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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다.”
“좋아죽겠다는 표현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핀이 뭔가를 찾았다. 단검이라도 있으면 형에게 겨눌 기세였다. 하지만 검이 있을 리가 없었다. 히엘은 웃으며 축소화시킨 성검을 핀에게 툭, 던졌다. 아주 오랜만에 그 검이 아무런 검기도 내뿜지 않고서 핀을 응시했다. 자신을 황제에서 밀어내버린 존재. 성검이라면 그저 끔찍한 핀은 이를 악 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꼴 보기 싫은 것을 보았더니 절로 술이 들어갔다. 한참 후에 그가 그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말을 했다.
“어머니 만나고 싶어.”
“글쎄. 아마 어머니께서 널 보면 온 나라에 네가 살아있다고 알리시며 축제라도 여실 것 같은데. 아직은 때가 아니야.”
“…….”
“어머니는 걱정 말고 넌 너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 여기서 좀 생각해보다가 결정 나면, 장소를 말해. 보내줄 테니. 그리고…….”
뜸을 들이는 것으로 보아 하리에 대한 무언가 중요한 말이라도 나올 것 같아서 핀은 귀를 기울였다. 히엘이 꺼낸 것은 전 황후에 대한 이야기였다.
“리이라의 묘는 궁내 조례지로 최근에 옮겼어. 언제 한 번 가봐.”
“쓸데없는 짓을.”
“너 그러는 거 아냐. 아무리 서로 마음에 없던 사이였어도, 그건 아니지. 그리고…… 음…….”
“빨리 말해.”
“에센 양에겐 정말 별 생각 없었지? 없는 거지?” 핀은 한참을 뜸들일 뻔 했다. 하지만 지금 대답을 머뭇거렸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어. 그냥 퀼…… 트를 하기 위해 데려온 사람일 뿐이었으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히엘은 또 넘어지지 않으려고 테이블을 짚었다. 그러다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핀의 머리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만졌다. 어릴 때처럼 다정한 말이 나왔다.
“잘 자라. 자다가 지도그리지 말고.”
“꺼져!”
히엘은 축소된 성검을 주워들고 비틀거리며 그곳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핀은, 자신이 뱉은 대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단지 바느질 선생일 뿐이라 생각했던 여자에 대해.
***
새 지저귀는 소리가 맑은 아침이었다. 집안 가득 갓 구운 빵 냄새가 그윽하게 퍼졌다. 단지 냄새만 좋은 빵일 뿐이었다. 그 맛은…….
‘요리는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을까.’
세드릭은 양치를 하며 하리가 만든 그 괴상한 빵맛을 머릿속에서 지워갔다. 한참 후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친 그는 하리에게 일러두었다.
“오늘부터 저녁은 제가 할게요. 설거지도.”
설거지를 하던 하리가 깜짝 놀란 눈을 하고 대꾸했다.
“뭐? 아냐. 그게 누나 일인데…… 네가 할 필요는 없어.”
“하고 싶어서 그래요.”
누나가 만든 음식이 맛이 없어서 내가 직접 해야겠다, 라는 솔직한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얼마 전 학교에서 요리 실습을 했던 것에 흥미가 생겨 집에서도 요리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요리를 하고 싶다고? 정말?”
“…… 예.”
“요리가 좋아?”
“그냥 해보고 싶어요.”
“그래, 그럼.”
하리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 전에는 집에서 입도 벙긋 안 하던 소년이었는데, 이젠 집에서 요리를 다 하려고 한다. 그녀의 눈으로 봤을 땐 대단한 발전이었다. 이젠 황제에게 조카의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기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런데 세드릭. 오늘 내 저녁은 안 해도 돼.”
“어디 가세요?”
세드릭이 처음으로 묻는, 일상적 질문이었다. 하리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폐하께서 보자고 하셔서.”
***
그 시각 황궁에서는 황제와 고관들이 드래곤에게 바칠 공물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히엘의 머릿속에서 하리와의 약속은 새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온갖 서무를 보느라 바쁜 것이 핑계의 반이라면, 원래 여자들과 하는 약속을 깃털처럼 잘 날려먹는 버릇도 핑계라 할 수 있었다.
흑괴석에 관한 문제는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될 대로 돼버리라는 생각으로 검은 산에 갈 준비를 했다. 대체 드래곤이 무슨 생각으로 흑괴석 십 톤이라는 터무니없는 공물을 바치라하는 지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지만, 배 째라는 식으로 무모하게 굴어버린 뒤 드래곤의 반응을 보면 적어도 드래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마리는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거울 앞에서 오랜만에 제복을 갖춰 입은 히엘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짧게 친 머리는 단정하게 손질했고, 평소 향기라면 질색을 했지만 로가드리아 향수도 뿌려보았다.
