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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49화 (4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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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자신에게 그 남자가 어떤 인간이었던가. 무려 자신을 미쳐버리게 만든 미친놈이었다. 지금도 미친놈일지 몰랐다. 얼른 부자의 감격어린 재회를 시켜주고 자기 할 일에나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젖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그렇게 그녀가 욕실을 나서는 순간, 히엘이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폐하?”

“어, 아직 안 갔어? 잘 됐다.”

“뭔가 잊고 가신 것이라도 있는지요?”

“사흘 뒤에 뭐해?”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만.”

“그래? 그럼 그 날 나랑…….”

“가자. 하리.”

핀 때문에 히엘의 말은 그만 끊기고 말았다. 히엘은 말끔하게 단장하고 현관으로 나가는 핀의 뒤통수에다 대고 아무도 듣지 못 할 욕을 하다가, 하리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나가란 손짓을 했다. 그리고 동생과 하리의 뒷모습을 보며 확실하게, 잊지 않도록, 말해두었다.

“에센 양. 사흘 뒤에 꽃단장 하고 나랑 놀자고. 세드릭 봐준 거 너무 고마우니 내가 한턱 쏠게.”

***

티에리아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황태자 신분이 아닌 하리 에센의 남동생, ‘세드릭 에센’의 행세를 하며 사는 것이 몇 개월이 지나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여러 명이 바글거리는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운동장에서 지저분하게 뒹굴기도 하는 등,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처럼 지내려 노력했다. 그 연기가 자신이 보아도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준이었지만, 단지 보이는 모습뿐이었다. 그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어수선한 상황들이 편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원히 평민으로 살아야 한다면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계속 황실의 비호에 기댈 수는 없고 그러기도 싫었다. 세드릭은 조언을 해줄 사람을 찾는 대신, 직접 집안 이곳저곳을 청소해보며 마음의 정리를 했다. 마침 바람이 불지 않아 낙엽 쓸기에 좋았다. 소년의 꼼꼼한 비질에 낙엽들이 한곳에 정리되었다.

마법이동지점이 2층 다락방이었는데, 하리와 핀은 한참 전부터 그곳 커튼 사이로 세드릭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소 꽤 잘 하지? 안 해도 된다고 하는데 늘 저렇게 내가 없을 때 몰래 해두더라. 궁에서 곱게 자란 게 의심될 정도로 잘 한단 말이지.”

하리가 그렇게 말하자, 핀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리는 핀에게 주의를 주었다.

“사실 저 아이는 내가 궁에 다닌다는 걸 몰라. 지금도 내가 다락방에 가서 쉬는 줄로만 알고 있어. 아마 네가 갑자기 2층에서 내려오면 많이 놀랄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세드릭이랑 잠시 뭐라도 사오며 시간을 만들 테니까, 그 사이에 넌 막 들어온 것처럼 거실에 있어줄래?”

하리가 필요 이상으로 긴장을 하자, 핀은 오히려 아들을 만날 긴장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응.”

하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까치발을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살그머니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는 막 잠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하품을 하며 말을 걸었다.

“아흐흠, 세드릭! 식사를 거의 안 했네? 키가 벌써 다 컸다고 위기감이 없는 거야? 안 되지. 네 나이 때는 그래도 더 많이 먹어야 뼈가 튼튼해진다고. 가자. 간식 사줄게.”

세드릭은 대답 않고 빗자루를 한 곳에 세워두고는 거실로 들어가려했다. 하지만 팔이 세게 붙잡히고 말았다. 인형처럼 감정 없는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배시시 웃는 하리였다.

“가자, 응? 사실은 이 누나가 너무 먹고 싶은 파이가 있는데, 지금처럼 늦은 시간에 혼자 사러가는 게 무서워서 그래…… 응? 가주라? 제발.”

웃으며 달라붙는 하리의 때 아닌 애교에 세드릭은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 누나는 대체 뭘까. 어떤 사람이지? 세드릭은 하리를 괴상하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거지? 두 번 고개 끄덕여봐.”

세드릭은 어색하게 고개를 두 번 끄덕여주었다.

한참 후, 세드릭은 하리와 함께 파이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앉아있는 핀을 본 세드릭의 표정이 순간 굳는다. 하리의 행동이 과장스러워졌다.

“이런, 소, 손님이 오셨네? 난 그럼 차를 준비해와야겠어! 일단 주방에 좀…….”

그녀는 재빠르게 다과를 준비해온 뒤 자리를 피해주었다. 부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핀은 생각에 빠져있었고, 세드릭은 핀을 빤히 드러날 만큼 외면하고 있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아버지 쪽이었다.

“건강해보여 다행이다.”

“…….”

