마법이동을 해온 황제, 히엘의 등장 덕분이었다.

하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하께서 어떻게 이곳에 오신 거지? 내가 있는 걸 어떻게 아시고!’

“에센 양. 지금 이런 곳에서 노닥거릴 때 입으라고 드레스를 사준 줄 아나? 내가 어제도 현실감이 없느냐고 묻지 않았었나? 그리고 어라? 넌?”

그는 핀의 손에 잡혀서 악다구니를 쓰는 로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아니,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인가.”

로리는 짧은 순간 황제가 이곳에 왜 왔나 하며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대답했다.

“잠시 바람 좀 쐬러 나온 것뿐입니다.”

“맙소사. 그대는 평소 바람을 쐴 때, 그렇게 큰 트렁크를 들고 다니는가?”

로리는 네깟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노려보았다.

히엘은 어딜 봐도 가출청소년으로 보이는 그녀의 행색을 살펴보다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놈의 계집애, 여기서도 행패 부리려다 핀한테 끌려가는 건가? 이거, 이거, 괜찮은 조합이 나오겠어. 저 돌 같은 핀 녀석의 성격도 개조시킬 겸, 이 고얀 계집애를 붙여다 줘볼까? 자꾸 우리 광녀 데리고 바느질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황제 좋은 게 뭐야! 저질러 버리자고!’

생각을 마친 히엘은 근엄을 연기하며 하리의 손목을 잡았다. 그 뒤, 핀과 로리에게 명령했다.

“라이프릭 에센 군. 군은 앞으로 레이디 로리의 보조 디자이너다.”

핀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은 이제부터 예술 학교 다니기에도 바쁠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레이디 어쩌고의 보조 디자이너라고? 핀은 히엘을 향해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 흘겨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전 황제이며 현 황제의 아우라고는 하나, 보는 눈이 많아서 감히 이렇게 평민의 행색을 하고서 대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로리는 달랐다. 그녀는 제 부모가 지켜보지 않는 지금 거침없이 속내를 내지르고 있었다.

“폐하! 저는 절대 레이디 로리의 드레스 같은 것은 만들고 싶지 않습……!”

그러나 그 항의가 다 끝나기도 전에, 히엘은 하리를 데리고 마법 이동으로 사라져버렸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움직이는 사람은 오직 세드릭뿐이었다.

‘백부께서는 정말이지! 우리 아버지의 새 이름은 라이프릭 에센이 아니라 라이트릭 에센인데!’

소년은 입술을 삐죽이며 묵묵히 요리점을 시작했다.

***

황제가 기거하는 중앙궁 침소의 거대 창으로 황후궁이 보였다. 황후궁은 이런 밤중에도 라이트마법으로 구석구석이 밝았다. 내년 봄에 혼인식을 하고 황후가 될 하리를 위한 새로운 단장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우와! 그림책에서나 볼 것 같은데!’

저 넓고 큰 쿵이 앞으로 자신의 거처라는 것이,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평생 평민의 삶을 살아왔기에 어째서 부부가 다른 궁에서 지내야하는지도 통 알 수 없었다.

“에센 양, 나 아직 화 안 풀렸다고.”

히엘은 시종이 가져온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사람을 야속하게 보는 눈동자가 너무 반짝거려 보석과 같았다. 비죽이 내민 입술은 이슬 맞은 꽃잎처럼 붉고 빛이 났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편한 자세를 하고 있는 것뿐인데도, 그런 정적인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예쁜 걸까. 하리는 넋을 잃고 바라만 볼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히엘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나 화났다고 하잖아. 에센 양.”

“저, 저도 화났습니다!”

“어째서?”

“제게 위치 추적 마법을 거셔서 세드릭 아니, 티에리아의 학교 축제까지 따라오신 것 말이에요!”

히엘은 하리의 눈을 피하며 천장을 보았다.

“차나 마셔.”

하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에 손을 댔다. 찬바람에 얼었던 손이 따뜻하게 녹았다. 다시 몸을 옆으로 돌린 히엘이 하리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심술이 줄줄 흘러나오는 표정이었다.

“광녀, 그거 알아?”

에센 양에서 다시 광녀로 호칭한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하리를 더 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 나한테 위치추적마법 걸게 한 여자는 광녀가 처음인 거?”

“아, 안 거시면 되잖아요.”

안 걸면 된다? 그렇게 되면 예비 황후의 경호를 위해 험악한 분위기의 호위 병사들을 경사스러운 학교 축제에 투입시키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아직 하리는 궁 생활에 적응하기에는 한참이나 먼 듯했다.

“그럼 그 작은 학교에 내 병사들도 우르르 갔을 테지. 누구 하나 보살피려고 말이야.”

하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아! 그랬던 거군요…… 미처, 미처 몰랐었어요.”

“광녀가 너무 조심성이 없으니까 내가 일하고 있어도 집중이 안 되잖아, 응?”

하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동생 같은 세드릭을 위해 축제에 갔던 일이, 결과적으로 예비 황후의 경솔한 행동이 되고 말았다. 히엘 역시 마음이 상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 형의 기분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하리를 돌려보내지 않았던 핀에게도 화가 났다. 정말 하리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잠복 병사정도는 요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동생, 하리, 둘 다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장시간 삐치는 것 역시, 그의 성격엔 맞지 않았다.

“차나 줘.”

“여기 드세요.”

“아니, 나 누워 있잖아. 광녀가 나한테 직접 줘야지.”

“……?”

“입에 담아서 여기, 내 입으로.”

야릇한 주문을 한 히엘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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