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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56화 (5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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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마계 몬스터들이 북동쪽 지구 제 6보호의 탑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보호마력을 해체하고 흡수한 뒤, 주변의 동식물을 파괴하는 등 잔인한 짓을 일삼고 있다고 합니다. 내일 조회에서는 이 사태를 집중적으로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마활들이 귀환하는 열흘 후에 상의하겠소. 그런데 어차피 그 근방에 사람은 살지 않도록 해두지 않았소?"

“예. 그렇긴 하나…… 그리고 폐하, 젤레테스 대공의 오찬 일정은 어찌…….”

“그 건에 관해서도 듣지 않겠소."

“하오나 황후 간택 일정을 서두르셔야 하지 않습니까.”

“레실, 레실 경! 잔소리 좀 그만하시오. 황후 후보의 '황'자도 말하지 말아줄래? 금지다, 금지야. 알겠어?”

“켁켁! 이거 좀 놓고 말씀하십시오!”

히엘은 근엄한 말투로 말하다 어느 순간 황제의 위엄을 버리고 레실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가 마활의 탑 시절부터 보좌를 해왔던 레실은 이런 장난스러운 멱살 잡기를 한 두 번 당해보는 것이 아니었으나,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했다.

‘스크롤 제조만 하면 되는 마활 업무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성가신 게 많으시겠지. 압박을 받으면 도망가려 하시는 성격은 여전하셔.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들인데. 후우.’

멱살을 잡는 히엘의 표정엔 웃음기가 가득했고, 그것은 더 이상 독촉을 한다면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말거란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레실은 조용히 물러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이상한 생각에 황제에게 정중히 물어보았다.

“헌데, 황후 후보 이야기를 금지라 하시면 지금 생각해두신 분이 계신건지요?”

히엘은 귀를 파며 대충 대답했다.

“어, 마누라 감 구해왔으니, 내가 알아서 할게.”

남은 건 태후의 허락뿐이었다. 히엘은 곧바로 태후의 처소로 향했다.

***

짐을 꾸린 핀이 도착한 곳은 하리의 집 2층이었다. 목적지가 그 어느 곳이든, 그가 가공간을 빠져나와 도착할 수 있는 일차적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짐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계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주방의 광경에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아들 세드릭과 한 소녀가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

“루비, 그건 그렇게 다듬는 게 아니고 이렇게 다듬는 거…… 어……?”

놀란 것은 세드릭도 마찬가지였다. 하리가 저녁 식사를 하고 들어온다고 했기에 소년은 그 때를 이용하여 여자 친구와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볼 줄은 몰랐다. 소년은 불쾌감과 의문이 가득 찬 눈으로 핀을 보았다. 루비가 세드릭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이듯 질문했다.

"저 분은 누구셔?"

루비의 말이 다 들렸던 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녀가 전 황제의 얼굴을 모르는 듯했다. 세드릭은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어, 그러니까, 그게, 우, 우리 형이야."

외모 상 나이 차이가 열 살도 채 나지 않았으니 그만큼 적당한 말도 없었다. 핀은 곧바로 뒤돌아서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방해했구나, 식사하렴.”

하지만 세드릭의 질문에 다시 걸음이 멈춰졌다.

"당신은 왜 거기서 나오는 거죠?"

왜 여기서 나오느냐? 가공간을 빠져나오려면 마력이 약한 자신이 일차적으로 도착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 2층밖에 없으니, 그곳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핀은 있는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이곳을 반드시 들렸다 가야 했으니까.”

대답을 들은 세드릭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핀의 말이 어떤 오해를 일으킨 것이다.

‘반드시 들렸다 가야하는 곳이라고? 하리 누나와 아버지는 무슨 관계인 거야!’

하지만 핀이 대답을 마친 후 곧바로 2층 방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세드릭은 더 물어볼 수 없었다.

“저기, 세드릭.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루비가 손질한 채소를 들고 묻자, 세드릭은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음식이 다 만들어지자 세드릭은 그것을 핀에게 조금 나누어 주었다. 퉁명스러운 얼굴로 식사를 전해주는 아들에게, 핀은 고맙단 말을 하며 웃어주었다. 그것으로 부자 관계에 드리워져 있던 벽이 아주 조금이나마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맛있군. 이런 요리도 하다니, 커서 요리사라도 될 모양인가.’

궁정 음식과 다른 소박한 음식을 맛깔스럽게 잘 만들어낸 솜씨에 핀은 흡족해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 그릇은 그냥 2층 방 밖에다 두었다. 아들 커플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해가 지고 하리가 귀가했다. 그녀는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다가 문밖에 놓인 쟁반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방 안에서 잠들어 있던 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핀, 이 짐들은 다 뭐야?”

문이 열린 소리를 듣고 핀이 깨어나서 대답했다.

“아. 왔군. 이 짐들은 궁에서 가지고 온 거다. 아직도 집에 누가 있어?”

“누가 있느냐고? 누구를 말하는 거야?”

하리는 세드릭의 여자 친구가 왔다갔다는 것도 몰랐다.

“아니, 아무것도. 난 잠시 그 아이랑 이야기를 좀.”

“아, 잠깐 핀.”

“뭐지?”

“아니, 이야기 하고 와.”

루비가 돌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세드릭과 마주앉았다. 그는 하리의 방 안에서 고민했던 것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같이 살자. 적어도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함께 있고 싶구나."

