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회 -->
하리가 그때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히엘은 '마력어로 하리 에센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거'라는 대답을 했었다. 결국 맹약은 대충 둘러댄 말, 자신의 청혼을 그만큼 간절하게 표현하기 위해 나왔던 거짓이었던 것이다. 깊은 키스를 나누고 청혼까지 성공한 상황에 굳이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 좋은 것이 좋은 것. 맹약이 가짜긴 해도 하리에게만 일편단심하며 살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맹약에 대해 의심하는 핀은 다 된 스프에 재를 뿌려도 제대로 뿌리려하는 낌새였다. 적어도 히엘이 보기엔 그러했다. 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설마 맹약에 관한 사실을, 하리에게 제대로 가르쳐 줘버린 거야?”
“그러기 전에 온 거다.”
“네가 무슨 권리로? 별 생각 없다더니, 이제와 다시 그 다른 의미의 ‘퀼트’하던 사이라고 우기기라도 할 셈…….”
“닥쳐! 닥치고 그 거짓 맹약이 안 지켜질 시에는 나한테 죽을 줄 알아!”
갑작스러운 외침에 히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 그 거짓 맹약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이 나선다는 건가. 그것은, 결국 하리에 대한 죄책감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히엘은 미묘한 웃음을 웃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한테? 내가? ‘이’ 내가 너한테 죽어야 한다고?”
“……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여자한테 또 상처를 주지 말란 말이다. 그건…… 나로도 이미 충분하니까.”
“너…….”
하리가 핀의 피해자였다면, 핀은 성검과 선황의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 바느질 선생으로 납치 되어 시체와 함께 보름이 넘도록 방치되어 미친 것과, 살인 기계로 키워져 대륙 통일의 목적으로 이용된 것이 비견할 바 되지 않지만, 같은 ‘피해자’의 입장으로서 핀은 이제 하리의 고통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기로 했다. 그녀를 불행하게 할 온갖 단점이 많은 형이 안심되지 않았다. 적어도 형에게 맹약에 대한 진실을 캐묻고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녀에게 상처주지 않기를 확실히 약속 받고 싶었다.
물론, 자신 역시 하리에 대한 설렘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바느질에 대해 설명하던 때에는 귀여워 보였고, 그녀에게 가슴이 두근거린 적도 있었다. 살카전에 나가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랑은 ‘퀼트’하면 안 된다는 유치한 말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은 그녀에 대한 설렘을 지속시킬 만한 상황이나 여유가 갖춰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칼처럼 모든 관계를 자르고 정리하려 했던 마음속에는, 늘 그녀와 깊은 관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이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두근거리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해 뛰쳐나온 적도 있었고, 히엘에게 죄다 맡겨버리고 찾지 않았던 적도 있지 않던가.
핀은 이제야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하리에 대한 애매한 감정의 실체를.
그것은 죄책감에서 오는 거라는 것을.
핀은 다시 한 번 경고했다.
“단지 만만해서 황후에 앉히려는 거면 가만두지 않을 거란 말이야.”
히엘은 별 꼴을 다 보겠다는 듯 불퉁한 표정을 했다. 사실 그동안 못난 남자로서 여인들에게 저질러 온 가벼운 행적들이 있었기에, 핀의 질타가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핀이 하리를 괴롭히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이해였다.
“당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난 참 이해가 안 간다. 네가 무슨 권리로 경고를 해, 이 내게?”
“권리가 아냐.”
“그럼 죄책감인가?”
굳이 대답은 없었다. 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지루하다는 듯 그곳을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다음부터 이런 일로 나 오라, 가라 하지 말기다. 건방진 녀석.”
“…….”
문이 열렸고, 히엘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참아왔던 말을 했다.
“아무리 귀엽다, 귀엽다 해주었지만 이제 그런 식으로 내게 화내듯 말하는 건 그만둬. 예전에는 네게 납치당한 여자일 뿐이었다면, 이젠 내 후가 될 사람이야. 드래곤에게 맹약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해서라도 확인시켜주고 싶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못 믿겠으면, 앞으로 두고 봐. 질투 나도록 잘 살아 보일 테니까.”
핀은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희미한 느낌이었다.
그곳을 나간 히엘이 향한 곳은 니이새 둥지였다. 그곳을 통해 하리의 집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하여간 저 녀석 거기 제멋대로 못 가게 이동을 차단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이참에 그냥 확 애부터 만들어버려?'
***
***
히엘의 탄탄한 가슴팍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따라 시선이 내려간 곳에는 낯선 금발여인이 교태를 부리며 야릇한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 뇌쇄적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하리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히엘의 목에 팔을 두르며 외쳤다.
“아아, 히엘. 이 회전침대 너무 좋아. 천장도 돌고, 나도 돌 것 같아.”
“후후, 나는 세라 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
“훗, 거기, 앗, 앗, 꺄아!”
하리는 이곳이 어딘가 하고 주변을 보았다. 천장에 눈이 갔다. 고급스럽던 천장이 순식간에 낡은 천장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히엘의 아래에 있던 여자도 금발여인에서 다른 여인으로 바뀌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바로 하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리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에 구토가 치밀어오를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황후인 자신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다른 여인과 버젓이 정사를 나누었던 히엘이 미웠다. 그래서 히엘의 목을 죽일 듯 세게 조르기 시작했다.
