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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53화 (5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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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말을 하면서도 그 표정과 몸짓은 상처받은 십대 소녀처럼 가엾게 울먹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히엘과 병사들은 경악했다. 도대체 드래곤이 무엇에 화가 나서 이러한 알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됐든 정제 흑괴석 십 톤을 구하는 것보다는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구하기가 더 쉬워보였다. 히엘은 수긍하기로 했다. 그는 드래곤의 사라지는 모습에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하명하신 대로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뭐 그런 것을 반드시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란, 드레스 디자이너이자 젤레테스 대공의 부인인 오스자르마드리아 젤레테스의 겨울 신작 시리즈 중 하나로, 계절과 유행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드래곤의 갖고 싶은 물건 중 하나였다. 그것도 단 다섯 개만 나왔고, 그 중 네 개는 이미 경매에서 대부호에게 수 천 씰에 팔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패션에 대해서 라고는 제복, 정복, 마활 로브, 군복, 여성 속옷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히엘이 그런 것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일단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히엘은 드래곤에게 차여 얼얼한 급소를 진정시키면서 긴장했던 마음을 지우기 위해 하리를 안았다.

“광녀…… 나 진짜, 겁나서 미치는 줄 알았다. 아무튼 살았어. 휴우.”

하리는 몇 달 전처럼 여자를 막무가내로 안는 히엘의 어느 부분을 걷어 차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제는 히엘이 그때와 다른, 아주, 아주 높은 신분이었고, 이미 한번 드래곤의 구둣발에 걷어차였기 때문에, 찬 데 또 차면 아플 것이니까.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다행인 상황 같아 보여서 하리는 히엘에게 안긴 상태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 히엘이 얼굴을 깊게 파묻다가 질문했다.

“근데 하리.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가 뭔지 알아?”

안은 채로 그러한 질문을 하는 히엘에게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런 자세로 어떤 대화를 나눌 만큼 특별한 사이였던가. 하리는 병사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목소리를 낮춰 설명을 시작했다. 유행의 도시 아이얄의 아가씨답게, 패션에 관한 온갖 정보엔 밝았다.

“알아요. 그거. 소문에 의하면, 마담 젤레테스가 딸의 결혼식 때 입힐 거라고 만들었다던 드레스예요. 그게 어떤 드레스냐면 디자인이…….”

한참동안 설명을 차분하게 듣고 있던 히엘은 드래곤의 취향이 변태 같다고 속으로 비웃다가, 갑자기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드래곤이 있을 때에는 긴장을 하고 있던 상태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젤레테스라는 흔치 않은 성은 바로 어머니와 신료들이 황후 간택 후보로 가장 많이 언급했던 여식의 집안, 젤레테스 대공의 성이 아니었던가.

‘망할, 뭐? 젤레테스? 어머니께서 간택전 따윈 열지 말고 바로 황후로 들이라고 했던 여자의 집안? 그 집안의 부인이 자기 딸 결혼식에 입힐 거라고 만든 옷이라고? 왜 이 미친 드래곤은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것 중에 그딴 옷을 바치래!’

히엘은 갑자기 젤레테스 대공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환청처럼. 허허, 제 아내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를 가져가고 싶으시다면, 제 딸을 폐하의 반려로 삼아주십시오, 후흐하하하하…….

청혼 계획 그 첫날부터 죽상을 하고 마는 히엘이었다. 그의 팔에서 힘이 풀리자 하리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서 히엘의 안색을 살피며 드레스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워낙 아름다운 옷이라서, 모든 여인들이 탐내는 옷, 이라고 하던…… 저기 폐하, 황제 폐하, 듣고 계세요? 폐하? 오, 오빠…… 듣고 계세요?”

병사들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오빠’라는 말을 그녀가 하자, 그제야 히엘은 환청에서 빠져나와 밝게 웃었다.

“아니, 기분이 안 좋긴! 자, 검은 산 관광도 끝났으니,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거나 먹어 볼까! 자, 자, 갑시다! 가자고요!”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드래곤 그 변태가 열흘이나 시간을 줬어! 히엘은 병사들을 돌려보냈다. 사실 대마법사인 그에게 호위 병사의 존재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다. 단 둘이 있게 되자 하리는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히엘은 그녀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다정히 속삭였다.

“이제 우리끼리 재미 좀 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법 영상구 속에 야릇한 영상들을 넣어두고 사는 남자가 말하는 ‘재미’란 무엇일까. 하리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

한편 그 시각, 미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핀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많은 선택의 갈림길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 가장 하고 싶은 것, 이 순간 해야 할 것, 그 세 가지의 답은 각각 달랐다.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것을 가장 잘 해왔으나, 더는 군주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많은 이들을 몰살해온 죄의 대가를 받는 속죄의 길로 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히엘이 앞으로 제국을 잘 이끌어가서 대륙이 통일된 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야, 자신의 죄과도 치적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

