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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는 이번에도 크게 외쳤다.
“아!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시종들이 아예 소리를 내어 웃었다. 태후는 히엘과 하리의 얼굴을 한참동안 번갈아 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태후 딴에는 웃는 표정이었지만, 보는 이들 모두에게는 엄한 표정으로만 비춰질 뿐이었다.
“그대,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태후는 이미 하리 에센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아들 히엘을 통해, 그리고 히엘 몰래 자신이 보낸 사람들로부터 조사하여 들었던 터라 물어볼 것이 없었다. 아이얄 수공예 업계에서 예술가로 이름을 날리던 에센 부인의 하나뿐인 여식으로 25년간 내내 지루하게 살아온 순진한 아가씨. 황태자만 잘 낳아준다면 굳이 황후로서 아니 될 이유는 없었다. 대륙이 통일된 상황에 단일 권력인 황제의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은 여느 고관의 여식들 보다 차라리 하리가 더 나은 것인지도 몰랐다. 태후는 중요한 사항만 간단하게 일러두기로 하고 하리와 눈을 맞췄다.
“에센 양.”
“예, 태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후궁들을 ‘다발’로 들이려 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가?”
하리는 얼떨떨한 나머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 말았다.
‘이, 이 질문은 농담인가?’
질문을 마친 태후는 흥미로운 얼굴로 하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도 자신의 아들이 제국 수도에서 어떤 별명, 어떤 개성으로 존재감을 떨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랫도리가 가벼운 사내의 난잡한 버릇이 한 여인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잠재워질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잠들 거란 확신은 누구도 할 수 없으리라. 만약 히엘이 본래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태후의 말 그대로 후궁들을 ‘다발’로 들인다면 이 순진한 평민 아가씨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태후는 하리의 결심을 듣고 싶었다.
“그런 놀란 표정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보도록.”
하리는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드래곤의 맹약을 말하려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제게 일편단심 하신다는 증거로 드래곤께 맹약을 하셨습니다, 라는 대답이 그녀가 알기로서는 ‘사실’이며, 적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리는 그 대답을 입 밖으로 내기 전에, 문득 생각해보았다.
‘잠깐, 내가 아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고. 내 아들이 한 여자한테 심장을 바치는 맹약을 해버린다면? 자식 키워봐야 아무 짝에도 쓸 모 없잖아! 열 달을 품어 배 아파 낳았는데! 엄마보다 부인이 더 좋은 거야? 흥!’
하리는 이 순간 갑자기 아들 독점욕에 가득 찬 극성 시어머니에 빙의되어 드래곤의 맹약을 대답하려던 처음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태후로부터 긍정적이라 칭찬받은 김에, 초 긍정적 사고를 드러내기로 하고, 나름 전략의 대답을 내놓았다.
“황제 폐하께서 사랑하시기로 한 사람은, 저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히엘, 태후, 시종들, 하리의 순서대로 그 각각의 속마음들이 허공에 말풍선처럼 퐁-떠다녔다.
‘이 아가씨야! 그건 착하게 보이는 게 아니고 속없어 보이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3p, 4p, 5p는 당해낼 재간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광녀, 그런 커밍아웃 하는 거 아니다!’
‘후궁들을 질투하지 않는 척 하면서 물과 화장수 등등에 독극물을 타 그들을 제거할 생각이로군. 이 아이 정도면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 내 며느리가 될 만해.’
‘저 여자 뭐야? 그렇게나 황후가 되고 싶나? 비꼬는 건지 미친 건지 통 종잡을 수 없는 여자네.’
‘내가 무리수를 둔 건가…….’
말풍선은 팡- 하고 소리 없이 터졌고, 태후는 웃으며 말했다.
“에센 양의 포용력 있는 마음으로 그들을 진하게 사랑해주길 바란다.”
그 ‘진하게’라는 말은 독극물에 대한 표현이었다.
“네!”
히엘은 초겨울인데도 이유를 알 수 없이 더워졌다.
***
눈이 올 것만 같은 밤. 하리의 붉은 지붕 집 모든 창문으로 노란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이 짐정리를 하느라 집안 곳곳에 라이트 마법을 켜두었던 것이다.
가공간에서 핀의 시중을 들던 자가 하리의 물건들을 궁으로 가져가려고 정리했다. 핀은 아들 세드릭과 함께 직접 자신의 짐을 정리했고, 그렇게 하리의 집은 핀 부자가 사는 집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세드릭은 열심히 짐정리를 하다가, 갑자기 핀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아버지.”
“응.”
“오늘 하인하나 없이 혼자서 가셨다면서요?”
“응.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학교는 어떠셨나요? 입학은 가능하신 거죠?”
아들이 오늘 하루에 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자, 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글쎄. 입학이야 가능하지. 하지만 사람들에 대한 좋은 인상은 그다지.”