갑작스러운 말은 세드릭을 당황케 했다. 때마침 하리가 내려왔고, 계단을 걸을 때부터 대화를 대충 듣고 있던 그녀는 세드릭에게 지난번처럼 화내지 않기다’라고 입모양으로만 속삭이며 주의를 주었다. 그녀가 씻으려고 욕실로 들어가자, 머뭇거리고 있던 세드릭은 핀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무슨 의도로 하시는 말씀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에센과 사는 것, 편하지 않다는 거 알아.”

“이제 편해지려고 해요. 아니, 그것보다, 하리 누나와 무슨 관계죠?”

세드릭은 같이 살자고 하는 핀의 말에 대한 대답보다 사실은 그런 질문을 더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리 에센이라는 여자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관계인지, 혹시 연인 관계는 아닌지, 소년은 명확히 알고 싶었다.

핀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하리와 자신의 관계라. 바느질 선생과 제자, 감금당한 사람과 감금시킨 사람, 그 어느 대답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라는 대답을 하기도 우스웠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역시나 상대가 대답하기 곤란해 할 질문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좋았다.

“그러는 넌 아까 그 아이랑 무슨 관계인데?…… 참 예쁘게 생겼더구나.”

세드릭은 얼굴을 붉혔다. 핀이 그 틈을 이용해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했다.

“기회를 줬으면 한다.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겠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적어도,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해."

어린 시절의 일부를 잃어야 했던 마력 성장의 경험, 그리고 세상에서 죽고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현실. 부자는 서로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핀은 그것을 서로 어루만지며 살고 싶었다.

“내게 아버지라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형이든 뭐든 네가 편한 호칭을 쓰면 되니까. 나는 그저, 너와 평범하게 살고 싶다. 평범한 사람처럼.”

세드릭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마력성장을 받았단 사실도, 광산촌 평민학교라는 거대하고도 거짓된 무대에서 살인 훈련을 한 것도, 그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았다. 지금 소년의 귓가에 가장 강하게 파고드는 말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 뿐이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술에 취해 말씀하신 적 있죠. ‘폭군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고요. 그리고 백부께서도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게 넋두리하듯 말씀하시더군요. ‘태어나서부터 성군인 사람은 없다’고. 저는 두 분의 말씀 그 깊은 뜻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단 한 가지 느껴지는 건 있었어요.”

“뭔데.”

“그건 아마도…….”

그건 아마도, 운명을 비켜가지 못하는 존재들이 가진 서글픔이 아닐까. 세드릭은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아 다른 말로 대신 했다.

“두 분 다 짊어진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 아닌가, 하는. 그런데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렇겠지.”

“많이 외로웠어요.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사실, 저도, 당신이, 아버지가, 필요해요.”

핀은 처음으로 아들에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고맙다.”

“저 역시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시 저에게 찾아와 주셔서.”

비로소 핀의 얼굴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진작 왔어야 했어. 너무 늦었다.”

“함께 살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머뭇거리던 세드릭이 갑자기 어떤 조건을 붙였다.

“적어도 하리 누나와 결혼하는 것만은 안 돼요. 아직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뜬금없이 나오는 말에 핀은 당황했다. 아무래도 아들이 자신과 하리와의 사이를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것 같았다.

“티에리아,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내가 에센이랑 왜 결혼을 해야 하지?”

“아닌가요?”

“어째서 그런 관계로 생각하느냔 거다.”

“그야 아까 갑자기 하리 누나의 방에서 내려 오셨으니까요."

“…… 그건 어쩔 수 없었지만.”

“하지만 결혼은 안 돼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연애도 안 돼요.”

“그러니까, 그런 관계도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핀은 작게 중얼거렸다. 결혼? 연애? 그 무엇이든, 하리가 아닌 다른 여자라 해도 당장은 무리일 것이다. 성검 때문에 강제적으로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자신은 아직 그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데 심각한 얼굴을 한 아들은 결혼이며 연애를 하지 말라고 아버지를 감시 아닌 감시를 한다.

‘그런데…… 귀엽군, 자식.’

핀은 아들을 보며 웃었다. 제 어미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연애에 왈가왈부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드릭이 우습기도 했다.

“결혼이건 연애건 아무 것도 나는 관심이 없어. 그런데 말이다. 세드릭."

"예."

"그러는 너는 왜 연애를 하는데?"

세드릭은 점점 얼굴이 새빨개지다가 루비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그……, 저도, 여, 연애가 아닙니다. 그냥 친구, 여자인 친구일 뿐이에요. ‘여자 친구’나 애인은 아니란 말입니다. 아까 그 친구가 내게 과자를 준 적이 있었고, 저는 단지 보답으로 식사 대접을 했던 것뿐이에요. 원래 사람이란 게 받은 것이 있으면 그만큼 돌려주어야…….”

“됐어.”

세드릭은 갑자기 공기가 덥다고 느끼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런 아들을 보는 핀의 눈빛이 따스했다. 문득, 그는 아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어야겠단 의무감이 들었다.

“티에리아, 같은 남자로서 내가 한 가지만 조언하자면 말이다."

세드릭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 내미는 여자들에게 일일이 다 보답해주다가는, 매일 저녁마다 공부 대신 오늘처럼 접대나 해야 할 거야.”

“네?"

“넌 나 닮아……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핀은 자신의 우월한 외모와 육체 유전자를 은밀하게 자찬하며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세드릭은 무슨 말인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결혼도, 연애할 관계도 아니라면서 어째서 다시 하리 누나의 방으로 들어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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