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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황제가 마계보다 좋은 곳으로 가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리는 검은 산의 스산한 풍경을 보며 이곳이 정말 마계보다 좋은 곳이 맞는지 의심했다. 풀과 나무는 검고, 동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가을바람 치고는 꽤 냉기를 품은 바람이 칠흑의 숲 사이를 돌아다니며 검은 낙엽을 휘날리고 있었다. 험악한 인상의 병사들이 흑괴석 삼지창을 들고 앞뒤로 호위했고, 저 멀리 보이는 기암괴석은 이따금 쩍-소리 내며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세드릭을 보살핀 사례를 해주시려는 거야? 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일과 청혼을 하루 만에 해치우려 하는 히엘의 속내를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곳이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장소라서 그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황제에게 감사히 여겨야 하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갑자기 히엘이 한숨을 쉬며 무언가 마음을 다 잡은 듯 어깨를 폈다.
“후, 좋아. 겁먹을 필요 없어.”
“외람되오나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될는지요?”
“어, 나 오늘 죽을 지도 몰라.”
“예?”
지금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인 검은 산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와 있어도 침묵만을 유지하고 있다. 히엘은 그런 드래곤을 밉상으로 여기며 마법어를 이용하여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드래곤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법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하리는 점점 궁금증만 커져갔다.
[드래곤이시여.]
그게 인사였다.
[드래곤이시여-.]
[…….]
[드래곤이시여-.]
[…….]
[드래곤…….]
[듣고 있다.]
[공물 조약에 대해 직접 말씀드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흠흠.]
어째서 공물을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불같은 진노를 하리라. 히엘이 예상한 것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드래곤은 어울리지도 않는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이고 있었다. 눈치를 채는 히엘이었다.
‘이 파충류 이거, 사실은 정제 흑괴석 말고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냐?’
그렇다면 마음껏 배짱을 부려도 될 것이란 판단에, 작심한 말이 나왔다.
[거두절미하고 아룁니다. 공물로써 요구하신 정제 흑괴석 십 톤, 못 만듭니다. 죽여주십시오.]
[흠흠.]
[어차피 제 심장은 당신의 것이잖습니까? 편하게 그냥 죽여주십시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한 대응이었다. 히엘은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륙 최강 생물체의 체면에 그깟 정제 흑괴석 십 톤을 추려 받지 못한다고 제국 황제를 죽이는 짓이 가능할까. 게다가 그 황제는 보통 황제가 아니었다. 무려 마력으로서는 드래곤과 같은 크기를 가진 성검이라는 존재가 앉혀 놓은 황제였다. 그런 황제를 드래곤이 쉽게 죽여 버리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 히에라지엘이 있기에 통일된 대륙이 재정비되고 각종 공물이 안전하게 드래곤의 둥지로 들어올 수 있는 법이었다. 고작 공물 문제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처단해버린다면 후계 문제 등 권력 분산의 소지로 인해 당분간 드래곤이 받아먹을 공물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자포자기로 했던 계산을 몇 번이고 되뇌며 히엘은 드래곤을 따라 아무렇지 않게 헛기침을 연기했다.
[흠흠.]
[히에라지엘, 그대는 그대의 죄를 정녕 반성하지 못하는 건가? 내 마음 또한 헤아릴 수 없는 것인가?]
[예?]
드래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히엘으로부터 폭언에 대한 사과를 받았으면 하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제가 입이 걸어 죄송했고, 그때는 이성을 잃어 그런 말이 나왔으며, 다시는 그런 ’개 같은 파충류새끼‘라는 독한 말을 하지 않겠다’고 읍소하며 무릎 꿇고 사죄하기만을 바랄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했던 폭언을 새까맣게 잊은 히엘은 지금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엽궐련을 피워대며 자신을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하고 있다. 예전에는 드래곤에게 정중하게 허락을 구한 뒤에야 연기를 피워대던 그가, 지금은 드래곤을 아주 무시해버리고는 그 옆의 붉은 머리 여자에게 흡연을 해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하며 드래곤을 일개 인간 여자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세상에나, 죽을 각오를 하고 온 인간의 태도가 저러한가? 드래곤은 서서히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저 거만한 황제를 괴롭히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야 할까.
드래곤이 어디선가 이를 갈며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고서도 히엘은 하리에게만 수다를 떨어댔다.
“흠. 광녀. 드래곤께서 도무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죽을 것 같군. 그동안 광녀라 불러서 미안했어.”
“…… 네에?”
“광녀랑 이것저것 많이 하고 싶었었는데, 크흑!”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 놈의 폐하 좀 안할 수 없을까? 제정신이 아닐 때처럼 히엘 님이라고 해보란 말이야. 아니면 오빠란 호칭도 좋지. 이거 명령이거든. 응? 황제의 명령이라고. 자, 오빠 시간 없다. 어서 불러. 오빠, 죽지 마세요! 드래곤 님, 오빠를 제발 살려 주세요, 흑흑!”
