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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에 위치한 제 23 백색 산. 그 이름답게 모든 것이 전부 하얀색이었다. 나무, 물, 동물, 식물, 바위, 등 모든 것이 눈처럼 새하얘서 천국과 같은 풍경이었고, 덕분에 하리는 검은 산에서 보았던 흉흉한 느낌과 마계 생물들의 징그러운 인상을 지워갔다.
백색 산의 가장 꼭대기에는 은빛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가 있었다. 하리는 그곳에서 노니는 순백의 엔젤리카(날개달린 사람 모습을 한 중성체. 미모가 빼어나며 날개털이 부드러워 인간들이 그 털을 사냥하여 베갯잇 안에 넣거나 쿠션솜으로 사용한다.)를 난생 처음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와아! 천사가 날아다니네요! 아름다워요! 정말 예뻐요!”
“응, 그러네? 하하.”
사실 히엘은 엔젤리카를 마활 수련생 시절 아주 지긋지긋하게 본 적이 있었다. 스크롤 시험 재료로써 엔젤리카가 필요했었는데, 너무나 잡히지 않아 애가 탔고, 그들의 광선공격으로 눈이 멀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스크롤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그들에게 xx를 xx해버리기 전에 모두 멸종되어 버리라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지금은 구경도 하기 싫을 정도로 보기 싫은 생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하리가 좋아해주니 장단을 맞춰줘 본다. 어디 엔젤리카 뿐이랴. 이 백색 산에서 기고, 걷고, 날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따분한 것들일 뿐이겠지만, 그녀에게는 환상의 풍경이리라. 청혼 작전 두 번째 방법 ‘아름다운 것 보여주며 감동주기’가 대충 끝이 난 듯하여 히엘은 하리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뭐 좀 먹으러 가볼까?”
엔젤리카에게 푹 빠져 넋을 놓고 있던 하리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저 날개 털, 달라고 하면 엔젤리카들이 화내겠죠?”
“그건 왜?”
“그게, 으음, 이불솜으로 사용하고 싶어서요.”
“아하.”
히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나 뭐라고 했냐, 방금? 아하? 아하는 뭐가 아하야! 이거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생겼어! 얼른 오늘 청혼 작전 마치고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망할…….’
그러나 히엘은 자신이 하는 생각만큼 솔직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왜? 황후를 들여야 하니까. 그것도 하리 에센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후를! 최단 기간에! 그러지 않으면 어머니를 포함한 궁의 수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성가시게 굴 것이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역시 그녀를 얼른 황후로 들이지 않으면…….
“분명 털을 뽑으면 화낼 거예요, 그치요?”
떨떠름한 표정을 재빨리 지우고 밝게 미소짓는 히엘이었다.
“엔젤리카들은 털을 뽑건 안 뽑건 원래 성격이 고약해. 뽑아다줄까?”
“어머나, 그래도 될는지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예의상의 거절도 없이 곧바로 화색이 돌며 부탁하는 하리였다. 분명 오늘 마계에 오던 때부터 마력 운용이 안 좋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새까맣게 잊은 듯하다. 저렇게나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데 엔젤리카 날개털을 안 뽑아줄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히엘은 로브를 벗어던지고는 몸을 풀며 심호흡을 했다.
“이 하얀 막이 보호막인 건 말 안 해도 알지?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부유마법 스크롤 가져올 테니까.”
히엘이 자리를 비운 동안 하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 엔젤리카의 이불솜, 아, 엔젤리카의 베개솜, 아, 엔젤리카의 쿠션솜, 세드릭의 베개에도 넣어줘야겠다! 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온 집안을 엔젤리카의 깃털로 도배할 꿈을 부풀려갔다.
얼마 후 히엘이 부유마법 스크롤 몇 장을 들고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그 스크롤을 소모하여 하늘을 날아다니며 엔젤리카를 포획해야 할 것이다. 사실 수련생 시절에는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몸짓이 우스꽝스러워서 절대로 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가 엔젤리카의 깃털을 구하려고 허공을 종횡무진하자 하리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한참 후 무려 부유 스크롤 세 장이 쓰였고, 고된 고공비행 끝에 히엘은 엔젤리카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잡았다'기 보다는 그가 비행에 지친 나머지 공정 거래를 하고 '모시고 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잡혀줘서 고맙구나! 뚱땡아!]
엔젤리카들 중에서도 상당히 비만했던 그 엔젤리카는 말 대신 뚱한 표정으로 히엘에게 대꾸했다. 곱게 그냥 호수 근처로 가면 될 것을 속박을 걸어 질질 끌고 가는 히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히엘은 엔젤리카에게 해맑은 웃음을 웃더니 이죽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봐, 네 녀석은 대체 얼마나 네 동료들을 포악하게 해치고 살아와서 이렇게 살만 뒤룩뒤룩 쪘냐? 네가 그 말로만 듣던 백색산 폭군이지? 아무거나 되는대로 다 처먹는? 그치?]
