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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졸리는군.’
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늑하고 편안해서 몇 시간이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취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예쁜 것을 보고 갖고 싶고 만들고 싶은, 손재주 있는 평범한 소녀들이 가지는 그러한 취향이었다. 지난 번 하리가 어째서 바느질을 선택했느냐고 물었을 때,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아무거나 했을 거란 식으로 대충 대답을 했었다. 하지만 바느질에 대한 흥미는 언제나 그의 깊은 곳에 숨어있었다. 바느질이 좋아서 바느질을 하고 싶었다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장난이 아니라 그는 진짜 진지하게 생각 중이었다. 이제 남들 시선을 신경 쓰며 살 필요도 없는 평민이 되었는데, 못할 게 무엇인가.
‘바느질 선생, 다른 사람으로 구할까?’
아들의 속을 뒤집어놓고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진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다가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마다 복용하던 수면약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수마를 불러왔다.
얼마나 지난 걸까. 밤하늘에 달이 밝게 떴다. 하리는 세드릭과 산책을 마친 뒤 집에 와서 씻었다. 그녀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잠옷 차림으로 다락방에 갔을 때까지도 핀은 그곳에서 잠들어 있었다. 벽 쪽에 웅크려서 자고 있는 그를 본 하리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쩌자고 여기서 자는 거야!’
혹시라도 소리가 세드릭에게 들릴세라 그녀는 문을 꼭 닫으며 나지막하게 외쳤다.
“왜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어!”
잠에서 깨어난 핀은 몸을 일으키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빠른 시간에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 왜 안 가냐고 타박하는 하리의 잠옷차림이라던가 젖은 머리카락 등이 낯설고 무언가 민망했다. 둘은 눈을 마주쳤고, 먼저 눈동자를 내리깐 것은 핀이었다.
“그…… 가는 방법을 몰라.”
“마력 있잖아. 이동지점 몰라? 어딘지 안 느껴져?”
“안 느껴져.”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하리는 천장에 달려있는 아기의 모빌 같은 바느질 장식품 중 노란색 하트뭉치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 황당하고도 귀여운 마법 이동 방식이 핀은 장난처럼 여겨져 믿을 수 없었다. 하리는 정말이라고 자그마하게 중얼거렸고, 결국 핀은 미심쩍어하며 손을 올려 그 하트뭉치를 잡으려했다.
“이 유치한 짓들, 형의 짓이지?”
하리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핀은 실소를 흘렸다. 이내 하리에게 부탁이 전해졌다.
“그 아이, 잘 부탁한다.”
“응.”
“너에겐 부담되는 일일지 몰라도.”
“뭐…… 딱히, 그런 건 아냐. 동생 생긴 기분이라 좋은데, 난.”
다른 사람의 아들도 아니고 원수의 아들이었다. 납치시키고 괴롭히던 그 원수의 아들을 친히 보살펴주며, 동생이 생겨 기분이 좋다고까지 표현한다. 핀은 그런 하리가 고맙기도 했지만, 속없는 여자 같단 생각도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넌 참 바보 같아.”
“응, 너도.”
“고맙다.”
“…….”
“그리고…….”
나오려던 말은 도로 삼켜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리였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티에리아에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핀은 하리를 한참 보다가 무언가를 단념하고는 황궁으로 이동했다.
‘잘 자’라는 말을 하기엔, 그들은 아직 어색한 사이였다. 아니, 절대 그런 인사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없는 사이였다.
***
대신들이 드래곤의 공물 조약서 조율 문제와 황후 간택 문제 등으로 눈에 핏대를 세우고 황제를 찾기 바쁠 때, 정작 히엘은 핀이 머무는 곳 침대에 누워 단잠에 빠져있었다. 하리의 집에서 막 돌아온 핀은 그런 히엘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세상모르고 이런 데서 숨어 자는 사람을 제왕의 자리에 올려두어도 성검은 만족하는지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이불이 들렸다.
“나가.”
하지만 히엘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핀은 히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 말했다.
“나가라고 했어.”
“커…….”
코를 고는 시늉을 한다. 잠이 깨서 장난을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장난에 응해줄 수 없었다. 그래서 핀은 깨우기를 포기하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히엘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핀의 어깨를 꽉 잡으며 마치 아이에게 유령의 행동을 흉내 내어 놀라게 하려는 것처럼 괴음을 내질렀다.
“꺄우우울!”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핀은 인상을 사정없이 찌푸리고 말았다. 다 커서도 이런 장난을 하는 히엘과 상대해주고 싶지 않아서 형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다시 그 손이 잡히고 말았다.
“아들이랑 얼싸안고 엉엉 울었니?”
“…… 닥쳐.”
“흐음, 나 너랑 상의할 게 있는데.”
“난 없어.”
싸늘한 대답을 못 들은 척 히엘은 마력을 이용하여 핀을 테이블 흔들의자에 앉혀 놨다. 속박 마법이었다. 그는 엽궐련 하나를 태우며 맞은편에 앉아 시녀에게 손짓을 했다.
“마른 것 봐라. 기껏 그 위대하신 분들한테 굽실거리며 살려놨더니 굶어죽게 생겼네. 형의 수고를 x으로 만들지 말란 말이야. 아, 이것저것 좀 챙겨오고, 나는 과일이랑 술.”