“아아, 언제 봐도 옷걸이가 죽여준단 말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평소 드래곤은 여장을 즐겨했더랬다. 스스로 인간 여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면 그런 괴상한 짓을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라는 전제 하에 히엘은 드래곤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매력으로 내세워 공물 사안을 양보 받는 유치한 계략을 쓰기로 해보았다. 하지만 모든 건 결과가 나와야 아는 법. 히엘은 거울을 보며 줄곧 ‘내가 봐도 반할 것 같아. 어쩜 이리 예쁘지? 응?’중얼거리며 거울 속 자신에게 뽀뽀를 하다가 점점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젠장, 왜 이리 떨려!’
아무리 인간 여장을 즐기는 드래곤이라도 대륙 최강의 생물체였다. 그런 강자 앞에서 정말 배 째라고 배짱을 부렸다가는 제대로 혼쭐이 날지도 몰랐다. 우스갯소리 같은 상상이지만 역대 황제들 중 최초로 드래곤의 구두에 주요부위를 차이는 황제가 될 지도 모르리라. 겁에 떨고 있던 히엘이 불현 듯 뭔가 생각이 나서 걸음을 멈췄다.
‘뭐지? 뭔가 중요한 약속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결혼! 프로포즈!’
그는 호위 병사들에게 대기를 지시하고 가공간으로 갔다. 그곳에 가서 하리를 불러 함께 데리고 와야 했다. 지금 온갖 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 일이든 연애든 한꺼번에 해치우고 싶었다. 그녀 역시 약속을 잊지 않고 이왕이면 주황색 지붕 집에 있어주면 좋으련만. 그렇게 히엘이 언덕 집의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대화 소리가 나왔다. 핀과 하리의 목소리였다. 히엘은 문을 열려던 것을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세드릭을 돌봐준다고 한 턱 쏘다니. 그리고 그 장소를 마계로 정했다고? 장난일 거야. 정말 자기가 직접 대접할 생각은 아닐 거라고. 누군가를 시키겠지. 차라리 보수를 더 달라고 해.”
“하지만 매달 삼백 씰이나 받는 걸.”
“그럼 육백 씰로 달라고 해.”
“두, 두 배나? 어, 어떻게 그렇게 염치없는 짓을 하겠어, 내가?”
“너 이것저것 바쁘다며. 마계 구경할 시간 있어? 그리고 거기 그다지 재미없어.”
“정말?”
“그렇다니까. 네가 봤다던 징그러운 마계 생물들, 그게 전부야. 그리고 형이 얼마나 바쁜데, 아무튼 그냥 했던 말일 거다. 평소에도 원래 여자들한테 잘 그래. 새까맣게 잊곤 모른 척 하기로 유명하지.”
애당초 편히 대화할 수 없는 사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누고 있었다.
‘요 녀석 봐라?’
히엘은 팔짱을 끼고 턱을 매만지며 동생의 깜찍함에 감탄을 했다. 사흘간 공물 문제며, 황후 간택 문제, 그 외 각종 서무에 골치가 아픈 나머지, 하리와 마계에 갈 약속을 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뭐? 평소에도 원래 여자들과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는다고? 그건 정말이지…… 사실이다. 사실이었다. 이십육 년 인생, 늘 그렇게 살아온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뒤돌아서서 갈 수도 없었다. 후사를 봐야한다며 닦달해대는 수많은 자들의 도끼눈에 저항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 드래곤과 만나 공물 문제도 손 봐야겠다, 이참에 매우 빠르게 황후 문제도 해결하는 것이 좋았다. 히엘은 작심을 하고 문을 열었다.
“황제 폐하!”
황제의 등장에 하리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시녀가 부랴부랴 뭔가를 챙기러 가려 했지만, 히엘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다짜고짜 하리의 손목을 잡았다. 핀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손에 머물렀다. 히엘은 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하리에게 말했다.
“그래, 마계는 재미없지. 가자.”
“폐하, 어, 어디를 가시는 건지요!”
“마계보다 좋은 곳. 아, 그리고 핀.”
핀은 어느 샌가 테이블에 자리해 책을 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싱긋 웃은 히엘은 하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리이라의 묘에 들렀던 건 참 잘 한 일이야. 안 갈 것처럼 굴더니, 그래도 부인은 부인이구나. 아무튼 독서 열심히 해. 미래에 대한 구상도 좀 해보고. 그럼 수고해, 백수.”
탁- 하고 문이 닫혔다. 바닥을 치고 오르는 온갖 심란함에 핀은 책이고 뭐고 다 엎어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미래는 무슨!’
잠에 빠져드는 핀을 보고 시녀는 전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며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