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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47화 (4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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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이곳에 오더라도 의미 없는 바느질 수업은 그만둘 것이다. 오직 시녀에게 세드릭의 소식만 전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최측근들한테서 황후 후보에 대한 지루한 설명을 듣다가 도망쳐버린 히엘이었다. 반색을 감추지 못한 하리가 눈을 사슴처럼 크게 뜨고서 아직도 적응되지 않은 낯선 존칭으로 그를 불렀다.

“황제 폐하!”

심드렁한 표정의 히엘은 그 ‘황제 폐하’가 자신이냐는 듯 스스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다가 다시 손사래를 쳤다. 그런 호칭이 본인 스스로도 낯설어 죽겠다는 듯 도리질을 치는 그를 보며, 하리 역시 아직도 그의 달라진 신분을 실감하지 못했다. 흔들의자에 앉아 피곤한 듯 목을 뒤로 뺀 히엘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갈수록 예뻐지네. 수업 다 끝났어?”

거리의 시시껄렁한 사내들처럼 가벼운 말투를 사용하고 있어도 히엘이라면 무조건 설레고 마는 하리는 얼굴을 붉혔다.

“수업은 아무 무리 없이 끝났습니다. 폐하.”

살짝 열린 문으로 하리의 말을 다 듣고 있던 핀은 당황스러워서 그만 코웃음이 나왔다. 비참한 기분에 빠져있는데, 수업이 아무 무리 없이 끝났다는 그녀의 새빨간 거짓말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결국 그는 밖으로 나가 히엘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제 이 여자한테 허튼 짓 따위는 시키지 마.”

“호오?”

핀이 문을 닫고 또 방에 처박혀있자, 하리는 난처한 듯 입술을 말았다. 히엘은 하리에게 자그마한 과일 하나를 던졌다. 반사 신경이 괜찮은 편인 하리는 그것을 잡았고, 히엘은 훌륭하다는 듯 박수를 짧게 두 번 치며 맞은 편 의자를 가리켰다.

“먹어. 그거 예전에 광녀가 잘 먹던 과일이었잖아. 그리고 이리 앉아봐.”

“예. 황제 폐하시여.”

“풉, 그런 말 좀 쓰지 말아줄래?”

황제 폐하께 황제 폐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듯 하리는 연신 그 호칭을 사용했다.

“황제 폐하시여, 어찌하여…….”

“안 어울리거든요? 과일이나 드시죠, 아가씨?”

“…….”

이 순간 정말 안 어울리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시녀 앞에서 제왕으로서의 품위를 잊은 듯 편히 구는 히엘이 아닐까. 하리는 시녀의 눈치를 살피며 과일의 껍질을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앉혀놓고 황제라는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한 듯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과일을 먹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즉위한 후로 걸리적거리는 것은 딱 귀찮다는 듯 머리카락을 짧게 쳐버렸는데, 그것이 턱 선을 날카롭게 살려주고 있었다. 하리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도드라진 울대뼈를 보며 이 예쁜 사람이 그래도 남자가 맞긴 하구나 하는 싱거운 생각을 했다. 또 블랙유니콘이 수놓인 검은 제복은 어찌나 멋진지. 넋 놓고 황제를 바라보는 하리와 달리 시녀는 민망해하고 있었다. 어깨와 허리에 대각선으로 두르고 있어야 할 은회색 휘장을 불량하기 짝이 없이 대충 허리에 싸맨 황제에 대한 염려였다.

“호, 혹시 제국 정사에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지요?”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한 하리가 먼저 입을 열자, 히엘은 미지근한 차를 마시면서 과일을 모두 삼켰다. 그리고는 드디어 할 말을 했다.

“세드릭은 잘 있어?”

하리는 허무해졌다. 자신이 이곳에 오는 목적을 새삼 되새기게 됐고, 조금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폐하. 그 분 아니, 그 아이는 식사도 잘 하고, 수업도 잘 받으며, 이틀 전에는 제가 학교에 들러서 보니 교우 관계 또한 아주 활달하게…….”

“말투 진짜 적응 안 되네. 차라리 광녀로 헤실헤실 거릴 때가 편한 것 같아.”

“아…… 네…….”

“그래, 그 말투야. 넋 나간 사람처럼 네에에에하는 게 차라리 듣기 편하다고.”

단 둘이 있을 때도 아니고 시녀가 있는 데서 연신 격 없이 구는 황제가 하리는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세드릭에 대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다 잘 지내는 것 같으나 집에만 오면 통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심려됩니다.”

“그렇군. 그건 뭐 그 또래 애들은 다 그런 거 아닌가. 특히 사내애들은 머리 좀 크면 다 그래.”

하리는 히엘이 조카에 대한 심각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표정을 굳혔다.

“폐하, 단순히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닌 듯합니다. 바깥 생활과 집안 생활에 각각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아이는 집에서 단 한 마디도 안 하고 지냅니다. 그러니 궁의라도 불러서 어떻게 좀…….”