“당신! 당신 때문에 내가 돌아!”
“하아, 헉, 어째서! 세라는 어디가고 황후가 이곳에 있는 게요!”
“몰라요! 당신은 이제 이혼이야! 툭하면 바람이야, 지긋지긋해!”
“그래? 그럼 이혼하지, 뭐. 내게는…….”
히엘은 갑자기 씩 웃었고 다시 그의 탄탄한 몸 뒤로 금발 미녀 세라가 다가왔다. 세라가 말했다.
“우리 자기에겐 내가 있으니까.”
하리는 까무러칠 뻔했다.
***
하리는 세드릭에게 줄 이불에 엔젤리카 깃털을 넣고 누빔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를 깨운 것은 손가락을 찌른 바늘이었다.
“아얏! 으, 피다.”
동그란 루비처럼 핏방울이 나왔다. 그 손가락이 누군가의 입술에 단번에 삼켜졌다. 히엘의 입술이었다. 그는 침의차림으로 이곳에 와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하리는 재빨리 손가락을 뺐다.
“폐하, 어떻게 이 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이곳에 오실 수 있습니까!"
히엘은 하리의 손가락을 붉은 입술로 슥 핥으며 웃었다. 은근 야릇한 행동에, 하리는 그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이 시간에는 그 어딜 가든 내 마음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을 붉혀? 귀엽게, 정말.”
낯간지러운 말을 예사로 뱉는 히엘 때문에 하리의 얼굴은 이제 열이 올라 터질 지경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폐하, 언제부터 이곳에 계셨습니까?”
“아까부터 계속. 여기 앉아서 하리가 언제 깨나 하고 보았지.”
그녀의 얼굴을 보는데 흠뻑 빠져가 바늘이 그녀의 손가락을 찌르는 것도 몰랐었다.
“그런데 무슨 꿈을 꾼다고 자면서도 그렇게 울상을 지었어?”
“그게…….”
하리는 방금 꾼 꿈을 떠올리며 히엘을 원망어린 눈으로 보았다. 히엘이 다른 여자와 야한 짓을 하고, 황후가 된 자신을 배신하는 꿈이라니. 이 모든 게 예전에 본 마법 영상구 속 히엘의 정사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폐하께서는 왜 그런 걸 찍고 그러셨담!’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 하지만 앞으로 히엘의 반려가 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 그녀의 기분을 알 리 없는 히엘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한참을 째려보던 하리가 꿈 속 여인의 이름을 슬쩍 꺼냈다.
“…… 세라요! 저기, 요즘 세라는……?”
“응?”
“세라, 세라라는 여인은 요즘 뭐하고 사나요?”
“응? 걔가 누구야?”
히엘은 한때 어울렸던 여인, 마법 영상구에 담아두기까지 했던 그 미인의 이름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리가 바늘을 반짇고리에 도로 넣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왜 오셨어요?”
“혼자 자기 무서워서 우리 광녀랑 같이 자러 왔지.”
히엘은 하리의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한쪽 팔로 이불을 젖히고 이리로 오라고 하는 모습이 벌써 부부나 된 듯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하리의 눈에는 그저 탕아의 본 모습이 슬슬 드러나는 것 같을 뿐이었다. 야릇한 겁을 먹은 하리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히엘을 협박했다.
"세드릭을 부를 거예요!"
“어머, 나를 무슨 괴한 취급하듯 해? 자기, 너무하는 거 아냐?”
여인의 말투를 흉내 내며 너스레를 떠는 히엘이었다.
“너무하긴요! 지금은 폐하, 괴한 맞거든요!”
“꺄아, 나 괴한이래. 어쩜……, 그럼 괴한하지, 뭐. 킥!”
능청스러운 대꾸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하리였다. 갑작스럽게 고백도 아닌 청혼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일을 얼떨결에 수락한 것도 머리가 복잡한데, 이 남자는 마차를 몰고 십 분 만에 달에 도착할 것처럼 무섭게 돌진해왔다.
‘왜 이러실까! 적응을 할 수 없어!’
한때는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따분할 정도로 별 일 없이 살았었다. 에센 부인은 홀어머니 슬하로 크는 자식이 엇나갈까 염려하여 성인이 되어서도 통금 시간까지 두었었다. 하리의 친구라면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커왔던 그녀는 히엘의 너구리같은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몰랐다.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제 몸에 털끝하나 건드리시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응? 이게 왜 안 열리지?”
촌스러울 정도로 방어적인 행동이 히엘의 웃음을 자아내었다. 이미 다락방 안은 그가 소리 없이 걸어둔 마법으로 문과 창문이 모두 잠겨있었으며 심지어 소음 차단막까지 쳐진 상태였다. 엉큼하기 짝이 없는 그가 저지른 사태를 알 리 없는 하리는 계속 문의 손잡이를 돌렸고, 그러다가 갑자기 뒤에서 안아오는 히엘의 행동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히윽! 폐, 폐하! 이러시면!”
“안 열어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