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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빱빱빠라빱빱빠-]
동이 트기도 전, 중앙궁에 알람 마법음이 아주 크게 울려 퍼졌다. 히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을 겨우 네다섯 시간 밖에 자지 못해서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세수할 시간도 없군. 네레크(정화마법).”
그는 옷을 대충 차려입고 가공간을 지나, 붉은 지붕 집으로 갔다.
“일과! 연애를! 동시에! 해봐요!”
“흐어, 폐하, 졸립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 봐요!”
“흐잉.”
하리는 잠을 다 깨기도 전에 히엘의 손에 잡혀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황제 커플은 변복한 호위 병사들을 앞세우고 아이얄의 명품 거리를 돌았다. 히엘은 드래곤에게 줄 공물을 ‘직접’ 구할 겸 하리와 잠시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각 디자이너들마다 최고로 내세우는 ‘작품’들만 추려내도록. 에센 양도 드레스들을 양껏 골라주시오.”
병사들은 드래곤에게 바칠 겨울 신상품들을 이 잡듯 뒤져 모으기 시작했다. 하리는 꾸벅 꾸벅 졸다가 드레스를 양껏 고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비록 드래곤에게 바칠 드레스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옷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쇼핑은 오후 내내 이어졌다. 옷 백 벌, 구두 백 켤레. 패션에 관심 없는 히엘과 호위 병사들에게는 정말이지 인내심을 시험하는 숫자였다. 어쩌다보니 하리도 좋은 드레스를 골라주었다는 이유로 겨울 드레스 수십 벌을 얻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녀는 연신 싱글벙글웃으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나 남편 잘 만났나봐!’
***
히엘은 하리와 함께 공물들을 가지고 검은 산으로 갔다.
[이것들은 다 뭔가.]
드래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비록 드레스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졌지만, 사랑스러운 디자인보다 과감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호했다. 그랬기에 하리가 고른 사랑스럽고도 귀여운 드레스들이 마음에 들 수 없었다.
[핑크, 핑크, 하나 같이 레이스, 프릴, 정말이지 최악이로군…….]
드래곤은 마법으로 잔소리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하리가 마법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망정이지, 만약 하리가 들었다면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악평이었다. 그의 투정을 듣다가 한계에 다다른 히엘은 땅에 머리를 박으며 마법어로 외쳤다.
[그러니까 절 죽이시라니까요!]
드래곤은 투정을 작작 부리기로 했다.
수고했다며 하리에 대한 맹약을 주관해주겠다는 선물도 잊지 않았다.
[뭐 아무튼 고맙군. 내 그대의 사랑을 영원히 지켜주겠네.]
그러니까 하리에 대한 히엘의 사랑, 충성의 맹약을 뜻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와 그대의 연인에 대한 일편단심의 맹약이 실현되었다는 말일세.]
히엘은 어느샌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진짜, 진짜, 진짜 하리‘만’ 보아야 한다고? 이 넓은 가슴 속에 하리 하나만 두고 살아야 한다고?
‘일편단심이라니? 응?’
히엘은 드래곤을 미심쩍은 듯 보았다. 오지랖도 넓은 파충류같으니. 일개 인간의 짝짓기에 관여하는 드래곤에게 혹시 스토커 기질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어떻게 자신이 하리에게 그 맹약을 거짓으로 말했다는 것을 저 생물체가 알고 있는 걸까. 혹시 인간의 말을 해석하기라도 하는 걸까?
[드래곤이시여. 어찌 인간의 말을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저번, 저저번, 저저저번부터 자꾸 제 말을 엿들으시는 것 같은데…….]
드래곤은 자신에게 인간의 말을 동시통역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 몸이 못하는 것은 없다. 부디 행복하고 ‘한결같은’ 결혼생활 보내길.]