“내버려 둬. 그런 건 궁의는커녕 신도 못 고쳐. 아무튼 다행이네. 그나마 학교에서는 잘 지낸다고 하니. 그 녀석, 무리하게 성장시키지만 않았어도 한창 귀여운 꼬맹이일 텐데. 요만한.”

히엘은 테이블보다 조금 높게 손을 올려 제 조카의 어렸을 적 키를 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리 역시 세드릭의 마력 성장을 어렴풋 알고 있었기에, 만약에 마력 성장 전의 세드릭이 왔다면 아주 귀여웠을 거라며 배시시 웃었다. 그때였다. 귀여웠던 조카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던 히엘이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어떤 말을 뱉어버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귀여운 꼬맹이 하나 키우고 싶지 않아? 나 닮으면 더 좋고.”

“네, 네엣?”

“응. 내 애 좀 낳아달라고.”

청혼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어떠한 기미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나왔다. 하리는 결례란 것도 잊고 약 삼십초 간 멍한 얼굴로 히엘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새 과일을 하나 또 입에 문 히엘이 뒤늦게 그녀의 시선과 시녀의 시선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과일을 손에서 내렸다.

‘아, 나 뭐라고 지껄인 거?’

청혼을 하기로 결심해서 한 것이 아니고, ‘그냥 나와 버렸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바뀐 주변 환경과 신료들의 온갖 채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고, 그런 중에 휴식이랍시고 이곳에 와서 수다를 떨다가 그만 엉뚱한 말이 나와 버린 것이다.

‘맙소사, 청혼? 내가? 저 광녀한테?’

히엘은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하며 휘장을 바로 고쳐 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그 자신의 말이 실수로 나왔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럼 잘 생각 좀 해보…… 아, 이게 아니고. 젠장, 뭐라고 하는 거야. 흠. 농담이야. 에센 양. 수업은 하지 말고 그냥 가끔 세드릭 안부나 전해 줘. 수고해.”

“아, 안녕히, 가십시오.”

한참 전부터 얼굴이 발그레해진 하리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를 배웅했다. 쿵쿵 뛰는 자신의 가슴이 이상했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미남 황제께서 무려 청혼을 해주셨어, 변태 주제에 청혼을 해오네, 잘 나가는 마법사의 청혼이 어찌 이리 싱거울 수 있을까, 폐쇄 공간에서 구해주었던 은인이 청혼을 하는 낭만적인 일이라니, 하지만 낭만이라기엔 너무나 가벼워, 바람둥이의 꾐에 걸려든 걸까, 만약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그보다, 청혼 전에 있어야 할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략된 것 같은데? 언감생심 환상을 진지하게 생각해버린 자신이 참을 수 없이 우스운 하리는 시녀에게 인사를 한 뒤 니이새 둥지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핀이 나왔다. 하리는 오늘 핀이 문을 참 많이 연다고 생각하며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핀은 망설이다 한참 전부터 제 형과 하리가 나눈 대화 속의 이름을 꺼내며 질문을 했다.

“세드릭이 티에리아야?”

이곳에 갇힌 뒤로 모든 것에 무기력하고 무관심하던 그가 제 아들의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자, 하리는 그에게 가진 감정과는 별개로 친절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여태 몰랐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거야?…… 그럼 내가 여길 왜 온다고 생각했어? 난 세드릭을 누나 자격으로 보살피고 있어.”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기에 시녀가 먼저 말해주었을 리도 없었던 건가. 그렇지만 이미 몇 달이나 지났는데 어쩜 저리 무심한 아버지일 수 있는 걸까……. 하리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일순간 핀의 표정을 파악하고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보러…… 갈래?”

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라. 덥수룩한 수염에 말라버린 몸, 누가 보아도 망가진 이런 초췌한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게다가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 죽은 사람으로 알려진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절대로 아들의 앞에 설 수 없었다. 언젠간 만나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단념하고 돌아서는데, 하리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금세 놓아주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아까 들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 통 말을 하지 않아. 하지만 네 얼굴을 보면 집에서도 밝은 모습으로 지낼 수 있을 거야.”

“이 꼴을 보고 밝은 모습이 퍽이나 나오겠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넌 사람 마음을 잘 몰라. 가족은 그냥 곁에 있어서 소중한 거라고. 그러니 모습 따위는 신경 쓰지 마.”

평범하게 살아오지 않았던 핀이 그 말을 긍정적으로 들을 수는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침대에 누워버리는 그가 너무나 야속해진 하리가 조금 다급하게 성질을 부렸다.

“이봐. 우리 아버진 일찍 돌아가셨어! 네가 알고 있듯이 어머니도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어!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슬픔을 넌 몰라! 얼마나 먹먹하다고. 그 아이는 지금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 널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자기가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 지금 세드릭에게 네가 가준다면, 그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거라고. 나 같으면 그럴 거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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