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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48화 (4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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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 애는 사춘기야. 이런 저런 조언과 대화를 해줄 가장 친근한 사람, 아버지, 바로 네가 필요하다고! 아무튼, 아무튼 여러모로 널 보면 그 애는……!”

“기다려.”

“응?”

“잠깐 기다리라고.”

한순간 세드릭의 처지에 지나치게 이입을 한 걸까. 어떻게든 부자의 재회를 이끌어내려고 애썼던 하리는 자신의 수고가 먹혀들자 기뻐하며 시녀를 불렀다.

“응! 저기요!”

눈치 빠른 시녀는 핀의 외출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하게 된 이 짧은 대화로, 두 사람은 서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말도 잊은 채 외출을 준비했다.

***

사람은 무릇 고운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던가.

히엘은 모르고 있었다. 드래곤이 마활들을 인질로 삼고, 그 맹약의 대상을 히엘로 바꿔주겠다고 한 뒤, 대신에 정제된 흑괴석 십 톤을 바치라고 한 이유에는 생각보다 유치한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 드래곤은 거대한 몸체를 거두고 어여쁜 소녀의 모습을 한 채로 자신의 거대 둥지에서 다트 핀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아이얄의 고급 가게에서 공수해온 드레스를 입고서 그렇게 노는 그의 모습이 놀랄 만도 하지만 그에게 충분히 익숙해진 수하들은 그저 심드렁하게 지켜보며 그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지금 그는 한때 히엘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음흉하고도 심술 맞게 웃고 있었다.

[으흐흐흐……, 골탕 좀 썩어봐라. 뭐? 나보고 ‘xx, 개 같은 파충류새끼가 뭐라 지껄이는 거야…… 보자, 보자, 하니까, 뭐? 하던 일만 잘 하라고? 이런 일이 바로 내가 하는 일이다. 덩치 크고 힘세면 다인 줄 알아, 혼자서는 보석도 못 추려먹는 병신새끼가, 인간들이 공물로 추려내야만 처먹을 줄 아는 거지새끼가 아주 별 지랄…….’ 이라고?]

히엘이 한때 인간어로 그렇게 대놓고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드래곤은 여태 그 어떤 인간에게서 그러한 건방진 언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정제 흑괴석 십 톤을 바치라는 요구는 히엘의 건방짐에 대한 복수였다. 드래곤은 입맛을 다시며 다트 핀을 꽂아댔다. 그 다트 판이 히엘의 뺀질거리는 미안(美顔)이 나오는 마법영상구인 것은 드래곤 수하들의 자그마한 센스였다.

[그래, 나는 혼자 보석을 못 추려먹지. 그러니 너희 인간들이 좀 실컷 추려 보아라. 막돼먹은 황제를 둔 것이 죄라고 여기고. 으흐흐흐.]

만약 인간들이 이것을 본다면 드래곤이 그 거대한 몸에 걸맞지 않게 끝도 없이 꿍한 성격이라고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수하들은 스스로를 무욕한 존재이며 대륙 최고의 관대한 배려자라 칭송하는 드래곤에게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드래곤의 속셈을 모르고 있는 히엘은 속이 탈 지경이었다. 매년 정기적으로 공물을 받고, 특별한 행사 때에도 온갖 보물을 그 거대 둥지에 들여오면서, 정제 흑괴석 십 톤까지 바치라니, 그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난 데 없이 황후 후보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자신은 ‘광녀’에게 엉뚱한 청혼을 해버렸다. 세상 모든 근심은 혼자 다 껴안고 사는 듯 히엘은 침소에 처박혀 연기구름을 덧없이 만들어냈다.

‘뭐? 내 애를 낳아달라고? 진짜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제위에 오른 뒤로 태후의 노파심을 일으키기 싫어서 방탕하게 살아오던 버릇을 숨죽여놓고 궁 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사람이 원래 안 하던 짓을 하면 일찍 죽는다 했던가. 죽는 것 까진 아니더라도 스트레스가 꽤 많이 쌓여있는 참이었다. 광녀 전적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좀 멍해 보이는 여자에게 청혼을 해버린 것은 그 스트레스 탓이리라. 히엘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중얼거렸다.

“휴, 좋아. 까짓 거 청혼은 무슨. 정식 청혼을 하면 되지.”

히엘은 말을 해놓고 고개를 두 번 더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보고 되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뭐? 정식 청혼?”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가. 사실 광녀 전적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었다. 원래는 동생의 바느질 선생으로 궁에 들어온 여자였다. 지난 시간 핀이 그녀에게 보였던 여러 태도들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핀도 그녀를 여자로 볼지도 몰랐다. 지금은 비록 모든 것이 망가진 채로 가공간에 처박혀 폐인 생활을 하고 있는 핀이었지만, 하리를 향한 그의 마음이 이성으로서 유효한 건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히엘은 피식 웃으며 연달아 엽궐련을 태워댔다.

“말도 안 돼…….”

