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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61화 (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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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알현 요청도 없이 황궁에 찾아갈 거라며 하인들에게 준비를 하라고 고래고래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젤레테스 대공이 뛰쳐나와 딸을 말리기 시작했다.

“쉿! 사랑하는 딸아! 말조심 하렴! 대체 그런 결례를 저질러 이 아비의 얼굴에 얼마나 먹칠을 할 셈이냐!”

“이거 놔요! 아버지는 자존심도 상하지 않으세요? 아버지께서는 지난 이십 년간 6,7대 황제들의 오른팔로 충실히 살아오신 분이에요! 알현 약속 따위 하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저를 내치시지 못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나 말리지 마! 갈 거야!”

“아니, 로리! 안 된다, 진정 하려무나! 어쩌자고 그러는 게야! 지금 황제 폐하께서 성격이 좋으시니 망정이지, 전 황제폐하셨다면 우리 가문은 몰살당하고 말 거다! 그러니 제발 그 성질 좀 죽이거라!”

“예전 황제 따위 이미 죽고 없는 걸요! 히에라지엘 그 녀석은 물에 술 섞은 듯, 술에 물 섞은 것 같은 하찮은 녀석,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헤실헤실 웃는 것밖에 없는 얼간이라고요!”

로가드리아는 씩씩거리다가 마담 젤레테스의 방을 향해서도 소리쳤다.

“그리고 어머니, 잘 들으세요! 제가 황후궁에서 두 발 뻗고 드러눕는 날이 올 때까지, 그 얼간이 새끼가 달라고 하는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는 절대로 넘기시면 안 돼요.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녀석이 원하는 대로 안 해줄 거야!”

대공 부부는 황제 모독을 빵에 스프 찍어먹 듯 해대는 딸에게 질겁했다.

그들은 딸의 패악이 잘못된 교육 때문이라며 크게 한탄했다. 젤레테스 대공은 늘 전쟁터에 나가있어서 딸에게 신경을 못 쓴데다가, 그 부인인 마담 젤레테스는 패션에 대한 장인 정신에 현모정신을 팔아먹었으며, 그러다보니 결국 마차에 타고 황궁으로 쳐들어가는 제 딸도 말리지 못했다.

‘어휴! 폐하께서 그냥 미친년이 왔겠거니, 하고 저 애를 무시하시기를 바랄 수밖에!’

***

로리의 마차가 아이얄 중앙 대로를 시원시원하게 달려갔다. 누가 로가드리아가 타고 있는 마차가 아니랄까봐, 그 색깔도 로가드리아 꽃과 같은 보라색이었고, 금박의 레이스무늬 장식으로 가득했다.

중앙 대로를 산책하고 있던 귀족 영애들이 그 마차를 보며 피하기 시작했다.

“어휴! 재수 없는 똥개마차네!”

“오늘은 또 누굴 족치려고 저렇게 광속 운전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들은 로리의 마차를 보고는 웬 미치광이가 마차 디자인을 다 한다며 놀라워했다.

마침 그 근처에서 한 남자가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있었다.

“아이얄 아트스쿨을 찾으시는 거로군요? 저쪽에서 저쪽 모퉁이로 돌아가시면, 전나무에 둘러싸인 건물이 나올 겁니다. 그곳입니다.”

“감사합니다.”

길을 알려준 행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남자의 표정이 햇살 머금은 연잎처럼 상큼하고 부드러웠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렌키스의 달빛 같은 짧은 금발,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마치 조각칼로 그은 듯 날렵한 턱 선이 인상적이었다. 너무나도 수려한 외모라 길가는 모든 아가씨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아가씨들은 이 초겨울의 날씨에, 그 청년에게서 초봄의 싱그러운 기운을 느끼고 환히 미소 지었다.

로가드리아 역시 그 남자를 보았다. 그녀는 어린 아가씨 특유의 깔끔한 변덕을 부리며 마부에게 말했다.

“멈춰.”

마부가 서서히 마차를 세우며 물었다.

“황궁은요?”

“궁에는, 가지 않겠어.”

로리의 마차가 결국 완전히 멈췄다. 그녀는 지나가던 그 미청년에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이름 뭐야?”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로리를 보았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 라이트릭 에센입니다만.”

라이트릭 에센, 그는 전 황제 핀라이트였다. 눈가에 나 있던 상처는 시술을 받아 지웠고, 성검에 의해 심장이 강탈당하여 한기를 흘리던 온 몸은 온열마법을 받아 일반사람과 같이 되었으며, 새파랗던 안색도 멜라닌변색시술을 받아 보통의 혈색을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콧대도 살짝 깎았고, 덕분에 과거의 날카로운 인상이 아닌 유순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라이트릭 에센이라는 이름은 핀라이트라는 본인의 실명과 세드릭이라는 아들의 가명을 적절히 섞어 하리의 성을 붙인, 한마디로 이름 짓기 귀찮은 그의 작명센스가 깃든 가명이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 미술학도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지금 아이얄 아트 스쿨을 열심히 찾아가던 중이었고, 그에게 첫눈에 반한 십대 소녀 로리는 씩 웃으며 명령했다.

“너 앞으로 내 애완견 해.”

대귀족가의 건방진 영애답게 그녀는 안하무인의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삼십 분전에 황제 히에라지엘을 찾아가겠다는 결심도 잊고 있었다.

“나 로가드리아의 한 마리 충견이 되란 말이란다. 알겠니?”

