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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이고 있는 찻물에 김이 솟아오를 때 쯤, 다락방에서 예쁜 드레스 차림의 하리가 내려왔다. 가공간에서 바로 도착한 것이었다. 세드릭과 하리는 마치 친남매처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핀은 어떻게 하면 자신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건넬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무의미하게, 하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핀,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궁은 정말 넓더라! 그리고 태후 페하께서는 정말, 정말 굉장히 위, 위엄 있는 분이셨어. 너랑 좀 닮은 것 같았다고나 할지…….”
세드릭은 '우리 할머니가 좀 그렇죠.' 라며 씩 웃었다. 하지만 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랬구나.”
그는 지금 하리의 말을 듣는 것 보다 하리에게 어떤 차를 무슨 말을 건네며 줘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 더 중요했다.
“아, 참. 난 이제부터 궁에서 지낼 거야. 여러모로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 해서. 그리고 사가에서 지내는 건 위험하다고 하더라.”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예상보다 일찍 궁으로 떠난다는 말에, 그제야 핀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궁이 제일 위험한데.”
궁에서 두 아들을 잃은 그는 그렇게 하리를 말렸다. 하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궁이 제일 위험하다니?
그때, 세드릭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궁으로 일찍 가려는 하리를 위험하단 말로 은근슬쩍 막는 제 아버지가 하리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핀은 초조한 표정을 하며 찻잎을 골랐다. 시종이 저녁에 마시기 좋다며 노란색 잎차를 권해왔다. 그는 그것을 우려내어 잔에 따랐다. 그 행동이나 표정이 어느 때 보다 주의 깊고 진지하여 하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예전에 바느질을 할 때랑 똑같은 표정이네.’
핀은 하리에게 차를 멋쩍게 내밀었다.
“마셔. 추웠을 테니까.”
그 태도에 세드릭의 오해는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가 대체 어쩌자고 저러시는 거지! 하리 누나는 곧 황후가 될 건데!’
하리는 테이블에 자리해서 차를 홀짝 홀짝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실 책장을 뒤져서 어느 수예 서적을 꺼내 하리에게 들고 갔다.
세드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가 미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만 알지, 수공예에 대한 남모르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핀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핀은 수예서적의 어느 장을 펼쳐서 하리에게 내보였다.
“에센. 여기 이 패턴 말이다. 이 패턴으로 이불을 하는 건 나에게 무리고, 쿠션으로 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
“음. 어디 보자…….”
패턴을 찬찬히 살펴보던 하리는 갑자기 미묘한 시선으로 핀을 올려다보았다. 핀이 선택한 패턴은 더블 웨딩링이라는 이름으로 결혼과 관련된 화사한 패턴이었다.
곧 국혼을 앞둔 하리는 부담스러웠다.
‘날 위해 쿠션을 만들어 줄 셈인가?’
그녀는 결국 핀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기, 핀. 이런 어려운 패턴은 초보인 핀이 하기엔 오래 걸릴 거야. 아주 오래 힘들게 해야 할 거야. 그러니 먼 훗날, 아주 나중에, 세드릭이 결혼할 때 해주면 되겠다.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에센, 무슨 말이야…….”
“사실 나는 이 패턴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음, 그러니까.”
“형 주려고 하는 건데.”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하리의 얼굴이 서서히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연속으로 끄덕였다. 아아, 이게 무슨 망신이람! 그래, 내 남편이 될 사람이 이 녀석에게는 형이었지. 친 형! 내가 무슨 오해를 한 거람? 뭐야, 너무 부끄럽잖아! 쿠키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미리 우유 부어놓고 있는 꼴이라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하리였고, 핀은 씩 웃었다.
***
로리는 길에서 만난 미청년을 뒷조사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그 미청년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와서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로가드리아 아가씨! 하루 빨리 궁에 가서 황제 폐하를 만나야 할 이때 그런 무시무시한 청년에 대한 관심을 가지시다니요! 저희는 두 번 다시 그 청년의 뒤를 밟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시키지 말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건방지군. 내가 시키면 너희는 그저 하면 되는 거야. 알겠어?”
그녀는 애완견으로 삼고 싶은 미청년이 싸움까지 잘 하는 것 같아 매우 흡족했다.
기분이 좋은 그녀는 아이얄의 명품 대로를 돌아다니며 옷과 장신구를 사들였다. 평민으로 보이던 그 ‘애완견’에게 줄 옷과 장신구들도 샀다. 수많은 물건들을 사들고 돌아가려는데, 그녀의 눈을 잡은 호외가 하나있었다.
“로가드리아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어느 평민집안의 여식이 태후 폐하와 알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주, 아주 뚱뚱하고, 못생기고, 바보 같다고 해요!”
호외는 사실과 다른 부분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은 로리는 뒷목을 잡고 말았다.
‘미, 믿을 수 없어! 이 내가, 이 잘난 내가, 고작 평민집안의 어느 못생긴 돼지에게 진거야? 말이 안 되잖아!’
그녀는 불같은 화를 내며 당장 본가로 돌아갔다. 저택의 넓은 현관문을 제 손으로 직접 박차고 들어간 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짓밟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 상당량 존재하는 마력으로 귀한 장식품까지 불태워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악! 살기 싫어! 죽어 버릴 거야!”