시녀가 식사와 술을 준비하러 가자 히엘은 핀의 얼굴에다 대고 연기를 짙게 내뿜으며 히죽 웃었다. 식사할 생각도 없고 히엘과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 핀은 명령하듯 으르렁거렸다.
“마법 얼른 풀어라.”
“음, 식사는 해야 할 테니 손은 자유롭게 해주겠어.”
“다 푸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형을 노려보다간 뽀뽀당하기 좋을 거라고.”
“……!”
식사보다 먼저 술과 과일안주가 차려졌고, 히엘은 직접 동생에게 한 잔 주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형에게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라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거짓일 터. 핀은 히엘이 내미는 잔을 당장이라도 부수어버리고 싶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잔이 갑자기 허공에 들려 핀의 입 앞으로 둥둥 떴다. 이 또한 히엘의 마력이었던 것이다.
“안 마신다고. 가.”
“그럼 마시지마.”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야?”
히엘은 잔을 거두고는 자기 입으로 모조리 털어 넣었다.
“누구보다 사람 괴롭히는 것에 재능이 있었던 네 녀석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이군. 아, 좋네. 흐음. 그런데 너 뭔가 아직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았나본데…… 여기, 내가 창조한 곳이거든. 이런 가공간 유지하려면 기본 마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란 말이에요. 사용료도 안내면서 어딜 가라마라야? 자꾸 이렇게 귀엽게 굴 거야?”
“…….”
꿍한 채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핀이 귀여운 히엘은 피식 웃었다. 이런 자리는 참 오랜만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자그마할 때부터 진검을 들고 수련하던 꼬마가 제국을 물려받고, 온 대륙을 정복하고, 그 대륙을 고스란히 형에게 넘기게 되고, 이렇게 망가져 살다가 다시 말문을 여니, 새삼 세월에 대한 오만가지 감상이 다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퍼뜩 본론이 떠오른 히엘이었다.
“드래곤 씨가 정제 흑괴석 십 톤을 주면 마활들을 돌려주겠다는데. 아, 물론 내 중심의 맹약으로 바꿔서 말이야.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마활의 탑 시절, 정사에 관해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해대던 모습은 마치 장남인 자신이 황위를 물려받았다면 더 잘했을 거라는 자신감과 미련이 엿보이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히엘은 백치미를 내뿜고 있었다. 드래곤 공물 문제라. 더 이상 그러한 문제는 자신의 소관이라 할 수 없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핀은 싸늘히 대답했다.
“알아서 해.”
히엘은 타버린 엽궐련을 허공에 소멸시켜버리고 새로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에 핀은 기침을 하며 히엘을 째려보았다. 성검이 폐암가능성이 높은 자를 황제로 앉히는 것에 우스운 의구심이 들었다.
“그거 좀 끊지. 기껏 통일해둔 땅덩어리, 오래 다스려야 할 거 아냐?”
“좋아. 결심했어.”
히엘은 결단을 내린 듯 심각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 나온 말은 흡연에 관한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말이었다.
“에센을 어떻게 생각해?”
공물 사안을 물어오더니 갑자기 하리에 대해 묻는다? 핀은 미간을 좁히며 히엘을 한참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네 바느질 선생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이야.”
“의도가 뭐야? 별 생각 없어.”
“그래.”
간단한 식사가 차려졌다. 히엘은 식사에 손 하나 대지 않는 핀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음식들을 허공에 띄워 핀의 입에 강제로 먹이기 시작했다. 핀은 히엘을 노려보며 짜증을 냈다.
“알아서 먹을 테니 관둬.”
“진작 그럴 것이지.”
마지못해 빵을 삼키는 핀을 기특하단 시선으로 보고 있던 히엘이 기지개를 폈다.
“흐아암, 나 요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냐.”
“엄살 피우지 마.”
“너한테 피우지, 누구한테 피우겠냐? 응? 어머니께 피워야겠어?”
히엘은 말하며 시녀에게 손짓을 했다. 시녀가 자리를 비우자, 그는 뜸을 들이다가 세 번째 엽궐련을 꺼내며 핀에게 고백했다.
“결혼이나 하려고.”
“그러던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하는 핀이었지만, 사실 그 머릿속은 히엘이 말하는 청혼 상대가 설마 하리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술을 삼키는 소리와 식사를 하는 소리, 자욱한 연기만이 실내에 감돌았다. 점점 짙어지는 연기가 괴로운 건지 아니면 마음에 뭔가 걸리적거리는 거라도 있는지 핀이 인상을 쓰자, 히엘은 직접 일어나 창문을 열러 갔다. 문이 열리고 히엘은 핀을 지나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핀이 곧바로 팔로 그것을 막았다. 잔뜩 불콰해진 히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장난기 어린 행동과 능글대는 웃음이 부담스러운 핀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히엘의 눈에는 그런 동생이 여전히 아이로 보였다.
“형아가 넘어질까 봐 걱정했져?”
“취했군.”
“고마워. 형님을 부축해준 상으로 속박을 풀어주지. 우리 귀염둥…….”
더 듣기가 징그러운 핀은 히엘의 몸을 맞은편으로 밀어버렸다. 이렇게 징그러운 말을 듣는 것보다 차라리 마활의 탑이던 때처럼 잔소리 하던 것을 듣는 편이 훨씬 편했다. 히엘은 핀의 뺨을 꼬집으려다 실패하자, 테이블 위에 엎드려버렸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돌려 핀을 올려다보았다.
“아, 요즘 욕구불만인지 너한테 막 애교를 부리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