핀은 로리를 무표정하게 보았다. 평민으로 변장하고 처음으로 혼자서 거리에 나서자마자, 미친 여자를 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적절한 것이 떠올라 대꾸해주었다.

“사람에게 개가 되라니, 제 정신입니까?”

***

황제의 종들이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를 구하느라 바쁠 때, 정작 히엘은 마계에 있는 자신의 비밀 실험실에서 어떤 기계를 만드느라 매우 바빴다. 그것은 그가 마활 수련생 시절 만들다가 만 마력 증폭기로, 무려 11번에 걸쳐 실패를 거듭한 나머지 한때 제작을 포기했었던 문제의 기계였다.

히엘은 하리의 팔에 묶인 채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하늘색 팔찌를 떠올리며 초조해했다.

‘이게 성공해야 그 지긋지긋한 팔찌를 푸는데 말이지.’

어떻게 해서든 이 마력 증폭기를 제대로 완성시켜 팔찌를 풀어야했다. 그래야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며칠 간 만사 제쳐두고 그 작업에만 몰두하던 그는, 갑자기 뭔가 떠올라 서둘러 궁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태후와 하리가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었다.

“우리 광녀 지금쯤 꽃단장 하고 기다리고 있을까나! 안 하는 게 더 예쁘지만, 후후훗!”

그는 몸은 피곤해도 그 표정만은 팔푼이처럼 웃음에 젖어 있었다.

그를 검은 산에서 마법 영상구를 통하여 지켜보는 자가 있었으니, 그 자는 바로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은 자신의 둥지에서 원래의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놓고 커다란 이를 바득바득 갈며 히엘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뿐이었다.

[‘직접’ 뼈아픈 반성을 하라고 했더니, 감히 제 아랫것들에게 시켜서 그 드레스를 구해오려고? 남의 집 앞마당에서 청혼을 하는 것도 내 참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난 분명 열흘을 주었다. 그 안에 드레스를 ‘직접’ 가지고 오지 않으면, 네 너에게 반드시 벌을 줄 것이다. 반드시…… 크흐흐흐.]

***

하리는 태후궁을 보고 몸을 움츠렸다. 태후궁은 거의 대부분이 검푸른 색조로, 색깔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켰다. 더군다나 건물의 외관은 곡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형태에다가, 그 앞뜰에는 어떤 식물도 없이 추상적인 금속 조각만 몇 개 덩그러니 있어 상당히 피폐하고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러한 태후궁은, 주인인 태후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만약 누군가가 태후에게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녀는 아마 ‘황후가 된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젊은 시절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만 황위에 올리고자 독한 야욕을 품고서 무려 3명의 경쟁 관계에 있던 비들을 돌연사, 사고사, 자살로 위장시켜 죽였다. 그리고 마치 그 죗값을 치르듯 남편을 일찍 잃었으며, 손주들도 줄줄이 살해당했고, 며느리 리이라마저 자살, 지금은 전대 황제였던 둘째 아들마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후의 삶이 불행했고 후회스러웠으며, 하루하루 피폐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황궁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라, 후회하는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은 젊은 시절의 날선 기운을 버리지 못했다.

“황제 폐하십니다.”

“들라하시게.”

태후는 저 멀리서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붉은 머리 아가씨와, 아들 히엘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또 한 명의 가시 돋칠 꽃이 저기 오는군.’

황후가 될 여인을 ‘가시 돋칠 꽃’으로 여기는 태도, 그 눈빛에 반가움이라고는 없었다. 그런 태후를 바라보는 히엘의 표정이 여느 때와 달리 굳어 있었다. 그 역시 태후를 만나는 것이 편치는 않았다.

‘거, 참. 늘 표정이 불퉁하시다니까.’

무표정을 해도 침울하고 화난 얼굴로 보이는 태후의 얼굴은 핀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리는 태후에게서 느껴지는 사늘한 기운이 지난 시절 핀의 분위기와 닮았다고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이 가시질 않아. 실수하지 않을까.’

지금 그녀는 황궁의 시종들로부터 단장을 받아 붉은 단발머리를 깔끔하게 올렸고, 연 살굿빛 드레스를 입었으며, 드레스에 어울리는 화사한 화장에, 난생 처음 호화로운 장신구들도 두르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익숙지 않아 엉거주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태후는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 여인치고 지나치게 단출한 꾸밈에 과연 평민의 여식답다는 인상을 받았다.

히엘이 하리를 태후에게 딱딱한 말투로 소개했다.

“말씀드렸던 하리 J 에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후폐하께 인사드립니다.”

하리는 궁의 예법에 따라 드레스의 깃을 살짝 들어 올리고 태후에게 인사를 했다. 태후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형식적인 환영의 말이 하리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반갑군.”

“저, 저도 만나 뵙게 되어 매우 영광입니다.”

“앉지.”

엔젤리카 깃털쿠션에 최고급 패브릭으로 마감된 자리에 앉아도, 마치 바늘방석에 앉는 기분. 하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태후가 간결한 질문을 던졌다.

“이곳 생활, 자신 있는가.”

“자신 있습니다!”

그녀가 너무 크게 소리를 낸 나머지, 지켜보고 있던 히엘이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시종들도 웃음을 참아내느라 표정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태후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대…… 긍정적인 아가씨군.”

“감사합니다!”

또 한 번 크게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제는 시종들마저도 굳이 숨기지 않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뭘 잘못했나?’

히엘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농담을 던졌다.

“에센 제군, 여기는 군대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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