하지만 그의 얍삽한 사고는 점점 핀을 모른 척 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리와 자신이 춤을 추건 사귀건 결혼을 하건 아무런 거리낄 게 없다는 쪽으로만 기울고 있었다. 황제라는 자신의 신분에서 생각을 해보아도 하리는 괜찮은 상대였다. 가족이 없다는 점이 특히나 장점이었다. 황후로 올려도 그녀의 자리를 빌미삼아 이권을 탐하려 손을 뻗쳐오는 자들이 없을 터였다. 게다가 그녀는 세드릭을 보호하는 등 황족의 여러 비밀들을 알고 있었고 그 비밀을 영원히 유지하려면 곁에 두고 보는 것이 편했다. 물론 다른 귀족 영애들보다 훨씬 안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이점일 뿐, 그녀를 곁에 두어야만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직도 풀리지 않고 하리의 손목을 감고 있는 하늘색 팔찌, 바로 그것이었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인 자신도 풀 수 없는 그 팔찌가 히엘은 늘 마음에 걸렸다. 그 팔찌를 주시해야 했고 반드시 언젠가는 풀어주고 싶었기에, 그는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고 싶었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말도 안 되지만…… 되게 하면 돼.”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멋쩍게나마 인정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히엘은 자신이 아끼는 석화된 셰일루티스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 모든 복잡한 마음을 단순하게 하나로 둘러대 버렸다.

“예쁘잖아. 그치? 그럼 되는 거야. 사전 작업 좀 해볼까, 그럼.”

그는 침소로 온 것이 무색하게 다시 가공간, 하리에게로 돌아갔다.

***

그 시각, 핀을 세드릭에게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하리는 답답해하고 있었다. 누가보아도 멋지다고 할 만큼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한 핀이 돌연 아들을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너 혼자 가.”

“진짜 이럴래?”

하리는 따지면서 핀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원래부터 눈에 난 칼자국과 사라진 심장으로 인해 새파래진 얼굴 외에는 흠잡을 데라고는 없는 용모였다. 제 형과 비슷하긴 하나 좀 더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 과거와 달리 깔끔하게 짧게 쳐진 검은 머리카락, 수염자국이 사라진 매끈하고 하얀 턱선, 단정한 옷차림 등, 폐인으로 보일 만 한 모습이 모두 사라졌는데도 핀은 아들을 만나러 가기를 거부했다.

“대답 안 하지? 셋 셀 동안 일어나.”

하리는 어머니가 자신을 깨울 때 쓰던 버릇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세드릭을 위해서라도 핀을 데려가야 했다. 세드릭의 보호자가 된 그녀는 그저 말 뿐인 보호자가 되기는 싫었다. 세드릭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나, 둘, 둘의 반, 둘의 반에 반…… 너어. 얼른 일어나!”

“안 가. 혼자 가래도.”

“세드릭 아니, 티에리아가 계속 우중충한 얼굴로 지냈으면 좋겠어?”

“……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다.”

“혼날래?”

핀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이 바느질 선생이라는 여자가 대체 뭐라고 한 건가. 혼…… 내? 누가 누굴? 한때 제왕으로서 천하를 군림했던 그였기에 하리의 말은 실소를 자아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리는 거침없었다.

“네가 그러고도 애 아버지야?”

“이봐, 에센.”

“시끄러! 애 같은 고집 좀 부리지 마! 부모가 초라하게 구는 것만큼 애한테 실망을 주는 것도 없어! 일어나. 넌 가야해. 이렇게 못나게 굴지 말고 얼른 그 아이한테 가서 넌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야 한다고.”

그동안 핀에게 가져왔던 분노와 짜증을 지금을 기회삼아 모두 쏟아 붓는 듯 큰 목소리였지만, 하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싸늘한 인상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머리 손질을 하는 향유를 손에 박수를 치듯 튀기며 발라 핀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렸다. 나름 멋 내기를 해주는 듯했으나 느닷없이 그런 일을 당하는 핀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 손 내려놓지 못…….”

“시끄러워! 해주면 해주는 대로 얌전히 있어!”

“…….”

“뭐야? 네가 왜 날 노려보는 건데? 이제와 안 간다면 기다린 난 뭐야? 내가 그렇게 한가해보여? 일개 평민일 뿐이지만 나도 내 일이 있다고. 너 때문에 갇혀 살던 시절의 내가 아니란 말이야.”

“뭔데?”

“뭐?”

“뭐냐고. 네가 하는 일이라는 게.”

하리는 머뭇거리다가 하나하나 떠올리며 말했다.

“어, 그러니까…… 나는 세드릭의 누나로 되어있으니까 내, 내일도 학부모모임에 참석해야 하고, 우리 어머니 작품도 경매에 내놓으러 가야하고, 다락방 청소에, 화단 낙엽 쓸기, 장 보기, 세드릭 교복 다리기…….”

이 여자가 바느질 말고도 나름 바쁜 척 해야 할 것이 많구나, 새삼 알게 된 핀은 피식 웃었다. 그때부터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하리가 머리 손질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손재주가 좋은 그녀는 남자 머리 손질도 멋스럽게 해냈다.

“자, 이렇게 잔뜩 멋을 부려야 아버지한테서 여유를 느끼고 세드릭도 표정을 펼 거라고. 그렇게 인상 쓰지 말고 웃어야 해. 기다려. 손 씻고 올 거니까.”

하리는 손을 씻으러 가면서 남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각보다 얌전히 머리 손질을 받는 핀에게 놀라워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만인 듯 노려보더니 한참 후에는 귀와 목을 새빨갛게 붉히며 눈동자로 머리 모양이 어떤지 살피던 것이, 아주 살짝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짜식, 분명 나보다 어린 녀석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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