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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목욕을 마친 하리가 2층 방으로 다시 올라왔다. 핀은 책상에 앉아 수예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런 그가 불편한 하리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짐을 싸서 나오게 되었는지, 궁에는 보고를 하고 나온 건지, 아까 그가 말한 아들과 같이 살겠다는 것은 무슨 의도에서 나온 말인지, 그 외에도 궁금한 게 한 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핀은 책을 덮고선 중얼거렸다.
“이 책 재미있군. 이렇게 만드는 거였다니.”
핀은 책 표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봐, 핀. 무슨 생각이야?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늘?"
“아까 들은 그대로야.”
“세드릭이랑 함께 산다고?”
“응. 그래서 말인데…… 며칠 이 집에서 신세 좀 져야할 것 같다. 마땅한 장소가 구해지는 대로. 이제부터 궁을 떠나 살 생각이거든.”
“그렇구나. 근데,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 살아.”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핀은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싫다고,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대답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곳에서 아예 살아라, 라고 한다?
하리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호흡을 가다듬다가, 들뜬 목소리로 고백했다.
“난 이 집에서 앞으로 살지 않을 거거든. 곧 황후가 될 거라서.”
핀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나면 별의별 의심이 다 드는 법이었다. 평소에 히엘이 하리를 광녀라 부른 걸로 봐서는, 종종 광증이 도져서 저런 과대망상 발언을 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핀은 묵직한 죄책감을 느꼈다.
"네가 여러모로 고생이 많구나. 의사에게 가 봐, 에센."
“의사에게는 왜? 나 오늘, 폐하게 청혼을 받았어.”
“씻다가 욕실에서 머리를 찧기라도 한 거야?”
“진짠데! 이거 봐."
하리가 블랙 유니콘 문장이 있는 반지를 내밀자, 그제야 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예서적을 다시 펼쳤다.
“아. 청혼."
청호온? 다시 책을 덮는 핀이었다. 하리는 꿈에 젖은 듯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집은 곧 세드릭 혼자만 살게 될 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너는 여기서 그냥 살아. 그래도 돼.”
“이봐, 하리.”
“응?”
“너 그 말을 진짜 믿는 거야?”
“응. 나도 믿겨지지 않았는데, 그래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럼 거절해.”
반지까지 받은 하리에게, 핀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부추기고 있었다. 하리는 서랍장을 열어 목걸이 줄을 꺼내고 그것에다가 반지를 꿰어 자신의 목에 두른 다음, 쑥스러운 듯 말했다.
“결국엔 거절을 할 수 없었지 뭐야. 글쎄 폐하께서 나에게만 일편단심 하신다는 증거로 드래곤께 심장을 바치시겠다는 맹약을 하신 거야. 이를 어째…… 고작 나 따위에게."
'고작 나 따위'라고는 하지만 자랑이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핀은 이제 헛웃음이 나왔다.
"하, 참."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핀은 정말이지 하리에게 솔직하게 말해버리고 싶었다. 이봐,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말 말란 말이야. 드래곤이 일개 인간들 짝짓기 맹약이나 해주는 한가한 생물인 줄 알아? 그 거대한 드래곤은, 어마어마한 보석 공물을 먹이 삼아 살아가는 그 드래곤이라는 작자는, 자기 이익이 아니면 털끝만큼의 마력도 사용하지 않는 존재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딴 맹약의 주관자가 되겠어? 보나마자 형이 너와 가볍게 즐기려고 거짓말을 한 거 같은데, 그리고 네가 받은 그 반지도 모조품일 거고……,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한 말을 들으면 이 여자는 상처를 받을 것이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하리를 가엾게 보며 혀를 차는 것뿐이었다.
"쯧."
동시에 뇌리에 히엘의 뺀질거리는 얼굴이 스쳤다. 그렇게 수 십 초 쯤 흐르자 갑자기, 핀은 얼굴에서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았다.
'뭐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수일 전, 형은 능글거리며 하리에게 자기 아이를 낳아달라는 ‘농담’을 했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술을 마시다가 정말 에센 양에게 별 생각 없었냐고 자신에게 묻기까지 했다. 거기다 그 형이, 오늘 하리에게 청혼을 했다.
‘청혼, 청혼…….’
핀은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진심일 리가!'
짐을 두고 가공간으로 가버린 핀을 보며 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창문을 여니, 커다란 달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밤공기도 맑고 하리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황후라니. 엄마, 정말 믿기지가 않아요.’
그녀는 한참 꿈속을 걷는 듯 몽상에 빠져 있다가 바람이 거세지자 창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엔젤리카 깃털이 잔뜩 들어있는 자루를 보았다.
‘세드릭의 이불을 만들어볼까!’
긴긴밤, 바느질이 시작되었다.
***
히엘은 춤을 추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성검에 의해 강제로 황제에 앉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황성 정원의 수많은 전리품만 보아도 짜증이 치밀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짜증은커녕 콧노래만 나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정원 청소 상태가 다른 날 보다 더 나은데? 상이라도 줘야겠어.'