이제부터는 사교 모임도 나가지 못할 것이다. 하찮은 평민 여자에게 황후 자리를 내준 것이나 다름없는 이 사실을 알면 모두가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황제를 향한 욕설을 했다. 그러다가 그만 대형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내일 새벽에 황궁에 진상되기로 했던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에도 불을 지르고 만 것이었다.
“너, 너, 너, 이 미친, 패악녀 같으니라고!”
마담 젤레테스는 로리를 쥐 잡듯 잡기 시작했다.
***
한편,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를 드래곤에게 바쳐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히엘은 정작 로리의 패악을 모른 채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즐거운 듯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태후와 하리의 만남도 무사히 마쳤겠다, 내일 새벽이면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5도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걸로 알겠다, 이제부터 할 일은 목욕이나 하고 하리에게 이동해 엊그제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아이 만들기’ 일이나 마저 하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다락방이 아닌, 니이새 둥지에서 거사를 치르겠어! 우리 광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홍홍! 아, 참 가기 전에 마력 증폭기 손 도 좀 보고…….’
이번에는 세드릭의 방해 때문에 거사를 망치는 일이 없어야 했다. 절대로 없어야 했다.
그가 작정을 하며 하리를 데리러 붉은 지붕 집으로 갔을 때였다.
‘뭐야! 너희 뭐하는 거냐, 어?’
아이를 함께 만들어야 할 자신의 동지가 다락방에서 곱게 잠들어있기는커녕 거실에서 테이블에 자리하여 핀과 바느질에 열중이었다.
“잘 봐봐, 더블웨딩링 쿠션은 이렇게 만드는 거야…….”
하리는 조곤조곤 다정하게 설명했고, 핀은 매우 집중하여 그 말을 듣고 있었다.
히엘의 낯빛이 변했다. 그는 하리가 더블웨딩링 쿠션인지 뭔지를 만든다고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에 화가 난 나머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 너희들, 황제가 끓이는 차 좀 마셔볼래?”
“좋군. 목이 말랐는데 잘 됐네. 히엘이 끓여줘.”
“폐하, 영광이옵니다.”
“…….”
히엘은 최대한 웃으려고 애를 쓰며 차를 끓여 그들에게 바쳤다. 적당히 찬물을 섞어 탄 뒤, 찻잔에 매우 적은 양을 부어 한 번에 들이마실 수 있게끔 만들어 두었다.
“광녀, 얼른 이거 마시고, 피부 상할 테니 빨리 자. 응응.”
“네, 거기다 두셔요.”
“아니, 아니, 지금 마셔야 해. 딱 좋은 온도야.”
“네, 마실게요.”
“글쎄 지금 마셔야 한다니까? 얼른 마시고 자야지. 응.”
“네네. 거기 두시라니까요.”
하리는 예의상 슬쩍 맛을 보는 시늉만 했다. 히엘의 ‘아이 만들기 동지의식’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표정을 지켜본 핀은 의미 있는 조소를 지었다. 그 역시 너구리같은 형의 엉큼한 속셈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하리가 바느질에 열중하며 말했다.
“아, 폐하, 궁으로 안 돌아가세요?”
“으응?”
지금 너랑 당장 궁이든 어디든 가서 뭔가 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차를 만들어 바치고 파장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 히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다분히 어설퍼 보였기에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을 파악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둔한 하리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이 순간 히엘을 그저 재봉틀 하인처럼 부려 먹을 궁리만 했다.
“폐하, 시간 좀 되시면 저기 이 가위로 이 패턴 좀 잘라주세요. 핀이 생각보다 잇는 속도가 빨라서 금세 조각이 사라지네요. 전 어차피 오늘이 여기서 마지막 밤이라 같이 해줄 수 있는 시간이 지금밖에 없고, 이왕이면 같이 만들어 주…….”
“에, 센, 양.”
급기야 히엘은 웃음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 네?”
“이제 곧 황후가 될 사람이 왜 이리 현실감이 없지? 이렇게 바느질이나 유유자적 즐길 때야? 일찍 자고 내일부터 미로 같은 황궁 길도 좀 파악하고, 시종들 선택도 하고, 피부 관리에, 국혼 행사 절차에 관한 것 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바느질? 그리고 핀. 듣자하니 너도 내일 세드릭 학교 축제에 가야한다면서? 이렇게 쿠션이나 만들 시간이 있냐?”
히엘이 간만에 정색을 하고 두 바느질 쟁이 들에게 쓴 소리를 할 때였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마법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대야 말로 왜 이리 현실감이 없는가? 그대가 아랫것들에게 마담 텔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를 새벽까지 황궁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얼른 자고 내일 해가 밝자마자 공물을 들고 나에게 와야 하지 않는가?]
드래곤이었다. 마법어를 알아들은 핀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리가 마법어를 못 알아들으니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한 것이었다. 히엘은 모두의 눈치를 살피며 드래곤과 대화를 위해 다락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알았다. 충격적인 사실을.
[보아하니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는 그 딸 로가드리아의 패악질로 한 줌의 재가 된 것 같더군.]
[……!]
히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젤레테스 영애가 그 천 쪼가리를 불 태워버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