핀은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

하리와 히엘은 안전한 마법 보호막 안에 서서 마계의 풍경을 구경했다. 마계는 괴상한 생물들이 바글대는 곳이었다. 다리가 여러 개인 거대 조류들이 구름을 걸어 다녔고, 거대한 인두(人頭)에 팔이 여러 개 달린 몬스터도 있었으며, 매우 긴 다리에 가시가 촘촘히 박힌 거대 거미들은 수시로 땅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상태를 서로 비교하며 으스대려는 좀비들은 괴기스럽다기 보다는 우스웠으며, 몸통에 비해 아주 큰 뿔을 달고 다니는 괴이한 소는 힘들어 보였고, 온 몸에 새까만 반점이 점점이 찍힌 징그러운 갑각류들은 보고만 있어도 소름을 일으키는 생물체였다. 예전에도 히엘과 함께 마계에 온 적이 있던 하리였지만, 그때는 히엘의 마법 수련장이 그녀가 본 것의 대부분이었다. 그때와 달리 적나라한 마계의 풍경에 그녀는 지금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겁을 먹은 채 눈물을 그렁그렁 맺고 있었다.

“폐하, 여기는 무슨 연유로 오시는 건지요, 흑.”

히엘은 훌쩍이는 하리의 얼굴을 보고 히죽 웃었다. 나름의 속셈이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마력이 충만한 상태이면서도 일부러 뻔뻔한 거짓말을 시작했다.

“이런! 오늘 마력운용이 이상하군. 그동안 너무 피로해서 그런가. 미안해. 에센 양. 이렇게 좁은 마법 보호막 안에서 역겨운 것들을 보게 해야 하는 걸 정말 유감이라 생각해. 조금만 더 견뎌.”

“흑흑. 폐하, 무섭습니다!”

“무섭긴, 내가 있잖아.”

은근슬쩍 하리의 어깨를 감싸듯이 팔을 두르는 히엘이었다. 이 안전한 마법 보호막 안에서도 하리는 마계 생물들과 닿지 않으려 조금 더 밀착을 하는 등 애를 썼다.

“폐하…… 흐윽. 외람되오나 마법 보호막을 조금 더 세게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안전하다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도 내가 만든 건데 뭐가 그렇게 불안해?”

“그, 그렇군요!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폭 안겨와 의지하는 이 자그마한 붉은 머리카락 아가씨가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왜 핀 그 녀석은 어린 주제에 이런 애교를 못 부리는 거지? 왜 어머니께서는 그 흔한 황녀 하나 낳지 않으셨습니까? 히엘은 청혼 계획 그 첫 번째 방법, ‘겁주며 의지하게 만들기’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하리를 데리고 마법 수련장으로 갔다.

분명히 마계보다 재미있는 곳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고, 식사도 근사하게 하자던 황제가 엉뚱한 곳으로만 간다. 처음에는 다짜고짜 검은 산에 데려가서 드래곤과 만나지를 않나, 또 드래곤에게 주요 부위를 차이질 않나, 이젠 다시 예전 그 음란한 영상들이 난무했던 마법 영상구가 굴러다니던 마법 수련장으로 간다? 종잡을 수 없는 황제의 행동에 하리는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히엘이 갑자기 물었다.

“복장 놀이 좀 해볼까?”

“복장 놀이요?”

변태 마법사가 말하는 복장 놀이란 어떤 복장 놀이일까. 하리가 경악에 물든 눈초리로 히엘을 보았지만, 히엘은 그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수련장 저 안쪽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곧 나무 썩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서랍이 열렸고, 검정색 로브, 짙은 붉은색 로브, 짙은 회색 로브가 허공에 두둥실 떴다. 모두 후드가 있는 로브였다. 수상쩍은 로브를 괴물 보듯 슬금슬금 피하는 하리가 재미있는지 히엘이 씩 웃으며 물었다.

“한 벌 골라봐. 에센 양은 무슨 색 좋아할까?”

그러나 하리는 그 세 개의 로브 색깔들이 아닌 다른 색깔을 선택했다.

“핑크색이요."

조금 남은 눈물을 마저 훔치면서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그녀가 재미있는 히엘이었다. 곧바로 짙은 붉은색 로브에 빛 조절 마법이 가해져서 얼추 촌스러운 핑크색 로브가 만들어졌다. 히엘은 그 로브와 검정색 로브에 정화마법을 걸었다. 그가 갑자기 제복 상의를 벗자, 하리는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뭐해? 네 로브도 정화시켰으니 입자고. 그래야 눈에 안 띄거든.”

“아, 복장 놀이에는 그런 목적이 있었군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후드 로브에 몸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하리는 의아해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속성 청혼하기 작전 그 첫 번째인 ‘겁주며 의지하게 만들기’가 무던하게 끝이 났었다. 히엘이 계획한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아름다운 것 보여주며 감동주기’였다. 원래 여자들이란 게 분위기에 약한 존재, 천국과 흡사한 풍경을 보여주면 하리 에센은 분명 눈을 초롱초롱 빛낼 것이다. 예전 폭죽 마법을 보고 좋아하던 그때처럼. 히엘은 상상하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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