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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55화 (5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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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일까. 그녀가 가공간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 뒤, 짧은 기간 동안 아이얄의 직물 길드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황족, 귀족 가에 납품할 고급 직물, 의상에 대한 이야기로 늘 시끌벅적했고, 그 이야기 중에는 더러 고귀한 신분들의 구설도 섞여 있었다. 그런 것을 듣다보니 하리는 알게 되었었다. 가공간 속에서 자신을 돌봐주었던 남자가 사실은 제국의 ‘밤의’ 공주, 아이얄의 성실탕아, 바람둥이, 여자들의 적, 여자들이 가장 기피해야할 타입이란 것을. 그런 바람기를 가진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은밀한 행위를 하는 모습을 영상구에 찍어두고 소장을 하는 변태 기질까지 있지 않았던가. 그러한 자가 이렇게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여자를 데려와서 대충 내뱉는 청혼에, 쉽게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기란 힘든 것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후계자가 급하시다면 저 말고도 많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튼, 싫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살짝 화가 난 히엘은 여태 써왔던 다정한 말투에 웃음 따위는 모두 지워버리고 원래의 까칠한 태도로 돌변했다.

“싫다고? 왜 싫은데?"

“…….”

“예의고 뭐고 다 버리고 솔직하게 말해봐."

“저는 비록 폐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신분이지만, 결혼이란 것을, 그렇게 순식간에, 진심 없이, 말하는 남자는,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실지라도, 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심 없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어?”

“폐, 폐하……."

그녀의 눈동자는 아까부터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당신은 바람둥이잖아!'

대답 않는 하리가 답답해서 히엘은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 끄덕거렸다.

“물론 내가 급해서 급하게 군 건 인정해. 그런데 뭘 믿고 에센 양은 내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냔 말이야.”

“그야 폐하와 같은 바, 바, 바람, 아니, 난봉꾼이 하는 말은 어느 여자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적나라하게 나온 사실에 히엘은 나지막이 탄식의 한숨을 내뱉었다.

자업자득이라는 건가. 하지만, 진심이 아니면 뭐 하러 바쁜 시간 쪼개서 이 짓을 하는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하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최대한 마력을 끌어올려 어디론가 이동했다.

***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다시 검은 산이었다. 하리는 황제에게 너무 무례한 발언을 한 건 아닌가, 염려했다.

“저 폐하, 그러니까 제 말은 어디까지나……."

말은 멈춰졌다. 다른 사람이 된 듯 쌀쌀해진 히엘의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히엘은 하리와 멀찍이 떨어져서 엽궐련을 하나 꺼내 불을 붙인 뒤, 딱 세 번 깊게 빨아들이고는 소멸시켰다. 그리고 하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어를 허공에 대고 크게, 아주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왜 저러실까. 대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시는 거지? 설마하니, 내 욕이라도 하시는 건가?’

마법어로 외치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하리는 점점 가슴이 조마조마해져갔다. 어떻게 저런 거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 중일까.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 걸까. 이중인격인가? 아니면 '그' 핀의 형이라서, 원래 성격도 핀과 같이 무서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황제에게 솔직하게 말한 자신은 과연 어찌 될까. 그런 망상에 그녀는 온 몸을 벌벌 떨었다.

마법어를 실컷 내지른 히엘은 숨을 고르며 하리에게로 걸어갔다. 후, 하아, 하, 하는 숨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하리는 뒷걸음쳤고, 그러다보니 히엘이 점점 하리를 어느 나무로 몰아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느새 그녀의 등이 나무에 닿았다. 하리는 그 곱던 히엘의 눈이 이렇게 날카로워 보일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용서의 말을 외쳤다.

"용서해주세요! 저, 저, 저는 단지 그 누구에게라도 가벼운 상대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었어요!"

히엘의 손이 번쩍 올라가 그녀의 머리 위 나무표면에 닿았다. 그 기척에 눈을 더욱 질끈 감는 하리였다. 야속한 황제였다. 그간 굳이 표현하지 않았던 진짜 마음이, 낮은 음성으로 차분하게 나왔다.

“가벼운 상대, 라……. 이봐. 보통 가볍게 즐기려 했다면 처음부터 침대로 끌어들였을 거야. 여태까지 너와 이런저런 일 하면서 시간 낭비 할 일 없었을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폐, 폐하…….”

“그깟 섹스 때문에 그렇게 바보처럼 하늘이나 날아다니며 생난리를 피우고 천사 털이나 뽑아다주는 호구로 보이냐 묻는 거다.”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

“솔직하게 대답해줘도 되잖아. 내가 마음에 든다고, 그렇게 대답해보란 말이야. 지금 엄청 짜증나고 있으니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짓이 고단해보였다. 강요하는 목소리에는 참아왔던 간절함이 녹아있었다. 이상한 기분에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히는 하리였다.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남자가 그간 알고 있던 히엘, 그 다정한 마법사인지 헷갈린다. 무엇이 이 사람의 진짜 얼굴일까?