너스레가 일급 광대수준이었다. 하리는 의아한 와중에 머리가 아프기까지 했다. 드래곤에게 황제의 목숨을 구걸하라니……. 반쯤은 진담 같고, 반쯤은 농담 같기도 한 것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광대 같은 사람이 정말 황제인지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급기야 호위 병사들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혹시 황제가 폐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평소에 뺀질거리게 처세하여 드래곤에게 미움을 사서 사형이라도 받으러 온 건가, 하는 상상의 나래까지 펼치고 말았다.
하지만 히엘은 아주 대놓고 장난을 치는 것에만 바빴다. 여동생 없이 무뚝뚝한 남동생 하나만 있어서 그런지, 오빠라는 호칭을 강요하는 모습이 자못 진지했다.
“응? 응? 빨리 히엘 오빠 해보란 말이야!”
“히, 히엘 오…… 오, 빠.”
“드래곤 님! 히엘 오빠 살려주세요! 이렇게, 응?”
“드, 드래곤 님! 히, 히엘 오빠 살려주세요!”
“흑흑, 감동이야…….”
히엘은 예쁜 눈을 찡그리며 우는 시늉까지 했다. 병사들이 키득 거리자 하리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히엘에게 귓속말을 했다.
“폐하, 지금 이게 무슨……?”
그때 휘날리는 검은 낙엽을 헤치고, 한 소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새까만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우아한 새 장식을 단 십대 중반의 아름다운 소녀, 바로 드래곤의 폴리모프였다.
하지만 드래곤에게 배짱을 부린 뒤 불안감을 지우느라 하리에게 장난이나 쳐댄다고 정신이 없던 히엘은 드래곤을 보고서 예를 갖추기는커녕 무의식적으로 그 머리를 쓰다듬어버리는 결례를 범하고 말았다.
“예쁘게 생긴 애구나, 커서 사내 여럿 후리겠…….”
중얼거리다가 문득 드래곤에게서 나오는 굉장한 마력 압축의 기운에, 히엘의 눈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후후, 히에라지엘……, 나의 머리카락이 그렇게나 부드러운가? 최근 신경을 쓰긴 했지. 아이얄의 가게에서 관리를 받기도 했고…….]
[드, 드래곤이시여! 무례를 용서하소서!]
그들의 마법어를 알아들을 수 없고, 그들이 가진 마력도 느낄 수 없는 하리는 그저 드래곤을 길 잃은 가여운 아이로만 보고 보듬을 뿐이었다.
“이리오렴. 어린애가 이 괴기스러운 산에는 어떻게 올 수 있었니? 이분께서는 무려 제국의 황…… 아, 아무튼 그런 높은 신분의 분이시란다.”
그녀가 드래곤을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자, 히엘은 하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뒤로 물러나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하리의 귓가에다 대고 저 아름다운 소녀의 정체에 관한 것을 빠르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하리는 황급히 드래곤에게 예를 갖추었다.
‘드, 드, 드래곤 아저씨…… 인간 여장을 해? 이런 변태 같은 취미가 있었다니! 아냐, 아냐. 뭔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워낙 덩치가 커야 말이지. 그렇게 크게 살다보면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한 소녀들이 되고 싶을 때도 있겠지, 암, 그렇고, 말고. 전 황제도 그 흉흉한 별명을 하고서 바느질을 했으니 드래곤이 인간 여장을 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어…….’
그렇게 그녀가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을 때, 드래곤은 하리를 씩 웃으며 보다가 히엘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는 뾰족한 구둣발로 사정없이 히엘의 급소를 가격했다.
[바치라는 흑괴석은 안 바치고!]
[윽! 드래곤, 이시여!]
[애인이나 데리고 와서는 장난이나 쳐 대는가, 하?]
[그러니까 그냥 죽여 달라고 하잖습니까!]
[가소로운 인간. 뭐라? 죽겠다? 그 경박한 주둥이는 황제가 되어서도 여전하군. 좋다. 정제 흑괴석 따위로 애꿎은 이들에게 혹한 시련을 내릴 수야 없지. 황제인 그대가 직접 반성을 뼈아프도록 해보라.]
사색이 된 히엘이었다. 드래곤이 말하는 뼈아픈 반성이란 게 무엇일지, 아무래도 죽는 것 보다 더 성가신 일을 겪을 듯한 위기였다. 드래곤은 히엘에게 뜬금없는 명령을 했다.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를 바쳐다오. 없으면 똑같이 만들어서라도 가져오라.]
마법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하리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히엘은 마담 젤레테스의 블랙 바이올렛 넘버 5가 뭔지 몰라 갸우뚱했다.
‘미친 드래곤! 마담 뭐시기의 뭐시기 뭐시기 넘버 5? 그게 뭐야? 혹시 내가 들어갈 관 이름인 거야?’
드래곤은 말을 이었다.
[그 드레스는 가히 정제 흑괴석 십 톤에 맞먹는 대작품이라 할 수 있지. 열흘 주겠다. 히에라지엘 자네를 중심으로 맹약된 마활들과 최북쪽 해안의 안전을 지키고 싶다면, 반드시 가져와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할지는 나조차도 장담을 하지 못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