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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그래도 자네에겐 시간이 많지.]
[마담 젤레테스에게 하루 안에 다시 만들라 지시하겠습니다!]
[건방진 것. 내 그대에게 ‘직접’ 뼈아픈 반성을 하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대가 아랫것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마담 젤레테스에게 ‘부탁’해서, ‘직접’ 나에게 바치러 오고, 없으면, ‘직접’ 똑같이 ‘만들어서’라도 가져오라 했네. 분명.]
드래곤은 ‘직접’이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 황제가 몸소 대공의 부인에게 옷을 달라고 찾아가는 것, 정말이지 쉬운 일이라 할 수 없었다. 무려 황제가 되어서는 대공의 부인에게 가서 ‘옷 좀 줍쇼’ 라고 굽실거려야 한다, 라? 지금 히엘은 전 황제와 같이 높은 자존심을 가진 것 까진 아니더라도, 상당히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직접 뼈아픈 반성을 하라고? 대체 자신이 무얼 잘못하여 드래곤한테 마담 젤레…… 라는 아주 긴 이름의 옷 따위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설마하니 드래곤이 기선 제압을 하려고 이딴 명령을 내린 건가? 드래곤은 그렇게나 자신이 황제로서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여러모로 짜증이 난 히엘은 거침없이 말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엽궐련부터 꺼내졌다.
[좀 태우겠습니다.]
[뭐야? 이미 탄 걸 또 태우겠다고? 감히 이 나에게…… 아, 드레스가 아니라 엽궐련 말이군.]
후- 하고 니이새 둥지에서 엽궐련을 꺼내 문 히엘의 표정이 싸늘하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차라리 심장을 부숴주시지, 대체 이런 번거롭고도 말도 안 되는 공물을 요구하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언젠가 드래곤에게 욕설을 해놓고서도 그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히엘에게, 드래곤은 크게 진노했다.
[정말 네 죄를 모르겠는가!]
감정이 실린 마법어에 히엘은 일단 사과부터 대충 던져댔다.
[아, 그러니까 사죄드립니다.]
[사과한다고 다 될 것 같은가? 네 죄가 뭔지도 모르지 않나! 그냥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혼 없는 사죄이지 않는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사죄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인가!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 할 게 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
[왜 대답을 하지 못하느냔 말이다! 대답을 못하면 앞으로 나에게 또 그럴 것이 아니겠느냐 말이다!]
분명 드래곤의 마법어는 히엘에게 묵직한 남성어로 들리고 있었지만, 이 순간 히엘은 드래곤이 사실은 암컷이 아닌가, 의심하고 말았다. 어쩐지 인간 여장을 하여 드레스를 입고, 또 드레스를 공물로 요구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이 대륙 최강의 생물체는 그 정신마저 여인과 같은 것인가? 마치 지금의 대화는 무심한 남편이 섬세한 감성을 가진 부인에게 큰 죄를 짓고 그 죄가 뭔지 몰라 대충 넘어가려고 성의 없이 사과를 하다가 더욱 더 부인의 화를 자극하고 만 그 꼴과 같았다. 히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드래곤 녀석…… 그렇게 예쁘게 변신을 해서는, 목소리마저 옥구슬 같았다면 나 홀렸을지도 모르겠네. 생각해보니 너무 무섭잖아!’
***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히엘은 바람둥이답게 드래곤의 마음을 풀어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삐친 여자들의 징징대는 소리를 뚝 그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어릴 적에야 번거로운 방법을 이용했다.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다 안다며 죄를 고백하고, 손과 무릎이 닳도록 빈 뒤, 하인처럼 무슨 ‘명령’이든 들어주며 여자들의 화가 풀리도록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러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신분도 신분이거니와 맡은 일이 많은 지라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에 무조건 고가의 선물을 보내어 달래는 것으로 끝이었다. 열에 아홉은 먹혀들었고 먹혀들지 않는 나머지 여자들은 성가시고 왠지 무서워서 만남을 중단했었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지금 드래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물론, 드래곤이라는 최강 생물체에 대한 격을 맞춰주는 것은 필수.
[좋습니다. 드래곤이시여. 제가 부족한 인간이라 당신께 상처를 드렸습니다.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그것도 제 불찰로 타고 말았습니다. 백 번 심장이 부서져도 드릴 말씀은 없으나, 반성은 하고 싶습니다. 매 시즌마다 새로운 드레스 오십 벌과 구두 오십 켤레의 공물은 어떠십니까? 비록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그런 것은 구하지 못할지언정 평생토록 그 공물들을 바쳐 죄를 지우겠나이다. 청을 받아주소서.]
드래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것으로 나의 화가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마음 같아서는 대륙의 드레스디자이너들이란 죄다 잡아 검은 산에 가둬버리고, 오직 당신 하나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바치라고 명령하고 싶습니다만 능력이 부족하여 그 정도밖에 하지 못할 듯합니다. 정 싫으시다면…… 저 같은 놈의 심장을 그냥 이대로 터트려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살 가치가 없…….]
[각각 오십 가지로는 턱도 없지.]
[…… 예?]
[한 시즌 당 백 일로 치고 드레스 백 벌, 구두 백 켤레.]
[…….]
히엘은 이 순간, 드래곤의 사생활을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관절 하루 한 번씩 드레스를 왜, 무엇을 하기 위해서, 어디를 가기위해서 갈아입어야 하는 것일까?
[명을 들을 것인가. 심장을 내게 줄 것인가.]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다.
[명을 듣겠습니다.]
[좋다. 그러면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는 가져오지 않아도 넘어가주겠다.]