“다른 애들과도 잘 지낸다며?”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범한 동네 형처럼 안부를 물어오는 아버지에게 세드릭은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시절 세드릭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얼굴 보기 힘든 사람, 본다 해도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 웃고 있어도 텅 빈 웃음만 짓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전혀 딴 사람처럼 너무나 가벼운 말투로 말을 건네 오고 있었다. 세드릭은 핀의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정말…… 나는 실망을 했을 거다.”

창문이 덜컹거리며 스산한 바람소리가 휘이잉 하고서 들려왔다. 정원 한쪽에 겨우 정리해두었던 낙엽들이 비질을 한 것이 무색하게 다시 바깥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핀이 말한 ‘나약한 모습’이라는 말이 세드릭의 신경을 자극했다. 잊으려고 애를 썼던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소년의 어머니, 리이라에 대한 기억이었다. 나약한 사람에게 국장은 사치라며 제 아내의 죽음을 비하했던 아버지, 그런 비정한 아버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세드릭은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라고 하셨나요? 아버지, 그럼 묻겠습니다. ‘당신’은, 나약해서 이렇게 된 겁니까?”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조용히 앉아있던 하리는 세드릭의 말에 그만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아무리 아들이라 하지만 그 성격 나쁜 핀에게 으휴, 세드릭…… 나 무서워.’

세드릭은 지난날의 울분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당신도 결국 나약해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온 대륙을 통일한 사람이 겨우 이렇게 망자로서만 살고 있다니요? 한심스럽습니다. 사람들이 당신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아나요? 제국민들 허리 휘는 것도 모르고 땅만 넓히는 바보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 바보의 자식이고요. 아버지라는 호칭도 솔직히 아깝습니다. 차라리 계속 돌아가신 줄 알았다면…….”

짝! 하고 손바닥이 날아와 세드릭의 뺨을 쳤다. 하리의 손이었다. 아버지 없이 살아온 그녀는 세드릭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분노를 해버려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하리 누나?”

처음으로 세드릭에게 이름이 불린 하리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자기 손을 보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쩌다보니 전 황태자에게 손을 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이대로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금 엄하게 타일렀다.

“세드릭.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세상 모두가 아버지를 욕한다 해도 너는 그래선 안 돼. 너는…….”

“아니, 욕해도 돼.”

핀은 하리의 말을 끊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뒤 나온 말이 세드릭의 화를 자꾸만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쉽겠구나. 그 바보가 일궈놓은 땅덩이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기회도 놓쳤겠다, 평생을 거짓된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화를 내는 것도 일리가 있지.”

“아니야! 나는 단지!”

“아니면 뭐지? 지금 이렇게 내게 화를 낸다고 무엇이 달라질 거라 생각해? 아. 물론 죽은 네 어미를 대신해서 화를 내는 거라면 이해하지. 원래 네 나이 땐 그렇거든. 진짜 네 나이 말이야. 나는 널 충분히 이해…….” “닥쳐, 닥치라고!”

세드릭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난 네가 부럽다. 반쪽짜리 자유나마 즐길 수 있을 테니. 날 원망할 생각이라면 굳이 말리진 않겠어.”

차를 한 모금 마저 마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나름 위로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삭막해서 듣는 하리가 다 민망해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원망해서 속이 시원해진다면야 얼마든지 그러도록 해. 그리고 너만은 혼자 상처를 곪으며 살지 않길 바란다. 에센이든, 네 백부든, 네가 기댈 사람은 많으니.”

부들부들 떨며 세드릭이 직접 문을 열고 외쳤다.

“나가요, 당장!”

“세, 세드릭, 너 잠깐 누나 좀 보자!”

하리는 세드릭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진정시켰다. 그녀는 어린 세드릭에게 좀 더 살갑게 굴지 못하는 핀이 야속했다. 이렇게 된 이상 평범한 아버지로서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도무지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에게만은 네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고 다독거려주었다. 부자간의 관계를 이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녀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세드릭과 하리가 잠시 산책을 나간 동안, 핀은 텅 빈 눈을 한 채로 2층으로 올라갔다. 아들에게 한 말들은 절대 실수가 아니었다. 세드릭을 보살피며 아버지로서 그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당장 무리라면, 일단은 이 현실을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낯간지러운 사과도 무의미했다.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며 다시 일어설 거라는 말 따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중요할 뿐이었다. 자신을 옭아매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만이 희미하게나마 그릴 수 있는 미래였다.

‘마법이…….’

황궁으로 이동을 하려 했지만 자동 이동마법이 먹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제한하는 듯했다. 할 수 없이 방 한 구석에 앉아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예전에도 조사 차 온 적이 있었지만, 참 아기자기한 방이었다. 여러 가지 봉제 인형, 꽃분홍에 하늘색 색깔이 알록달록 어우러진 벽걸이들, 하얀색 레이스 커튼, 퀼트로 만든 선인장, 퀼트 베개, 퀼트 이불, 등등 누가 봐도 바느질 하는 아가씨, 그것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아가씨의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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