[시끄럽다. 인간. 내 털을 노렸으니 반드시 우크우크(거대누에고치같이 생겼으며 그 주둥이 안에 송곳니가 촘촘히 박힌 마계생물) 열 마리를 잡을 수 있는 스크롤을 주어야 할 것이다. 보아하니 애인의 종 노릇을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것 같은데, 나도 방해하긴 싫구나.]
[알겠어, 인마. 잠자코 얌전히 털이나 뽑히기나 해.]
[좋다.]
하리는 살찐 천사와 친절한 마법사가 유유히 날아오자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며 감탄에 빠져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쯤 지난 뒤 히엘은 엔젤리카의 털을 대량 회수해 어디론가 마법 이동을 시켰고, 엔젤리카는 히엘에게 우크우크를 잡을 수 있는 스크롤 총 열 장을 사례로 받고 민둥한 천사가 되어 사라졌다. 엔젤리카의 털이 하리의 집 다락에 잘 도착해있을 거라 말하는 히엘에게 하리는 정중히 예를 갖추며 감사를 표시했다.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영광은 무슨, 이제 식사하러 가자. 배고파.”
정말로 힘들고 허기가 졌다. 드래곤과 담판을 위해 아침도 굶었고, 엔젤리카 털을 구하는 중노동에 체력도 바닥이 나있었다. 하리와 히엘은 로브자락을 휘날리며 어디론가 향했다.
‘아, 겁주며 의지하게 만들기 완료. 아름다운 것 보여주며 감동주기도 완료. 세 번째 작전을 해볼까나.‘
***
코스모스가 파도치는 들판에 그림 같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가로운 분위기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히엘이 청혼 장소로 선택한 곳은 단출하고 깔끔하며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어느 음식점이었다. 그가 마법 수련을 위해 온 대륙을 떠돌던 시절, 가장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광녀는 아주 크고 넓은 집 어떻게 생각해?"
느닷없는 질문에 하리는 한참을 생각하다 물을 한 잔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고 넓은 집! 아주 좋죠!"
폐쇄공간시절의 아픔을 가진 그녀였기에 마다할 이유란 없었다. 식사를 하던 것을 잠시 멈춘 히엘이 두 손을 깍지 껴 모은 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혹시 요즘 뭐,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던가, 있어? 아, 세드릭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으려나? 그러니까…… 애인, 뭐 그런 사람 말이야."
“없어요, 애인.”
“관심 드러내는 녀석들은 없고?”
“있어요.”
“저런, 어떤 녀석일까? 괴롭히진 않아?”
“히에라지엘 님, 요.”
“어…… 응?”
사람을 무안하게 하는 대답이었다. 히엘은 하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둔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괴롭히기는커녕 얼마나 친절하시다고요. 분명 제가 무례하게 굴고 성가시게 한 적이 많았을 텐데, 그리고……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였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광녀 시절부터 떠오르는 수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히엘과 입을 맞추려 한 적도 있었고, 머슈타트 폐공간 안에서 한 번, 또 아까 검은 산에서 한 번, 그렇게 히엘에게 두 번이나 안긴 적도 있었다. 그 뿐인가. 손목이 잡히는 것은 예사요, 며칠 전에는 자기 아이를 낳아달라는 말까지 들었다. 세드릭의 보호자 일을 맡아주어서 고맙다는 이유로 신분에 맞지 않게 몸소 나서서 엔젤리카의 깃털까지 구해주는 남자였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그 남자에게 다른 목적이 없다고 여길 수 있을까.
“그동안 광녀니, 둔한 여자라고 부른 거 취소할게.”
“…….”
“맞아. 에센 양한테 관심 있는 거. 사실 내가 지금 에센 양이 무지 필요하거든.”
히엘은 깔끔하게 자신의 목적을 시인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뻗은 손으로 하리의 투명한 물 컵 그 위를 빙빙 돌았다. 순간, 컵 속에서 아주 작고 소리 없는 폭죽이 터졌다. 사람들이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은밀한, 하리만 볼 수 있는 그런 마법 폭죽이었다. 하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동안 폭죽에 빠져있었다.
“그거 껴줄래?”
“…… 예?”
폭죽이 멈춘 뒤 컵 속에는,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제국의 상징 블랙유니콘의 문장이 새겨진 붉은 보석 반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반지, 껴달라고.”
”폐하?“
“결혼하잔 말이야."
라는 청혼이 말이, 미소와 함께 나온
"내가 좀 급해. 후계자도 낳아야 하고, 여러 모로."
라는 농담 같은 진심에 여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싫습니다.”
하리의 대답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