꼼짝없이 드래곤의 드레스 심부름꾼이 되어버린 히엘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대답만큼은 아부의 절정을 찍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엔젤리카의 날개도 당신의 아량만큼 눈부시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일 당장 겨울 시즌 상품들이나 바쳐라.]
히엘은 드래곤의 삐침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 안도하며 중요한 문제를 꺼냈다.
[그럼 마활들은 언제 돌려주실…….]
[궁에 가보면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말씀하십쇼.]
[다음부터는 바른말, 고운 말을 쓰도록.]
히엘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난데없이 바른말, 고운 말을 사용하라는 드래곤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
검은 산에서 돌아온 히엘은 니이새 둥지에서 엽궐련을 연달아 피며 분노를 삭였다.
뭐? 한 시즌 당 백일로 치고 드레스 백 벌, 구두 백 켤레? 시즌 신상품이 그 정도로 나오기나 하나? 대륙의 최강생물체로 살면 됐지, 대륙의 트렌드세터까지 될 셈인가?
“개xx, x같은 드래곤 새x가 덩치는 산만한 게 확 축소마법이나 걸어서 발로 비늘이 다 짓이겨지도록 밟아버릴라, xx, xxx, xxxxx, xxx…… xxxxx!"
드래곤의 패션야욕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뱉게 만들었다. 분을 삭이다보니 이 모든 게 마담 젤레테스의 딸자식이 패악을 부려 일어난 듯했다.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켜서 감히 황실에 들어가는 물건, 그것도 드래곤 공물을 불 태워버리게 하는가?
히엘은 내일 날이 밝으면 몸소 겨울 신상품 드레스와 구두들을 챙겨 검은 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젤레테스 대공저에 들러 그 버릇없는 딸에게 죄를 단단히 물을 작정이었다. 만약 지금 황제가 핀이었다면 그 딸의 목을 베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핀과 달랐다. 조금 더 다른 복수의 방식을 생각해냈다.
“아주 머리에 불이 나도록 드레스만 만들도록 해주겠어, 젤레테스 딸자식아!”
그것은 로가드리아가 직접 디자이너가 되어 시즌 당 드레스 백 벌, 구두 백 켤레를 제작해내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드래곤에게 바칠 공물의 양을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
어느새 눈이 소복이 쌓였다. 붉은 지붕 집의 조명들이 하나둘씩 꺼졌다. 바느질 하던 것을 정리한 하리는 아쉬운 눈으로 어두운 공간을 돌아보았다. 이 집을 영원히 떠나야 하는 상념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고 있는 핀의 표정도 어두웠다. 사실은 하리에게 제대로 사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끝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락방으로 가려고 마지막 불 하나를 끄는 하리의 뒷모습에 핀이 손바닥을 폈다, 놨다 하며 망설였다.
그때였다. 하리가 뒤돌아서서 어둠 속에서 고백하듯 말했다.
“핀. 할 말이 있어.”
“…… 뭔데.”
어둠 속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하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핀은 괜스레 의자를 테이블 아래 밀어 넣었다. 기이익-하는 소리가 나오고, 갑자기 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가슴이 아프게 찔린 듯 아파왔다.
“예전에…… 네 가슴, 찌른 거, 정말 미안해.”
의자를 밀어 넣던 핀의 손등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었다. 이상했다. 가둬두고 나쁜 짓 해서, 이중성력자인 줄 알고 죽이려 해서, 그런 지난 일들을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차마 나오지 않아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저 여인이, 도리어 사과를 한단 말인가.
저토록 서글픈 얼굴로.
“그때는 내 정신이 그렇게 온전하지 못했어, 불안해서…… 네가 너무 무서워서…… 아무튼 그렇게 너한테 상처를…….”
“하리, 사과 하지 마.”
“응?”
“하지 마. 그런 사과.”
“…….”
“해야 할 사람은, 나니까.”
“난 됐어. 엔과 세라비한테나 해.”
핀의 눈물 줄기가 굵어졌다. 가공간에 폐인처럼 틀어박혀 있던 지난 시간, 이미 그들에게 수백 번 사과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신이 죽여 버린 사람에 대한 죄를 일일이 사죄하다보면, 아마 자신은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온 대륙에 쏟아 부은 피를 주워 담을 수는 없으며, 이미 죽어버린 옛 친구를 다시 살리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써 외면하고 어쩔 수 없었다며 뻔뻔하게 넘어갔었다. 자책과 불안을 속으로 수천 번 삼키면서 지난 시간과 지난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없던 일처럼 굳혀갔다.
하리는 자신에게 있어 무엇일까. 어떤 존재일까.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살아있다. 게다가 행복한 날까지 앞두고 있다. 그런 하리가 자신을 용서해준다면, 핀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받은 느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용서받아야 했다. 용서를 받으며, 오랫동안 그녀가 행복한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또한 자신 역시 긴 시간 변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증명시키고 싶었다.
그는 하리에게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한 손을 내밀었다. 하리가 그 손을 보고 주저하자, 그는 직접 하리의 손을 찾아 잡고 악수하듯 만졌다. 그의 손은 온기로 감싸여있었다. 히엘이 예전에 그의 몸에 둘러놓은 온열마법 덕분이었다. 하리는 그의 따스한 손이 낯설었다.
“퀼트, 나와만 하겠다고 약속 했었지?”
“응?”
“앞으로도 계속 가르쳐 줘.”
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면, 엔, 세라비한테…… 평생, 사죄하며 살게.”
모든 사람들에게도.
“응. 알았어.”
“하리.”
“응.”
“행복해라. 꼭.”
“고마워. 너도.”
두 손은 떨어졌고, 하리는 붉은 지붕 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해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핀의 얼굴에, 미소가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