히엘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제부터 한 여자에게 사랑, 믿음, 소망해야 하나? 그것이 결혼인 것이다. 정녕?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영원히? 그것이 운명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랑, 믿음, 소망, 그 현실, 그 운명을 제대로 운전하지 못해 짝과 지지고 볶고 춤을 추며 살았고, 히엘 역시 그 무한 기복의 드라마를 자신의 부모를 봐와서 잘 알고 있었다.
‘악! 싫어. 난 그렇게 끔찍한 부부는 되지 않을 거거든!’
아직까진 하리와 손만 잡아도 설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앞에 펼쳐진 ‘한결로드’의 단점을 크게 체감하지 못한 채 긍정했다.
[감사합니다.]
뒤돌아선 그가 호위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제…… 젤…… 젤레테스 대공의 저택으로 이동…….”
***
젤레테스 가의 넓은 홀에는 아직도 그을음이 가득했다. 그것은 한때 로리가 남긴 분노의 흔적들이었다.
‘감히 드래곤에게 보낼 공물을 여기서 맘대로 태워버렸단 말이지!’
히엘은 그곳에 자리하여 분노어린 시선으로 사람들을 찬찬히 보았다. 젤레테스 대공 부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예를 갖춰 황제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드래곤에게 바칠 공물을 관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그들 중 로가드리아로 추측되는 여자가 보이지 않자 히엘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이제 그에게 황제의 근엄 따위는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대공. 자식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킨 겁니까? 나와! 나오라고! 이 집안의 버릇없는 계집애!”
제 아무리 대륙 단일권력자라고는 하나, 결례를 저지른 것이었다. 전전대 황제와 전대 황제의 정복 전쟁을 선두에서 함께 지휘한 젤레테스 대공의 딸에게 ‘계집애’라고 부르는 것은 대공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리라.
‘내가 그간 쌓은 공이 얼만데 감히 내 딸에게 계집애? 결혼도 안 한 딸에게 그런 모욕을? 설사 결혼을 했다 해도 계집애라는 말은 모욕중의 모욕이거늘. 네깟 황제 놈이 해준 게 대체 뭐가 있어? 오찬 약속을 수락해줬어? 내 딸을 황후로 앉히길 해줬어?’
그러나 대공은 딸이 저지른 죄가 있기에 한 마디도 못하고 자신이 낳은 그 ‘계집애’를 방에서 데려와 히엘의 앞에 끌어 앉혔다.
“악! 아버지, 이거 놔요! 앉기 싫다고요!”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서 폐하께 사죄 드리거라!”
무릎은 꿇은 로리는 히엘을 표독스러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미 공물 드레스에 불을 질러 마담 젤레테스에게 두드려 맞아 두 눈이 너구리처럼 멍든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는 가려지지 않아 약 오 초간 히엘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이름이 로가드리아라서 그런지 정말이지 그 꽃처럼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었다.
로리의 미모에 휘청거리던 히엘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뭐지? 이 될성부른 미인은? 우유 조금만 더 먹고 크면 남자 여럿 울릴 것 같잖아?’
새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새빨간 입술, 또렷한 이목구비가 마치 인형을 보는 듯했다. 히엘이 황궁 연회에 흥미가 없어 로리를 이제야 보았지만 만약 예전부터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번쯤 만남을 가졌으리라. 외모도 외모지만 성격까지 건방져서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차이가 무려 열 살에 가까웠다. 아청법에 걸릴지도 몰랐다. 히엘은 로리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취향은 ‘로리’가 아니라 세뇌한 뒤, 본 목적에 충실하게 외쳤다.
“너냐?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작품을 불태운 게? 왜 그랬냐? 드래곤한테 바칠 공물이었다. 무려 드래곤한테 바칠 공물이었다고! 그걸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혹시 드래곤이랑 사귀다가 차이기라도 했냐?”
로리는 멍든 시퍼런 눈을 치켜뜨며, 그 어떤 두려움과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드래곤에게 차인 거라면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제국의 걸레에게 차인 이 치욕을 폐하께서 아실지 모르겠군요!”
많은 이들이 경악에 찬 눈빛으로 로리를 보았다.