“궁금합니다. 어째서 저입니까? 혹시 힘없는 꼭두각시 황후가 필요하신 거라면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지난 시절 궁에서 겪을 일로도 저는 충분히 저의 무력함을 알아왔으니까요.”

히엘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너, 너 진짜…….”

“저보고 광녀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광녀에게 어, 어떻게 황후를!”

“그만해.”

“광녀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저 같은 평민에게, 그런, 귀, 귀한 반지를 주시고 저는 그런 거……."

“그만 좀 하자고, 응?”

“폐하?”

“사람 마음 재려 하지 말고, 간단히 대답하면 되잖아. 내가 좋다고, 나랑 결혼할거라고.”

“흑…… 싫습니다! 폐하께서는 자꾸 대답만 강요하시는데, 으흑, 언제 한 번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이나 하신 적 있으신…… 읍!”

울먹이며 따지는 말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막혀버렸다. 깜짝 놀란 하리가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를 좌우로 왔다갔다 살폈다. 히엘의 감은 눈, 그 부드럽고 긴 속눈썹이 오롯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혀와 함께.

‘망할…….’

히엘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하리의 원망어린 눈빛을 다 느끼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사람, 너무 야속해, 그 커다란 초록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자신 역시 급하게 몰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감정에 내맡긴 채 입맞춤을 퍼부어대고 싶을 뿐이었다. 히엘은 맞부딪친 입술을 떼어 내며, 하리에게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넌 역시 둔해. 몇 달간 그 휑한 공간에 드나들며 이것저것 챙겨줬던 이유가 뭘 것 같아? 어떻게든 제 정신 찾게 해주려고 관심도 없는 무슨 바느질 따위를 내가 왜 했을 것 같은데? 굳이 너한테 내 조카를 맡긴 이유가 뭔지 생각 해 본 적 없어? 안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러겠어, 안 좋아하는데 어떻게 너와 자꾸 만날 구실을 만들려고 그 난리를 펴댔겠냐고!”

“폐하……?”

“젠장,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난 네가 날 히엘이라 부르던 그 때부터 널 좋아하고 있었다고! 너도 그때 분명 내가 좋다고 했잖아! 대답해보란 말이야! 한때는 내 다리 붙잡고 가지 말라고 울먹였던 너였어! 설마 그거,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만 나, 나 진짜 화낼 거라고!"

하리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황제를 향한 약간의 걱정으로 두근대던 것이 어느 순간 설렘을 담아 터질 듯이 쿵쾅이기 시작했다.

“히엘, 님, 저, 저는…… 그러니까, 전…….”

“좋아한다고 말해.”

“저는…….”

“내가 그동안 널 위해 한 일을 얼간이 짓으로 만들지 말란 말이야. 그간 함께 해온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하잖아, 응? 함께일 수 있잖아!”

따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느껴주길 바랐다. 가공간에 갇혀있던 그녀를 집으로 되돌려주었던 것, 핀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던 위기로부터 그녀를 데리고 나와 함께 도망쳤던 것, 그 고단하고도 재미있었던 시간들. 그녀 역시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자는 놀랍다는 듯 큰 눈을 뜨고서는, 황당한 질문을 할 뿐이었다.

“조, 좋아하세요, 저를?”

“꼭 말해야 알겠어? 결혼하자고 하잖아. 대답을 들려달라고 하잖아. 이딴 답답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시간 내서 너랑 이러고 있는 거 아냐!"

“믿을 수 없어…….”

그러자 히엘은 답답하다는 듯 하리의 손을 끌어당겨 제 가슴에다가 대었다. 그리고 다른 손은 저쪽,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뻗었다.

"어떻게 하면 믿을래? 나는 방금 드래곤한테 맹세까지 했다고! 하리 에센이라는 여자가 아니면 즐기지도 못할 몸으로 만들어달라고 맹약하고 온 몸이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맹약, 그거, 그거 하게 되면…….”

드래곤이 지켜보는 장소, 검은 산에서 한 맹약은 드래곤에게 심장을 맡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너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야, 바보야, 좀 알아들어!”

하리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 어떡해요! 안 돼요, 고작 저한테 그런 무시무시한 약속, 하시면 안 돼…….”

두 번째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맹약이란 말에 겁먹은 그녀에게, 히엘은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한 입술로 어루만지며 안심시켜주었다. 겁먹을 필요 없어. 그러니까 널 그만큼 좋아한다는 말일 뿐이야. 그런 말일 뿐이라고. 좋아해. 네가 좋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리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 두 입술의 대화가 짙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움츠렸던 어깨를 늘어뜨리며 히엘의 손을 잡았다. 히엘은 그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입술을 떼어내곤, 제대로 고백했다.

“그러니까, 나의 심장이 되어줘.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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