길에서 만난 귀족 아가씨가 다짜고짜 애완견이 되라고 명령했던 것부터가 그랬다. 사람에게 개가 되라니, 제 정신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타고 있는 마차도 보라색에 레이스무늬가 가득한 것이 괴이했다. 그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기도 하고(황궁 연회), 누군가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전장에서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던 젤레테스 대공), 어쨌거나 여러모로 불쾌한 여자였다. 그래서 돌아섰는데 그녀가 등 뒤에다 대고 한 말이 있었으니, ‘당장 개사냥을 해야겠어.’ 라는 기분 나쁜 말이었다.
그 외에도 입학 신청을 하러 갔던 예술 학교에서는 또 어떤 경험이 있었던가.
한 집시 옷차림의 하얀 머리 청년이 입학 신청 도중에 새치기를 해왔다. 청년은 그런 짓을 하면서도 어쭙잖은 말로 자신을 합리화했었다.
‘원래 질서나 법칙 따위는 강하고 빠른 자가 재정비하면 그만이라고요. 억울하면 앞질러보시던가.’
핀은 난생 처음 그런 무례한 자를 보았다. 하지만 꾹 참았다. 괜스레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었기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청년이 핀의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보고선 ‘역시 예술은 부자나 한다’며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데 학력만은 필요했으면 이곳에 오냐’는 비꼬기를 했을 때, 정말이지 불같은 짜증이 솟구쳐 올라 주먹을 꽉 쥐며 참아내야 했다.
핀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려한 외모의 그를 보고 행인 중 하나가 남색가 업소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까지 해왔었다. 그 일은 가뜩이나 코를 낮춘 성형시술을 받았던 핀에게 코를 더 낮춰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크고 작은 그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린 일 또한 하나 있긴 했다. 다만 세드릭에게 말할 수 없을 뿐이었다. 보라색 마차를 본 뒤로 한 무리의 괴한들이 자신의 뒤를 밟은 것이었다. 핀은 그들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흠씬 두들겨 팼다.
시끄러운 하루였지만, 사람들에게 섞여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은 계획 중 하나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리라. 일일이 아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그는 아들의 하루를 물어보기로 했다.
“시험 잘 쳤니?”
“네. 열심히 했어요.”
“잘 했어.”
기특한 듯 웃는 핀을 보고 세드릭도 따라 웃다가 갑자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내일…….”
“응.”
“학교에서 학기 마지막 축제를 해요. 제가 요리점을 하기로 했는데.”
“그런데?”
“…… 아니에요.”
다른 모든 학생들은 축제를 보기 위해 그 가족들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만은 학교 축제에 와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아직까지 보호자로 되어 있는 하리도 백부와의 결혼 준비에 바빠 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시종을 부르자니 그것도 영 어색하다. 그래서 세드릭은 핀이 축제에 가겠다는 대답을 바로 해주길 바랐다. 둔한 핀은 여전히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드릭의 섭섭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핀은 뭔가 알아차렸다. 학교 축제란 것과 아들의 반응을 연관시켜 생각해본다. 한참 후에 그는 세드릭의 어깨를 잡으며 미안한 표정을 했다.
“아, 미안. 무슨 말인지 내가 늦게 알아들었어. 갈게. 학교 축제.”
“네? 아니에요.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게 아니라.”
“…….”
“못 알아들어서 미안하다고. 학교 축제, 갈 거야. 꼭 갈게.”
“억지로 오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가고 싶어. 네가 진짜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보고 싶다. 정말이야.”
핀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었던 거대한 거짓 세계에서의 평민 학교 축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들이 다니는 진짜 학교의, 진짜 축제. 그는 기대에 부풀기 시작했다.
“요리점 한다고 했지? 궁금하다. 어떻게 할지.”
세드릭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학교 축제 시간과 요리점이 펼쳐지는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핀은 기분이 좋았다. 언제 한 번 아들과 이런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던가. 멋쩍고 어색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때 남색 밤하늘에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시종은 서둘러 창문을 닫았고, 세드릭은 날씨를 걱정하며 온열석 몇 개를 꺼내 직접 하리의 다락방에 가져갔다. 누군가를 챙기는 모습이 도무지 여러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귀하게 커왔던 황자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핀은 자신도 이 날씨에 어울리는 일을 하기로 생각했다.
그가 갑자기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자, 시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하시려고요?”
“목이 타서 차나 마시려고요.”
“저한테 시키셔야죠.”
“괜찮습니다.”
하리가 오늘 태후궁에 다녀온다고 했던가. 성격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태후를 만나고 오는 것이니, 분명 긴장을 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이런 추운 날씨에 몸이 더욱 얼어있을 터였다. 핀은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