그는 청소를 담당하는 시종에게 간단한 포상을 주라고 전한 뒤 샤워를 했다.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었다. 하리는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태후는 얼른 그녀와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아들이 후계는커녕 후(后)의 자리도 비워두었기에, 태후에게 황후 간택전을 열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히엘이 해야 할 일은 드래곤이 원하는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를 구하는 것, 그리고 마활들을 데려와서 제국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정리하는 것, 그리고 약혼식을 건너 뛴 뒤 국혼을 치른 뒤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었다.
'뭐든지 생각대로만 되어준다면야 바랄 게 없는데 말이지.'
히죽거린 그는 몸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마자 시종으로부터 전언을 들었다. 가공간에 있는 핀이 급히 부른다는 것이다. 히엘은 샤워가운을 입은 그대로 그곳으로 마법 이동을 했다.
"하하, 무슨 일로 우리 귀여운 동생이 날 부르는 걸까!"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가공간에 도착하자, 핀이 이죽거렸다.
"편한 방법(정화마법) 놔두고 어쩐 일로 직접 목욕을 다 해?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보군."
"풉, 이봐. 그런 마법은 네가 날 마활 때처럼 바쁘게 굴려서 피곤하던 때나 하는 짓이라고. 나는 물이 날 씻어 내리는 그 기분이 좋단 말이야. 그 시간에는 아무도 방해를 하지 않기도 하고. 그런데 왜 불렀냐?"
핀의 표정은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괜스레 능청스러운 농담을 해보는 히엘이었다.
"네 표정 지금 엄청 응가 마려운 거 같다고. 알아?"
"앉기나 해."
히엘은 여전히 명령조인 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삐죽거렸다. 시종의 전언으로 오늘 핀이 짐을 싸들고 가공간을 멋대로 나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가 하리의 집에도 들렀다는 것 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어쩌면 하리로부터 청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지 몰랐다. 그러지 않고선 이렇게 뜬금없이 제 형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히엘은 자리에 앉으며 떠보듯 말했다.
"우리 동생께서는 늘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셔서 날 그런 표정으로 보실까."
"진심으로 하리에게 청혼하는 건가."
두서없이 나온 물음에, 히엘은 조금 불쾌해졌다. 하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있었다.
"후후, 우리 귀염둥이. 그렇게 목소리 깔지 말래? 형 무섭거든. 근데 뭐? 진심으로? 세상에 거짓으로 하는 청혼도 있어? 청혼이면 청혼이지 다들 진짜 의심이 왜 이렇게 많은지."
시종에게 손짓하자 테이블에 물 한 컵이 차려졌다. 히엘은 그것을 한꺼번에 다 마신 뒤 피곤한 듯 목을 주물렀다. 입을 꾹 닫고 있던 핀이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 여자가 황후라는 자리를 버텨낼 수 있을 거라 봐?"
‘고양이 쥐 생각 한다’가 이런 때에 적절한 말이리라. 히엘은 적당한 말이 생각나 빈정거려주었다.
“글쎄? 폐쇄공간에서 시체랑 뒹구는 생활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데.”
갑자기 쾅, 하고 테이블이 거칠게 내리쳐졌다. 핀의 약점이 제대로 찔린 탓이리라. 히엘은 엽궐련을 하나 꺼내 물며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감히 내 앞에서 대체 뭐하는 짓이야?”
핀은 주먹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허무하고도, 서글픈 기분이 되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랬으니까,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더욱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거다!"
“그건 무슨 논리?”
핀은 히엘을 노려보았다. 논리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애당초 바람둥이로 유명한 형이었다. 수련생 시절부터 여자를 포함한 모든 타인들과의 관계를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일개 평민을 황후로 들이려하는 것을 도무지 순수하게 봐줄 수 없었다. 또 다시 하리가 상처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핀은 히엘에게 거침없이 내질렀다.
“정말 몰라서 물어? 무슨 짓을 해도 적당히 다 눈감아줄 여자가 필요하게지. 후계자 역시 필요하겠지. 후계를 보고 나면, 후궁들이 우르르 생겨날 테고. 그럼 이곳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그 여잔 또 다시 돌이킬 수 없…….”
“너, 뭔가 오해하는 거 아냐?”
이제 히엘도 웃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눈빛은 동생을 향한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핀은 더욱 매섭게 쏘아붙였다.
“오해? 설마 나한테도 그녀를 위해 드래곤에게 맹약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거짓을 말할 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 지적당하자 히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젠장, 하리가 맹약에 관한 것도 말해버렸군!’
사실, 그가 하리 에센이라는 여자에게 일편단심하기 위해 심장을 맹약의 제물로 바쳤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하리와 히엘이 검은 산으로 다시 오던 때였다. 청혼에 대한 의심을 산 히엘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엽궐련을 태우고 있었다.
하리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히엘의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엽궐련을 다 태운 히엘이 허공에다 대고 하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어를 외치기 시작했다.
[젠장! 드래곤이시여! 일과 청혼 동시에 해먹기가 왜 이리 힘듭니까!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 그냥 다음에 찾아드리면 안됩니까? 저 열흘간 공들여 연애부터 좀 하면 안 되느냐는 말입니다!]
[안 된다. 시즌이 넘어가기 전에 얻어야 한다.]
[일단 저 결혼부터 좀 하잔 말입니다! 결혼을 해야 즐기던지 춤을 추던지 그 잘난 드레스를 줍든지 할 것 아닙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