황제를 보고 제국의 걸레라는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여러 귀족들 사이에서 황제에게 뻥 차인 패배자가 되고 만 로리의 처절하고도 살기어린 응징이었다.
히엘은 그대로 굳어버린 채 로리의 말을 한참이나 생각했다.
‘헉…… 이 계집애, 얼마나 화난 거면 내 욕을 대놓고 하는 거지? 게다가 욕이 너무 자연스럽군!’
히엘은 드디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도도한 귀족 영애를 제국의 웃음거리로 만든 것? 아니었다.
원죄는 따로 있었다. 원죄를 저지른 사람은 로리를 뻥 차버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들이었다.
‘젠장, 저는 왜 이렇게 잘 생긴 얼굴로 태어나 여자들의 원한을 사버린 겁니까!’
히엘은 왕자로 태어나 왕자병에 걸릴 수 없는 운명이 숙명이라 자조하며 갑자기 로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또 다시 황제 모독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근엄한 어조는 필수였다.
“으흠. 그대는 내년이면 성인이 된다지? 사르제스 제1 아카데미의 수석졸업예정자라 했고, 뭐 아무튼 재원이라더군. 창창한 미래를 권력의 암투가 난무하는 황궁에 가둬놓을 수는 없잖은가. 그건 참 숨 막히는 일일 것이다. 듣자하니 그대는 미술에, 특히 디자인에 소질이 있다고 하더군. 마담 젤레테스의 영향을 진하게, 매우 진하게 받은 거라 생각하네. 내 친히 그대의 후원자가 되어 그대가 만들어내는 그 어떤 작품이든, 특히 그 어떤 ‘의상’이든 사르제스의 이름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할 생각이니 그대, 그렇게 슬퍼말고 황후가 아닌 새 삶을 위해 힘쓰라…….”
달래는 시늉에 불과할 뿐 역시나 방문한 본래의 목적-로리에게 드래곤의 공물로 바칠 온갖 신상품들을 덮어씌우기-에 충실한 말이었다.
로리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나보고 옷을 만들라고? 저 미친 황제가 진짜!’
로리는 황제의 속셈이 미심쩍었다. 단언컨대 자신은 디자인은커녕 돌멩이 그리기에도 소질이 없었다. 아름답고 예쁜 것을 고르는 것만 할 줄 알았지, 뭐 작품? 의상? 그녀는 뜬금없는 황제의 말에 인상을 사정없이 찌푸리며 거절의 말을 전하려 했다.
“디자인? 그런 것은 개나 주십…….”
말을 하던 로리는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로가드리아! 아니, 얘가 몸이 약해서…….”
등 뒤에서 젤레테스 대공이 얼마 없는 마력으로 제 딸의 등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딸을 반 기절시킨 대공은 황제의 제안을 충정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로리는 엉겁결에 레이디 로리라는 새로운 패션브랜드를 만들게 됐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히엘은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계의 실험실로 갔다. 마력 증폭기를 손봐야했다. 국혼준비도 해야 하고, 슬슬 잡음이 생기기 시작한 궁내 인사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도무지 뭐가 이리 일일이 다 신경을 써야 하는지 머리가 터질 노릇이었다. 온전히 마법 하나만 붙잡고 있던 예전과는 다른 부담이라 가끔씩 숨이 막히기도 했다.
하리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벌써부터 힘들 조짐이 보이자,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도 컸다.
그러나 그 시간, 정작 하리는 외롭지 않았다. 그녀는 히엘이 사준 새 드레스를 입고 핀과 함께 세드릭의 학교 축제를 즐기러 가고 있었다.
***
머슈타트 광산에서 회괴석을 빠른 시간에 정제하여 히엘의 눈길을 주목시켰던 흑인소년이 있었다. 히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소년은 지금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마계로 가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마계에 히든의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소년은 자신을 데리러 온 청회색 마활 로브의 여인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뭐해?”
여인이 대답했다.
“그분이 시키신 일을 하면 돼. 그럼 네 미래는 밝단다.”
히든은 갸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